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와 팝송의 완벽한 조화

‘노래는 현재를 채우는 동시에 미래의 어딘가에 있는 청자의 귀에 닿기를 희망한다. 노래는 앞으로 다가간다.’ -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우리 삶에 ‘음악’ 이 주는 영향은 대단하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 장면들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간직할 수 있게 하고, 길 위에 굴러다니는 검은 봉지와 같은 하찮은 것들에도 공감을 하게 하는 것이 음악이다. 이러한 음악은 예술가의 영감이 되기도 하고, 그 영감이 또 다른 위대한 문화로 탄생하기도 한다.

소설가이자 화가인 존 버거는 아랍어로 노래하는 여가수의 공연을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노래 한 곡 한 곡을 ‘총체적 경험’ 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렇게 음악은 국적 불문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통의 수단이며, 이것이 속한 총체적인 소통의 수단인 ‘예술’ 그 자체의 근본이다.

‘예술의 근본은 음악이다.’ 라는 것은 물론 주관적이고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영화’ 에 있어서 음악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의 분위기, 영화의 色을 만들어내고 관객의 몰입도를 몇 배로 끌어올릴 수 있는, 아주 고마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라디오헤드(Radiohead)하면 떠오르는 노래는 ‘Creep’ 이다. 정작 그들에게 달가운 노래는 아니지만 국적 불문하고 모두가 이 노래를 사랑한다. 또 이 노래와 떼 놓을 수 없는 것은 트란 안 홍 감독의 베트남 영화 <씨클로(Cyclo,1996)> 이다. 고요함 속에서 우울의 극치를 달리는 이 영화는 ‘제52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을 수상한 명작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라디오헤드의 ‘Creep’ 은 그 노래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명장면을 탄생시켰다. ‘Creep’ 의 가사와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과 그 속에서 대사 없이 눈빛만으로 연기하는 양조위의 명연기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 왕가위의 영화, 모든 色의 조화

▲ 홍콩 영화계의 거장 왕가위

왕가위의 영화는 눈빛으로 기억된다. 그의 페르소나인 장국영과 양조위의 눈빛은 그의 영화를 기억하게 하는 가장 강렬한 色이다. 물론 이들이 출연하지 않는 영화들도 있지만, 천진난만한 눈웃음에도 슬픔을 담고 있는 장국영의 눈빛과 우수에 젖어있지만 강렬한 양조위의 눈빛은 그의 영화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눈빛만큼이나 그의 영화를 짙은 향기로 기억될 수 있게 하는 色은 바로 ‘음악’ 이다. 숨소리 하나에도 의미를 담는 그의 영화에서 음악은 주인공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음악 중에서 ‘팝송’ 을 빼놓을 수 없다. 베트남 영화에 등장한 팝송이 영화의 향수로 자리 잡은 것처럼, 그의 영화에서도 팝송은 영화를 풍성하게 하는 OST(Original Sound Track)의 개념을 넘어서 영화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1989)> 의 'Maria Elena'

국내에서도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냈던 장국영의 맘보춤을 기억할 것이다. 바람둥이 독신주의자 아비가 거울을 보며 맘보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를 대표하는 명장면이자 80년대 영화중 최고의 장면으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우울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뻔뻔스럽게 매력을 뽐내는 아비의 내면 또한 외롭고 우울하다. 하지만 그가 맘보춤을 추는 장면에 등장하는 이 음악은 전반적인 작품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여유롭고 신나는 분위기의 곡으로, 1932년 멕시코의 작곡가 Lorenzo Barceleta가 만든 하비에르 쿠가(Xavier Cugat)의 ‘Maria Elena' 이다. 이 곡은 발 없는 새처럼 지치지 않고 날며, 여자들을 홀리며 제 멋대로 사는 아비의 인생관을 그의 쓸쓸한 삶과는 대조적인 느낌의 음악으로 더욱 강조하고 있다.

<아비정전>의 메인 테마 음악인 Los Indios Tabajaras의 'Always in my heart' 또한 마찬가지 이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 삽입되는 이 음악 또한 자신을 ‘발 없는 새’에 비유하며 사랑을 했지만 사랑 받지 못한 채 땅에 내려앉은 아비의 허무한 삶을 더욱 극대화하여 느끼게 해준다.

