임정에서 실망한 일송은 만주로 돌아와서 만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는데 힘써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지도자들 사이에 의견의 충돌이 있어서,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남의 나라에 피난을 해서 세운 임시정부라서 재정적으로 너무 자금의 조달이 어려워서 악조건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움이 닥치자 상해에 모였던 독립투사들도 제각기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 내에서는 중국, 만주, 연해주, 국내 등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상적인 충돌(공산주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도 있었음)과 그에 따른 분렬이 일어나는데 대해 너무 실망을 느꼈다. 거기다가 상해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의 올바른 방향이 잡힐 수 없다는 생각이 독립운동가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더구나 일본의 손길이 서서히 미치면서 이제 상해에서 생활을 한다는 데에 대해 두려움과 싫어하는 생각들이 아울러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의 서로 나뉘어서 다투는 짓과 대립은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집정관 총재인 이승만의 잘못을 규탄하기 위해 북경에 모인 신숙, 박용만, 신채호 등은 만주에서의 일본군에 대항하는 무력항쟁을 하나로 묶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1920년 '군사통일 촉성회'를 발기하고 만주 일대에서 싸우고 있는 군사지도자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는 회의를 준비하였다. 이 군사통일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소집을 해야 한다는 선언서가 발표되자,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있던 안창호도 임시정부의 직책을 버리고, 여러 애국지사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국민대표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서서, 1921년부터 국민대표회 상해 기성회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상해 임시정부는 좌, 우파(공산당과 민주주의)로 나뉘어서 개조파니 창조파니 하여 분열이 되고, 사상적으로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는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상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부의 지도자들은

“하루 빨리 전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의논 하여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원히 임시정부라는 이름마저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하고, 독촉을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지금 이렇게 대립하고 있는데 무작정 모이기만 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를 만들어 놓고서 모여도 늦지 않다. 먼저 갈등을 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고, 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어떤 실마리도 없이 모이면 오히려 더 갈등이 밖으로 나타나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이기를 꺼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회의에 소집할때 드는 경비가 없어서 회의를 소집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가지고 온 레닌 정부의 원조 자금중 20만원을 쓰기로 하고, 1922년 11 월경 각지로 부터 모인 70여명의 인사가 모여서 예비 회담을 개최 하였다. 그리하여 박은식을 명예회장으로한 국민대표회의준비위원회는 나라 안팎의 각 지역 대표들의 소집을 시작하였다. 회의를 열자는 사람과 좀더 두고 보자는 사람이 팽팽히 맞서 있던 이 회의가 1922년 1월 3일에야 상해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본국에서 각지역의 대표가 극비리에 상해로 모여들고, 해외에 있는 각 독립단체의 대표들도 빠짐없이 상해로 모여들었다. 각지에서 모여든 대표들의 숫자는 140여명이나 되었으며, 이 회의는 독립운동 기간중에 열린 회의중에서 가장 많은 대표가 모인 회의였다. 일송도 이 회의에 군정서의 대표겸 남만주지역 한인의 대표가 되어서 참석하였다.

회의가 개최되자 김동삼은 대표자격 심사위원회에 뽑혀서 대표를 뽑는 방법이며, 대표가 될 만한 사람을 고르는 문제를 두고 의논을 거듭 한끝에 드디어 회의 9일 쨰에 의장선거가 시작되어 2차 투표까지 거친 끝에 의장에 김동삼이 당선 되고, 부의장에 안창호, 윤해, 비서실장에 배달무, 비서에 오창환이 선출되고 각 분과 위원회까지 조직 하였다. 한편 의장에 선출된 김동삼은 곧

“나는 이 회의에서 여러분이 뽑은 의장이 되었지만, 내 자신이 아직 의장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의장직을 사임하겠다.”

하고, 구두로 사임을 청원하였으나,

“우리가 김동삼 동지를 의장으로 뽑은 것은 이번 전국민대표대회의를 가장 잘 이끌어갈 능력이 있다고 생각을 하여 모두의 뜻에 따라 뽑은 것이다. 어찌 이런 큰 책임을 자신의 뜻대로만 사임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 우리 대표 여러분은 김동삼 의장을 모시겠다는 뜻을 제가 제창하는 만세를 함께 하는 것으로 동의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임시의장 안창호가 발의하여 "김동삼 의장 만세" 삼창으로 회의장은 떠나갈 듯하였다. 이렇게 하여 본인의 사양을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전국민대표대회의의 의장으로 뽑히게 되었다.

회의는 각 대표의 정치에 관한 의견을 내놓은 연설을 한 뒤에 상해파 고려공산당원 윤자영 등 40여명이 서명을 한 상해 임시정부 개조안이 제출 되었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개조하여 지금보다 좀 더 새로운 정부로 만들자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국민대표회의는 안창호와 윤자영 등의 임시정부를 개조하여 그대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개조파와, 윤해등 고려 공산당 일크츠크파와 신숙등 북경파가 주장하는 임시정부를 아애 없애 버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자는 창조파가 대립을 하여 서너 달이나 입씨름으로 허송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우리의 힘을 한데 모으자는 의견은 다시 뭉치기는커녕 오히려 임시정부, 개조파, 창조파로 나뉘어서 힘을 낭비하고 있었다.

