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형제였으나 최진동과 최운산은 생김새도 성격도 아주 달랐다. 최진동 장군은 형보다 키도 크고 힘센 아우 운산이 뒤에서 받쳐주어 늘 든든했다. 집안일의 처리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함께 하면서도 모든 것을 알아서 정리해주는 믿음직한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손들이 페미니스트로 기억할 만큼 교육을 비롯한 생활문화 전반에서 딸에 대한 차별이 없었던 최운산 장군과 달리 가부장적인 면모가 강했던 최진동 장군은 딸들은 공부를 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카들까지 학교에 가지 못하게 막으셨다. 또한 무슨 일을 하던 형님을 앞세우며 최진동의 업적으로 정리하는 동생들의 헌신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셨다. 의좋은 형제였지만 조선시대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살았던 선조들의 고지식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의 변화를 앞서는 열린 생각을 지녔던 최운산 장군도 형님 앞에선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았다. 셋째 치흥도 형님들이 결정하는 모든 일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전력투구했다. 그저 의좋은 형제들이 우애를 나눌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다. 독립군을 모집하고 군대를 운영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는, 모든 사람의 목숨이 걸린 전쟁터였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전투현장에서 독립군들을 이끄는 이 형제들의 일치와 서로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무엇보다 큰 힘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최진동 3형제가 혼연일체가 되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었다.

최진동 장군은 전처에게서 딸 둘과 아들 셋, 후처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아 모두 여덟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는 먼저 세 아들의 이름은 국신國臣, 국량國良, 국빈國斌으로 지었다. 모두 나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에 나라 國자를 쓸 만큼 민족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했다. 큰아들 국신은 아버지의 사랑을 넘어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잘 생기고 똑똑한 젊은이였다. 그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했듯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몇 천 명에 이르던 독립군 동지들을 잃었던 '자유시참변'을 겪고 돌아와 어려움 속에 무장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시 다지던 최진동 장군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큰아들의 선택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닮은 강직한 성품의 국신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충돌 이후 큰아들 국신이 병이 났고 1년여를 앓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큰아들이 죽던 날 며느리마저 어린 딸 하나를 남긴 채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목숨처럼 아끼던 큰아들과 며느리를 동시에 잃은 최진동 장군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사촌동생인 아버지는 국신 형님이 정말 멋진 젊은이였다고 회상했다. 큰아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지녔던 최진동 장군은 오랫동안 애통해 하셨다.

어린 손녀는 할아버지의 극진한 돌봄 속에 자랐다. 그리고 열여섯에 시집을 갔다. 부모 없이 자란 손녀딸이 남편의 사랑이라도 많이 받기를 바라며 마음으로 일찍 혼인을 시켰시며 예단을 세 수레나 실어 보냈다고 한다. 친정 근처인 도문 소하구에 살았는데 강이 가까워 물난리가 날 때면 어린 색시를 신랑이 업어서 건네주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던 손녀는 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이 돌아가신 뒤 폐병에 걸려 친정으로 돌아왔고 얼마 후 사망하고 말았다. 가슴 아픈 이야기다.

어려운 시대, 가정적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많았지만 최진동 장군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 3형제가 함께 북만주 일대를 다니며 동지들을 규합해 다시 독립군부대를 건설했고 새로운 터전을 다졌다. 글을 모르는 어려움도 지혜로운 동생 운산이 곁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인집안 장남 최진동 장군은 눈빛 하나로 그 모든 것을 제압하는 뛰어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둘째부인의 소생인 경주 당고모는 어린 시절 아버지 최진동 장군과 함께 지낸 추억을 많이 들려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새로운 내용은 홍범도 장군과 한한 일화들이다. 32년생인 최경주는 홍범도 장군을 어릴 때 몇 번 만났다고 한다. 역사는 홍범도 장군이 1920년 말 연해주로 들어간 이후 그곳에 계속 머물렀고 1937년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후에는 간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경주 당고모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최진동 장군 형제들과 홍범도 장군은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러낸 동료였다. 승리의 기쁨도 실패의 아픔도 함께 나누던 사이였다.