▶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1994)> 의 ‘California Dreaming'

왕가위의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해피엔딩으로 끝난 이 영화는 미소가 지어지는 귀여운 영화로 기억한다. 왕가위의 대표작 <화양연화>를 본 후 바로 접한 영화라 그런지는 몰라도 두 영화가 같은 메시지의 연장선에 있지만 아예 다른 매력을 주어 왕가위 감독에게 푹 빠졌었던 기억이 난다.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의 외로움이 만나 새로운 사랑이 되고 이들은 같은 시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대한다.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두 개의 이야기, 각자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로 이뤄지는 이 영화는 엉뚱하고 순수한 매력을 가졌다.

이러한 매력을 극대화 시키는, 이 영화를 대표하는 팝송은 The Mamas&Papas의 ‘California Dreaming' 이다. 극 중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페이(왕비)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1부에서 2부로 전환될 때 등장하며 시공간의 통합과 이들의 불안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나타내는 테마곡이 된다. 듣고만 있어도 어깨가 들썩이는 이 노래는 경찰 663(양조위)을 사랑하는 페이의 순수하고 엉뚱한 행동들을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며 웃음 짓게 만든다.

▶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1997)> 의 'Happy Together'

테마곡의 제목이 영화 제목인 이 영화. 그 당시에는 낯설었던 ‘동성애’ 를 소재로 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던 영화이다. 이 영화의 명장면은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가 서로를 응시하며 탱고를 추는 장면이다. 여기서는 'Tango apasionado' 가 흘러나온다.

‘나를 위한 유일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나를 위한 당신. 그래서 함께 행복하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해피투게더>하면 The Turtles의 ‘Happy Together' 을 떠올린다. 영화의 엔딩에 흘러나오는 이 음악은 서로의 깊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즐거운 노래인데, 영화의 주제곡으로 기억하는 'Happy Together' 는 슬픈 음악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서로의 엇나간 사랑으로 보영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이구아수 폭포를 함께 보지 못한 이들의 모습 뒤에 ‘함께 행복해서 행복한’ 노래가 흘러나오니, 슬픔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2000)> 에서는 영화를 대표하는 'Yumeji's Theme' 말고도 냇킹콜(Nat King Cole)의 ‘Quizás Quizás Quizás' 가 삽입되었는데, ’Quizás‘ 는 ’아마도‘, ’어쩌면‘ 의 의미로 서로의 마음을 알지만 깊이 다가갈 수 없는 마음을 대변한다.

’시보네 당신이 오지 않으면 나는 사랑 때문에 죽으리라.‘

전혀 다른 영화지만 <화양연화> 의 후속으로 여겨지는 <2046> 역시 Connie Francis의 ’Siboney' 가 삽입되어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농도 짙게 느끼게 하였다.

▲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가진 色은 '시간' 과 '공간' 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으로 구현된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많은 色을 가지고 있다. 상황에 살아있는 배우들의 눈빛(연기), 섬세한 연출, 주인공의 복잡한 심리를 그대로 담은 음악 등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모든 色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의미를 전달한다.

그는 순간의 영원함에 대해, 타이밍의 중요성에 대해, 우연이 아닐 수 있는 인연에 대해, 잊는 것과 잊혀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 모든 것은 ‘시간’ 과 ‘공간’ 이라는 주제로 통합되고, 결국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에 대한 것이다.

그는 그 당시 홍콩 영화계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액션 영화의 화려함보다 슬로우 모션에서 드러나는 남녀의 표정을 중시하였고,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보다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담아낸 한 편의 시 같은 이야기와 연출로 관객 스스로 느끼도록 하였다.

이렇듯 왕가위의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에서 ‘음악’ 은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소통의 수단’ 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또한(<올드보이>, <박쥐>, <아가씨> 등) 그만의 色을 드러내기 위해 음악이 공여한 바가 크다.

어떠한 의미와 메시지를 담고 있든 간에, 음악은 ‘재료’ 를 넘어서 예술을 포괄하는, 무한히 퍼져나갈 수 있는 ‘소통의 수단’ 으로서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할 것이다.

정세영 대학생기자  youjs12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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