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 비석에 새길 비문의 고무판 작업을 한국에서 마치고 인편으로 중국으로 보낸 다음날에야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다. 저가항공으로 떠난 장거리 여행이었지만 생각보다 편안했다. 호놀룰루공항에서 만난 당고모는 무릎이 아파 지팡이에 의지하는 키 작은 할머니였다. 어릴 때 만났다지만 50년이나 지났으니 초면과 다름없어 어색한 인사를 마친 후 시내버스를 타고 당고모의 집으로 갔다. 당고모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손자들 사진이 집안 여기저기를 장식하는 여느 한국 할머니 집과 같았다. 아들 둘은 각자 독립해서 미국의 다른 주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 공항에서 만난 당고모 최경주

85세이신 당고모는 5년 전 암에 걸렸다가 항암치료로 완치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자신에게 남은 인생은 온전히 덤이라고, 하느님이 자신을 살려주신 이유가 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역사를 똑바로 증언하라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생인 인국 당숙이 살아있을 때는 아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동생이 하자는 대로 맡겨두었으나 두 동생이 먼저 떠난 지금 그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그동안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지인을 통해 ‘봉오동전투의 영웅, 최운산 장군’을 기리는 손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하셨단다. 나도 당고모한테 묻고 싶은 것이 많았고 들려드려야 할 이야기도 많았다. 특히 어려서 고향을 떠난 당고모가 잘 알지 못하시는 윗대, 특히 증조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드려야 했다. 그러나 85세이신 당고모는 나보다 더 마음이 급했다. 짐을 풀고 앉자마자 고모의 첫 마디는 “'청산리전투'를 아니? 넌 '청산리전투'를 어떻게 생각하니?”였다. 나는 “'청산리전투'는 따로 없었다. 그 전투는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이었다. '봉오동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 반격을 했던 것으로, 밀산으로 이동하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들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였다.”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경주고모는 “그건 네가 옳게 알고 있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당고모는 86년 중국방문 때 청산리에 직접 가보았다고 하면서 청산리전투는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자신이 서울에 살 때 이범석씨가 소설을 써서 청산리전투의 역사를 왜곡했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빈오빠(최진동 장군의 3남)가 그 책의 내용이 틀렸으니 출판하지 말라고 요구하며 이범석씨와 많이 다퉜다.”고 옛 기억을 불러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처절한 삶을 한 두 사람의 영웅담으로 단순화한 소설 『우등불』,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사에서 한 줄기로 이해해야 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별개의 사건으로 분리시키고, 을사조약 이후 장기간에 걸쳐 준비해 나간 만주의 항일 무장 독립전쟁을 청산리전투 중심의 한 편의 드라마로 기억하는 단초를 제공한 소설이다.

1960년대 아버지가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쓰셨을 때 어머니가 경주 당고모와 함께 이범석씨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 모두 외면당했었다. 당고모는 그때 이범석는 만나지 못하고 그의 중국인 부인만 만나고 돌아서야 했다. 이범석씨가 봉오동에 머물 때 그 중국인 부인과 함께 최운산 장군의 집 사랑채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 부인은 반가워하면서 최운산 장군의 서훈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범석씨는 끝내 할아버지 형제들의 업적을 밝히는 일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말았다.

경주 당고모가 들려주는 봉오동 이야기는 예전에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집안이야기와 겹치는 내용이 많았다.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였던 최진동·최운산 장군 형제의 저택은 견고한 성채였다. 당시엔 밀정들이 많았고 비적들의 공격도 빈번하던 때라 성을 높이 쌓았고 그 폭도 1미터가 넘었다. 견고하게 지어진 성은 성문을 닫으면 아무도 출입을 할 수 없었다. 부대장인 최진동 장군의 이름으로 발행한 통행증과 비표가 없으면 바로 즉결처분을 당할 만큼 군율이 엄격했다. 경계가 삼엄한 성채 안에서 약 300마리의 비둘기를 키웠는데 지금처럼 통신으로 연락을 할 수 없던 때라 비둘기가 비상 연락책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 들어서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들으니 새삼스럽고 또 재미도 있었다.

▲ 젊은 시절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경주 당고모는 어린 시절을 보낸 도문 집에 최진동 장군이 모스크바에 갔을 때 레닌과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본인이 남한으로 이주할 때 액자가 크고 무거워서 남겨놓고 왔는데 없어져 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 사진은 최진동 장군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국제회의 극동민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당시 최진동 장군은 뒷주머니와 가슴에 그리고 양 다리에 총을 하나씩 숨겨놓고 있었는데 대회장 입구에서 검문을 하면서 무기를 모두 꺼내 맡기라고 했다. 최진동 장군이 그것을 거부하며 옥시각신하느라 입장이 늦어져서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회의가 시작된 뒤였다고 한다. 그 광경을 최진동 장군이 큰 소리로 “이 회의를 중단하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도 이미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다.