중앙아시아로 이주 당하기 전 홍범도 장군이 연해주에 머물 때는 가까운 만주로 넘어와 봉오동과 도문을 여러 번 방문했다는 것이다. 홍 장군이 도문에 있는 최진동 장군의 집에 방문했을 때 어린 경주가 홍범도 장군의 무릎에서 놀았다고 했다. 홍범도 장군은 경주를 예뻐하면서 봉오동에 들어와 북로독군부에 합류했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곤 했다. 당신이 소싯적에 유명한 포수였던 이야기, 몇 십 명의 부하를 데리고 봉오동에 들어왔지만 최진동장군을 만나 함께 큰 부대를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경주 당고모는 홍범도 장군을 아주바니(큰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경주고모는 한동안 못 만났던 홍범도 아주바니를 봉오동의 집에서 다시 만났다는 것이다. 1941년 최진동 장군이 돌아가신 다음해 가을이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1942년 당시 열한 살로 어머니를 도와 가을 추수를 위해 봉오동 집에 들렀는데 국량오빠는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홍범도 아주바니가 혼자서 마루에 앉아서 옷을 꿰매고 있었다는 것이다. 

늙고 이빨이 빠진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경주가 반갑게 인사하며 “아주바니,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여기 어쩐 일이시냐?”고 묻자 “너희 아버지가 없으니 이제 내가 여기 있어야지... 여기가 내 집이야”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경주는 조밥과 감자를 넣은 된장찌개를 끓여서 밥을 차려드렸다. 홍범도 장군은 맛있게 드셨고 경주는 저녁이 되어 도문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경주 당고모는 이후 홍범도 장군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크질오르다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홍범도 장군이 다녀간 그 다음해인 1943년에 봉오동에 큰 홍수가 나서 봉오동 집이 다 무너지고 토성도 허물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2016년에 경주 당고모를 만나 처음 들은 것으로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내 말을 전해들은 역사학자들은 노년의 노인이 중앙아시아에서 봉오동까지 먼 길을 오갔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 당고모가 다른 사람을 홍범도 장군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내가 하와이로 전화해 다시 확인을 요구하자 경주고모는 “내가 열두 살이나 먹었을 때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어릴 때 아버지랑 같이 만나서 그분 무릎에서 재롱떨던 내가 어떻게 홍범도 아주바니를 모르겠냐!”고 했다.

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탓에 최진동 장군은 어린 경주와 동행해 마치 첩보작전을 하듯이 여기저기 다니셨다고 한다. 중국 관청에 드나들고 중국 상인을 만나러 가는 척하면서 몰래 동지들을 만났다. 어떤 때는 감시가 따라붙지 않는 어린 경주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직접 군자금을 전달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어린애였지만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잘 알아들었던 똑똑하고 야무진 딸이었다. 경주 당고모는 아버지가 자신을 신뢰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안무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우리 형제들과 뜻이 잘 맞았다."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안무 장군이 당신의 심부름으로 독립군의 유족들에게 생활비 전달하러 갔다가 달라재에서 총을 맞고 순국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도 흘리셨다.”고 했다. 

 

'자유시참변'의 고통을 가슴에 품고 수감생활을 견뎌내고 봉오동으로 돌아온 최진동 장군 형제들은 북만주를 넘나들며 제2의 봉오동을 건설하는 일에 진력했다. 그러나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당시는 이미 만주가 일본의 지휘 하에 있던 시기여서 모든 활동을 비밀리에 해야 했다. 당시에는 대황구(대흥구?), 3만 정보 면적의 임야에 독립군부대를 재창설하고 500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숨어서 지냈다. 농사꾼으로 위장한 독립군들은 낮에는 군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아편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한 것이다.

