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 시인의 언덕

성곽은 인왕스카이웨이로 끊겼다가 청운공원으로 다시 이어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줄기의 마지막 언덕이며, 이곳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을 만들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을 때 이곳에서 멀지 않은 누상동에서 하숙했다. 그때 이 동산을 산책하면서 식민지 청년의 서러운 심정으로 가을밤의 별들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 무렵 저 유명한 「별 헤는 밤」이며 「서시」가 탄생했다.

그는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신으로 1941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했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독서회 사건으로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교토제국대 학생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복역 중이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국의 감옥에서 참혹한 옥사를 당했던 불령선인, 그가 이 언덕에 금방이라도 나타나 투명하도록 창백하고 지순한 얼굴로 그의 자작시를 읊조릴 것만 같다. 오늘 우리는 한 참가자의 낭송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감상했다. 낭송을 마치자 일제히 나직한 찬탄사가 새어나왔다.

▲ 시인의 언덕 오르는 길

  < 서시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조국광복을 꼭 6개월 남겨놓고 애절한 삶을 마감했던 망국의 시인은 절절하게도 우러렀던 밤하늘의 별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가 남긴 시만이 그의 고독과 방황, 숭고한 인류애와 애국심을 말해주고 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생애인가!

이 언덕은 이제 서울 시민들에게 추상의 언덕이며, 성찰의 언덕이며, 동시에 자유정신을 고취하는 언덕이 되었다.

 

 ► 이상(1910~1937)의 집

오늘의 마지막 여정이다. 서촌 통인시장 근처 이상의 집이다.

그의 본명은 김혜경으로 백부에게 입양되어 세 살부터 20여 년간 이 집에서 살았다. 철거될 위험에 처했던 이 집을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시민모금과 기업후원으로 매입하여 보전 관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이상문학상을 제정하고 주관하는 「문학사상」 여러 권이 책상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그는 1926년 동광학교(후에 보성고보로 개명)를 졸업하고, 1929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김유정, 박용만, 정지용, 이효석, 이무영 등과 모더니즘문학 단체인 구인회(九人會)의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주요 작품으로는 「거울」, 「오감도」등의 시와 소설 「날개」,「종생기」, 수필「권태」등이 있다.

이상은 화가 구본웅의 절친한 친구로 그의 이모 변동림(卞東琳)과 1936년 6월경 혼인하였으나,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그 다음 해인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어 지병 악화로 그해 4월 동경대학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이상의 시비는 1990년 5월 그의 탄생 80주기를 맞아 모교 보성교우회와 부인 변동림이 함께 보성중고등학교 교정에 건립한 것이다. 이때 변동림은 많은 문학인들에게 일일이 친필을 쓰는 등 헌신적으로 건립기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상이 죽은 후 김향안(金鄕岸)이라고 개명한 변동림은 한국 미술의 천재 김환기 화백과 재혼했다. 그러니까 두 번 다 한국의 천재 예술가와 결혼한 희대의 신여성이었다. 김환기가 죽은 후에는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하고 운영하다가 2004년 타계했다. 수화 김환기의 작품이 최근 한국이 낳은 화가 중 최고의 가격을 누리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 같다.

 

 ► 뒤풀이

이제 12시 30분, 서두른 탓에 일정은 거의 예정대로 마쳤다. 탐방객들은 나의 해설이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해설보다 훌륭하다고 했다. 거기에는 진심이 들어있었다. 비록 그들의 찬사가 의례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비로소 해설가로서의 나의 실존을 인식했다.

박노수미술관을 나오면서부터 서촌 액세서리가게며 옷가게 등을 기웃거리기 시작하던 참가자들은 이상의 집에 와서는 거의 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럼에도 심 이사가 말했다. “이제 점심과 뒤풀이를 하러 갈 시간입니다. 다른 볼일이 있는 분들은 <문화공간 온>에 안 가셔도 괜찮습니다.” 참가자 한 사람이라도 뒷풀이에 함께하면 좋을텐데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눈치가 느린 내가 그의 의도를 알게 된 것은 <문화공간 온>에서 뒤풀이를 시작할 때였다. 겨우 40여 명만 함께 왔는데도 주방과 객장의 손님 맞을 준비가 부족했디. 한주회 회원들이 모두 나서서 손님 접대에 나섰기 망정이지 150명 참가자의 반인 70~80명만 들이닥쳤더라도 객장은 곤란할 뻔했다.

심 이사가 사회를 본 뒤풀이는 참여자 각자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뒤풀이 중에도 나의 해설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런 행사를 자주 갖자고 이구동성으로 소원했다. 소고기덮밥으로 점심을 하고 평소에는 마시지 않는 막걸리 한 잔까지 걸쳤다.

뒤풀이가 끝날 무렵 심 이사가 나에게 건배 제의를 했다. 나는 건배 제의보다 무언가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하고 싶었다. 노래 잘 하는 김진표 위원장에게 무슨 노래를 부르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거 있잖아요. 전번에 불렀던 미국 노래. 닐 세다카(Neil Sedaka)의 '당신은 나에게 모든 것(You mean everything to me.)' 그걸 불러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은 그런 하늘하늘한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외치고 싶은, 노래 같은 구호라고 할까? 구호 같은 노래라고 할까? 그런 것을 무작정 외치고 싶었다. <문화공간 온>을 처음 만들 때의 조합원들 열정은 점점 식어가는 것은 아닌지? 여기에 기울였던 우리들의 애정은 어디로 갔는가? 처음부터 비약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점진적 진보의 행보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곳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한산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라도 ‘친구들이여,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나는 힘껏 소리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의 우수를 떨치고 싶었다.

 

이 세상에 한겨레 없으면 무슨 재미로

달이 떠도 한겨레 해가 떠도 한겨레

한겨레가 최고야

아니야 아니야 <문화공간 온>이 최고야

 

내가 선창을 하니 참가자들도 일제히 따라 불렀다. 그리고 반복했다. 우렁찬 화음이 실내를 진동했다. 비로소 가슴이 후련해졌다.

3시쯤에 귀가하는데, 흥겨운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인사동 거리의 행인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힐끗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 끝 -  

   2017년 5월 6일 허창무

 

편집, 사진 : 양성숙 부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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