그날 레닌이 아파서 사회는 트로츠키가 봤다고 한다. 트로츠키는 그 소리 듣고 회의를 중단하고 내려와 최진동 장군에게 악수를 청하고 자리 잡은 뒤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공식 일정 후 레닌이 최 장군을 자신의 공관으로 초대했다. 레닌이 자신의 모자를 최진동 장군에게 씌워주고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최진동 장군은 그 사진을 크게 뽑아 두 개의 액자에 넣어 하나는 봉오동 집에(당시 둘째 아들인 국량이 살고 있었다)걸어두고 하나는 자신이 후처와 함께 살고 있던 도문시에 있는 집에 걸어두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나며 미처 챙기지 못한 사진은 공산화와 혼란스러울 정국을 거치며 사라졌고 다른 사진들도 문화혁명 때 가족들이 모두 태워버렸다. 당고모는 “예전에 일본인이 집에 찾아와서 그 사진을 500원에 사겠다고 했을 때 절대로 안 판다고 했는데... 만약 그때 팔았더라면 아버지의 사진이 어쩌면 지금까지 남아있었을지도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당고모는 작은아버지 최운산장군의 봉오동 집에서 놀던 기억이 많다. 작은엄마인 할머니 김성녀와 나눈 여러 집안이야기들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도문의 집에서 출발해 수남촌의 작은집까지 걸어가곤 했는데 도문에서 15리 정도를 걸으면 달라재 고개에 당도했고 거기서 안산 다리를 건너 다시 15리길을 더 걸으면 수남촌의 작은아버지 집에 도착했다. 걷기엔 조금 먼 길이라 오가면서 안산에 있는 큰집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쉬다가 다시 길을 가곤 했다. 정확한 친족관계나 촌수는 몰랐다. 우리 집안보다 항렬이 높아 큰집이라고 불렀는데 아주 가난한 집이었다. 안주인인 큰할머니는 아주 늙어서 이빨도 거의 없고 눈에 백내장이 걸린 모습이었다. 큰할아버지도 함께 사셨는데 우리가 가면 무척 반가워했다. 가끔은 화로에 뚝배기를 올려서 된장찌개와 조밥을 해서 같이 먹기도 했다.”

“작은 엄마(김성녀)는 집에서 한 달에 한 번 이상 돼지를 잡고 순대도 만들었고 두부는 거의 매주 만들었다. 30가구가 넘었던 수남촌 마을사람들과는 한 가족처럼 지냈다. 작은집은 모든 동네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드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경주 당고모는 한달에 한 두 번 작은집에 오는 날이 정말 좋았다고 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어 잔칫집에 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조상이 많았던 탓에 제사가 없는 달이 거의 없었다. 한식, 청명을 비롯해 명절이나 제삿날이 되면 모든 준비를 최운산 장군의 집에서 했고 도문의 최진동 장군의 가족은 봉오동으로 와서 제사를 지냈다. “작은 엄마가 제사음식을 모두 준비하셨는데 보통 세 수레에 가득 제사음식을 싣고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서 제사를 지내고 작은집으로 돌아오면 저녁때가 되었는데, 모든 식구들이 모여서 저녁을 함께 먹은 후에 최진동 할아버지와 식구들은 다시 도문으로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 공원에서 당고모와 함께