‘자유시참변’으로 대부분의 동지들을 잃었고 대규모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고 재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했던 최운산 장군 휘하의 병사들은 참변을 피해 살아남았고 이후 새로운 부대 재구성에 주축이 되었다. 살아남은 <대한군무도독부> 출신의 독립군들은 여전히 강했다. 1933년의 대전자령 전투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에 승리를 이끌었고 크고 작은 전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얼마 전 만주의 항일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조사하다가 독립군이었다가 일본에 투항한 귀순자들의 명단이 정리된 사료를 살펴본 적이 있다. 1919년 3.1운동 후 만주 독립군의 숫자도 급격하게 늘었다. 임시정부가 출범하고 봉오동·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한 전쟁에서 승리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확신했던 열정적인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만주 독립군의 주축 세력이 연해주로 이전해 '자유시참변'을 당하고 '간도참변' 등 험난한 시기를 지나게 되자 과거 독립군 부대에 속했던 사람들 중에서 일본에 투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귀순자 명단에는 그들이 속해 있던 원 부대명이 같이 적혀 있었는데 국민회군,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등등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여러 부대 출신의 귀순자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책으로 정리해 묶을 만큼 숫자가 많았다 당시 독립군 부대 중 숫자가 제일 많았던 부대는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였다. 그러나 대한군무도독부 출신의 귀순자는 전체에서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오래도록 동고동락한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군은 그만큼 군율이 엄격하고 잘 훈련된 정예부대원들이었다.

최운산 장군의 막내딸 계순은 어릴 때 아버지 최운산 장군이 동지들이 있는 늘 森林삼림에 가셨고, 외부활동을 많이 하셨던 탓에 집에 거의 집에 계시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사촌인 경주 당고모도 어릴 때 아버지 최진동 장군도 동지들이 있는 삼림에 다녀오시곤 했다고 한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최운산 장군이 더 자주, 그리고 오래 집을 비우셨고 몰래 변장을 하고 다니며 밤에 몰래 들려가시곤 했다는 것이다. 경주 당고모는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한 추억이 많았는데 한 살 아래인 계순 고모는 아버지와 살갑게 놀았던 추억이 거의 없다고 했다. 

당시 항상 일본의 감시에 시달리던 최진동 장군은 그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어린 딸을 앞세우고 중요한 볼일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경주는 '때가 되면 두만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총독부를 칠 것'이라는 최진동 장군의 생각을 듣곤 했다. 어린 딸에게 들려주었던 국내진격전에 대한 다짐은 당시 최진동 장군에 대한 일본의 감시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기였고, 운산과 치흥 형제들이 대규모 병력이 삼림 속에 숨어서 훈련을 계속 하는 이유였다. 경주 당고모는 최진동 장군이 “도독부군은 조직망이 철저한 용사들이다. 도독부군은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실한 애국 동지들이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오랜 기간 훈련 양성된 정예부대원인 대한군무도독부군이 남아있었기에 1930년대 이후에도 우리 독립군들이 주도적으로 여러 전투에 참전할 수 있었다.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가 규모도 크고 대단한 성과를 가져왔지만 그 두 전투가 만주 독립전쟁의 전부는 아니다. 최운산장군의 아들인 아버지가 1960년대에 국가에 제출한 최운산 장군의 서훈신청서에 정리한 할아버지의 중요한 활동 중 전투경력으로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우수리강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전한 것을 적시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 독립군의 활동은 아직 역사적으로 조명되지 못한 부분이 많다. 대규모 승전으로 평가하는 1933년의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한 사실조차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가족의 증언을 넘어서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최운산과 최진동 형제는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독립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한 탓인지 최진동 장군은 글을 배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말에 능통했고 중국군에 들어가는 등 일찍이 중국인들과 깊이 교류한 탓에 글을 모르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실질적 부대 운영과 모든 관리를 도맡았던 최운산 장군이 형님을 완벽하게 보필했다. 독립군부대를 창설하고 생사를 넘는 전투를 이끌면서 최운산 장군은 언제나 형님인 최진동 장군을 절대적으로 앞세우고 뒤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했다. 1924년 동생이 최운산이 일본에 붙잡혀 투옥되자 형 최진동도 거짓 정보에 속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장성한 뒤에도 두 형제는 그렇게 오랜 세월 한 집에 살면서 모든 일을 함께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재혼을 한 최진동 장군이 봉오동 생활을 정리하고 하고 도문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니 두 형제의 생활방식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만주 무장독립군을 대표하는 최진동 장군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회유는 상상을 초월했다. 재혼한 부인의 가족까지 동원해 회유작전을 폈고 그들을 협박하기도 했다. 옆집을 사들여 3층 건물을 지어 요정으로 운영했다. 3층에서 내려다보면 최 장군 집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었다. 자연히 동지들과 연락도 어려워졌고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일제는 최진동 장군에게 재산을 헌납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회유나 협박에 굴하지 않자 최진동 장군을 잡아가 문초하고 고문하기도 했다. 어린 부인을 괴롭히고 그 가족을 앞세워 회유작전을 치밀하게 전개했다. 최진동 장군이 수레에 실려 나오는 일이 반복되자 젊은 부인 최순희는 이러다 남편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남편 대신 일제에 헌금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최진동이 100원의 국방헌금을 낸 것으로 크게 선전하였고 신문에도 실었다. 