지리한 대립은 계속되고 있었으나 해결의 기회는 오지 않고, 도리어 40여명의 개조파는 국민회의에서 빠져서 임시정부를 지키겠다고 나서니, 회의는 분열이 되고 더 이상 새로운 좋은 해결 방안이 나오지를 않았다. 처음부터

“민족이 한데 뭉쳐서 우리 민족의 힘을 보여주자”

고, 주장을 해오던 의장 김동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의견의 통합을 위해서 창조파나 개조파 그리고 임시정부의 누구와도 만나서 수습해 보려고 애를 썼으나, 국민의 단합이 이루어질 가망이 보이지 않아 그의 실망과 슬픔은 몹시도 컸다.

그때 마침 만주에서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논의되고 있어서

“선생이 빨리 돌아오시오. 이제 임시정부만 믿고 있을 수는 없지 않소. 우리 만주의 여러 단체를 한데 모아 우리 힘으로 독립을 찾는 날까지 무장 투쟁을 벌여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빨리 돌아오기를 요청하여 왔으므로, 김동삼은 국민대표회의 의장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떠나서 그해 여름에 만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한편 국민대표회의는 부의장인 안창호가 개조파에 서명을 하고 대표회의를 탈퇴하므로써 80여명만이 남게 되어 이들 남은 창조파 대표들만으로 회의를 진행하여 윤해를 의장으로, 신숙을 부의장으로 뽑아서, 그들 끼리 새로운 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 하였다. 다시 말해서 공산당을 따르는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이다. 이로써 독립운동을 하면서부터 우리 민족의 대표들은 이때 벌써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가지 사상을 따라 두 개의 임시정부를 가지게 되었다.

▲ ‘칼을 든 선비’로 알려진 심산 김창숙 선생이 1950년대 자신이 설립한 성균관대학교에서 사람들과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 대표로 참석한 심산 김창숙(대한민국이 건국 후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총장을 지냄)은 일송과 같은 고향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같은 의성 김씨라는 점과, 나이가 한살 아래인 또래로서 서로의 뜻이 통하는 동지로 활동을 해왔으나, 일송은 창조를 주장하고 심산은 개조를 주장하는 사이로서 이 회의장을 떠나 두 분이 사석에서 따로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심산의 자서전에 소개되고 있다.

심산: “선생이 지금 창조를 주장하여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장차 해삼위(만주지역) 로 가서 새로 정부를 세우겠다니, 선생의 역량이 능히 분열된 민족을 포섭해서 영도해 나갈 수 있겠소? 나는 이제부터 우리 민족이 너무 분렬되어 수습 할 사람이 없을까 걱정이 됩니다. 개탄할 일 이외다.”

일송: “처음 내가 창조를 주장한 것은 임시정부의 여러분들이 자기 견해 만 고집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였거니와 그들이 크게 국민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에 그 들에 대한 불만이 갑자기 격화되어 마침내 창조로 결론을 낸 것이오. 그러나 지금 현상은 분열이 더욱 심하여 보합할 가망이 없고 또 구석진 해삼위는 도저히 정부 기관을 설치할 땅이 못되는지라, 방금 여기 사람들과 함께 수습할 방도를 다시 의논하고 떠날 것이며, 또 만주로 가서 그곳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선후책을 강구할 작정이외다.”

심산: “내가 처음 상해회의에 불응한 것은 분열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고, 그 뒤 해삼위행에 응하지 않은 것은 그곳이 마땅한 장소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오. 지금 선생 역시 분열을 우려하고 해삼위로 가려 않는군요. 보합의 책임은 선생이 아니고는 짊어질 사람이 없으니, 각별히 도모해야 할 것이외다.”

일송: “감히 힘쓰지 않겠습니까?”

이 회의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일송이었다. 이 두 사람은 국민회의에서 뽑은 국민대의원 30명 안에 다 같이 선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의견은 일송이 주장하는 창조론 쪽으로 기울어져

“우리가 바른 임시정부를 세우려면 다시 해삼위에서 대회를 열어서 새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여러 대표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하고,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든 두 분의 이야기처럼 일송은 만주로 돌아와서 창조파의 일에서 손을 뗴었고, 다시는 상관하지 않았다. 상해 국민회의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일송은 민족의 분열을 막고 뭉치는 방법을 생각하고,

“우리 동포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만주지역에서 각 단체를 한데 모아서 투쟁의 방향을 통합하는 일이 가장 급한 일이다. 우리 동포들의 뒷받침이 없는 상해에 임시정부를 두는 것보다는 우리 동포가 많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다시 세워야 한다.”

하고 외쳤다. 그러나 국민회의에서는 그의 이런 주장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의견 때문에 '만주를 중심으로 창조'를 주장하는 일송도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새로운 공산주의 중심의 임시정부를 창조'하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대표가 많아질 지경이었다.

“김동삼도 창조를 주장하고 있지 않아. 그럼 김동삼 의장도 공산주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이런 의심을 받으면서 국민대표회의의 의장직을 계속 맡아 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오히려 분열을 일으킨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만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저자 김선태)] 원본 파일 /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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