최운산 장군이 집을 비웠을 때 마적들이 습격해온 적이 있었는데 집안 식구들이 모두 총을 들고 싸웠야 했다. 이 이야기를 김성녀 여사의 담대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가끔 선택되곤 했다. 담이 높아 넘어오지는 못했지만 서로 총격전을 벌였는데 젊이들이 벌벌 떨면서 무서워하자 할머니가 “사내들이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디다 쓰겠냐”고 호통을 치면서 직접 총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경주고모는 그때 최진동 장군의 큰딸인 옥련 당고모가 크게 다쳐서 이후 약간의 장애가 생겼다고 했다. 사실 그 일은 공산당 계열의 마적들이 저지른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진동 형제들은 군자금을 분배할 때 공산주의 계열을 배제하지 않고 모든 부대에 군자금을 지원했다. 민족주의 계열인 대한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모든 독립운동 단체의 대통합을 이루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아버지 최진동 장군이 1941년 12월에 돌아가시고 4년 후인 1945년 2월 어머니마저 마차사고로 사망하자 경주, 복순, 인국 3남매는 외갓집에서 지냈다. 그런데 그 무렵 소련 비행기가 만주를 폭격했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죽게 되자 외조부와 외조모는 어린 3남매를 데리고 피난 떠났다. “도문역에 갔더니 피만민이 인산인해라 기차를 탈 수가 없어 용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용정에 외할머니 아는 집에서 한 달 정도 숨어 살았는데 해방이 되었다고 하더라.” 경주의 외조부와 외조모는 손주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어린애 셋을 데리고 당장 두만강을 건너갈 수가 없으니 외할아버지가 먼저 서울에 가서 집을 구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두만강이 얼어붙는 겨울에 강을 건너기로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소유했던 재산을 처분해 남쪽에 가서 살 돈을 준비했다. 외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삼남매 중 맏이인 경주는 그해 가을 다시 봉오동에 가서 추수를 해 남한으로 갈 여비를 더 마련할 수 있었다. 외조부가 아이들을 데리러 다시 돌아온 겨울에 고향을 떠나기 전 수남촌에 들렀다. 작별인사를 하러 온 조카 경주에게 작은엄마 김성녀 여사는 “경주야 가지 말고 작은 엄마랑 같이 살자. 이제 작은 엄마가 너를 돌봐줄게”하면서 말리셨단다. 경주 당고모는 그 이야기를 하며 “작은 어머니가 우리에게 참 잘해주셨는데...” 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겨울 추위 속에 외조부모와 경주 삼남매, 다섯 식구는 함께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내리면서 1946년 1월 1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날 어린 경주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서울시청 근처의 건물 담벼락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독립영웅 최진동 장군” 그렇게 먼 길을 내려와 도착한 서울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벽보에서 발견하다니... 마치 기적 같았다고 한다. 그 옆에는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이름도 나란히 적혀있었다. 경주 당고모는 어린 마음에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서울에서도 높이 평가를 받는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에 깊이 감동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봉오동전투와 최진동 장군”의 이름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최진동 장군의 둘째 아들 국량 당숙도 공산화로 숙청이 시작될 때 구사일생으로 봉오동을 탈출해 서울에 왔으나 얼마 살지 못하고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셋째 아들 국빈 당숙은 해방 전 만주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을 하다 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어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국빈이 잡혀가자 신혼의 아내가 남편을 만나러 서울로 왔는데 서대문형무소에서는 면회를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최운산장군의 셋째 딸인 옥순 고모가 서울에서 이화여전을 다니고 있었다. 옥순고모가 이화여전의 선생님 한 분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분의 주선으로 사촌오빠 국빈과 올케언니가 면회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국빈 당숙은 해방 때까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해방을 맞아 출옥한 국빈당숙은 만주로 돌아가 자신 소유 땅을 팔아 아내와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이후 국빈 당숙은 광복회에도 참여하면서 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최진동 장군 일대기를 춘원 이광수에게 의뢰하기도 했으나 원고료 문제로 중단되고 말았다. 국빈 당숙은 당시에 이범석씨가 소설 『우등불』 을 써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분리시키고 만주의 항일무장 투쟁사를 왜곡하는 것에 분노했으나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역임한 실세 정치인의 영향력을 넘어설 수 없었다. 이범석씨의 견제를 당하며 술로 화를 달래던 국빈 당숙은 어린 두 딸을 남기고 술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다.

서울에서 터를 잡았던 경주 당고모네는 6.25를 겪으며 생활기반이 모두 무너졌다. 외조부와 외조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맏이인 경주가 동생들을 키우고 공부시키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당고모는 1970년 초에 두 동생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그곳에서 열심히 노력해 생활이 안정되었고 막내 인국 당숙이 시작한 의류사업이 성공해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이지만 미국 국적이 있는 삼남매는 1986년 봉오동을 찾아갔다. 1945년 고향을 떠난 후 41년만의 방문이었다.

하와이에서 출발, 홍콩을 거쳐 장춘까지는 비행기로, 장춘에서 연길까지는 기차로, 거기서 다시 도문까지 자동차로 이동한 후에야 봉오동에 도착했다. 이틀이 넘게 걸렸던 대장정이었다고 한다. 봉오동을 비롯해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 장군이 소유했던 지역들을 두루 둘러보았다. 공산당이 모두 몰수해버려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고향땅이었지만 그 땅을 다시 밟는 감회는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둘째오빠 국량과 큰언니 옥련의 자식들, 그리고 둘째 언니 오복의 자식들이 봉오동과 석현, 왕청, 연길, 도문 등 연변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문화혁명 당시 연변에서는 지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자기 재산을 지키려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결국 친일을 했다고 폄훼했다. 봉오동 마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더구나 최씨 집안의 먼 친척이라는 사람이 총사령관인 최진동 장군이 친일 행위를 했다고 거짓 내용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최진동의 손자도 우리 할아버지는 친일이라고 자신의 당안(호적)에 기록했다고 한다. 문화혁명 시기에는 그랬다. 공산당에 충성 경쟁을 하듯이 손자들마저 할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살아남으려 몸부림 쳐야 했던 것이다.

▲ 하와이 한인교회에 가서 함께 기도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문화혁명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달라졌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친일파로 매도했던 최진동 장군의 손자들도 이제 독립투사 최진동 장군의 후손으로 국적을 회복해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다. 그렇게 거부하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이름이 이제는 그들의 국적을 보장하는 가장 든든한 배경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주 당고모와 같이 닷새를 지내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 날 하루 외출한 것을 제외하고는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함께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가슴 속에 품고 살았던 봉오동의 모습을 함께 그려냈다. 노년의 당고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알아듣는 나를 무척 신기해하면서 자신이 알고 잇는 것을 하나라도 더 들려주고 싶어 했다. 독립전쟁의 주역인 최진동 장군의 역사를 꼭 찾아달라는 당고모의 당부가 간절했다. 고모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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