비록 남편 몰래 부인이 저지른 일이고 금액이 크지 않았다고 해도 그 일은 여느 부호가 일제에 헌금한 일과는 의미가 달랐다. 무장독립군을 지휘한 지도자로 모두에게 알려진 중요 인사가 결국에 친일로 돌아섰다고 선전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 오랜 세월 목숨을 걸고 일생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독립투사의 일생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아내의 손에 의해... 후일 최진동 장군이 친일파라는 오명에 시달리게 만드는 단초를 가족이 제공한 것이다. 최진동 장군도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내셨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계속되는 압박과 감시 속에서 힘들게 지내던 최진동 장군이 갑자기 찾아온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1941년 11월 25일, 58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만다. 동지들 만나러 갔다 돌아온 뒤 발병한 병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악화된 것이었다. 최진동 장군은 한 달쯤 앓다 돌아가셨다. 경주 당고모는 당신의 죽음을 예감한 아버지가 해방이 몇 년 남았다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우리나라의 해방이 몇 년 남지 않았는데 그것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고 하셨다고 한다.

최진동 장군이 사망하자 만장이 수없이 도착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일본군은 아무도 문상하러 오지 못하게 막고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있던 최진동 장군은 겉으로는 일본군의 주도 아래 화려했으나 동지들이 없는 쓸쓸한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만장을 앞세웠으나 일본군을 태운 트럭들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가족들에게도 늘 낭비하는 것이 없도록 엄격했고 친척이라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지원해주지 않았던, 마치 구두쇠처럼 보여 원망을 샀을 만큼 철저했던 최진동 장군이었다. 경주 당고모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일생을 검소하게 사셨던 아버지가 남기신 유품은 동복과 춘추복 각 한 벌과 코트와 턱시도 한 벌, 그리고 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다고 했다. 젊은 부인은 살아생전 지나치게 검소한 삶을 살았던 최진동 장군이 안타까워 모본단 두 필을 사서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 깔았다고 한다. 장례식을 빙자해 독립군이 모일까 사방에서 감시하는 일본군의 행렬과 만장의 행렬은 후일 일제가 최진동 장군에게 호화장례식을 해주었다는 평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무장 독립운동의 기를 꺾기 위해 봉오동의 주봉인 초모정자산 정상에도 쇠말뚝을 박았던 일본군은 최진동 장군의 혼백이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관 두껑을 쇠로 만들어 덮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명당터인 봉오동 선산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서 봉오동 입구의 최운산 장군 소유지 수남촌의 들판에 묘를 쓸 수밖에 없었다. 땅이 모두 얼어붙은 한 겨울이었다. 삽이 들어가지 않아 불을 피우고 땅을 녹여가면서 구덩이를 파고 묘를 만들었다. 일생 고락을 함께 나눈 동지요 피붙이인 형님을 쇠로 된 관 뚜껑을 씌운 채 보낼 수 없었던 최운산 장군은 그날 밤 조카 국량과 함께 몰래 묘를 다시 파고 나무로 관 뚜껑을 바꿔 덮었다. 한밤중에 일본군 몰래 묘를 다시 파야 했던 최운산 장군과 아들 국량의 마음이 어땠을까!

최진동 장군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되었고,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봉오동에 있던 최진동 장군의 유해는 2006년 한국의 국립현충원으로 이전되어 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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