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에서 태어나 조선 3대 의병장 중의 한 분으로 추앙받은 대를 이은 의병장이시다.

진주 장렬사에 배향된 김준<金俊> 의병장

김준 장군은 선조 때 일어난 임진왜란 때의 의병 대장으로 진주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여섯 장수중의 한분이다.

공의 다른 이름은 준민<俊民>이며, 호는 절암<節庵>이다.

▲ 진주성

고려 때 도총관을 지낸 김경신의 후손이며, 그의 조상 중에 보성 땅에 처음 들어오신 선조인 사간원 정언과 홍문과 수찬을 지낸 ‘초’의 4대손이며, 내자사 ‘홍서’의 둘째 아드님으로 명종 11년<1556년>에 조성면 대동부락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선대에서도 삼남대의병장이시고, 선무원종공신인 순제<純齊> 김홍업의 조카이시니 집안 대대로 의병장을 지내신 충신 집안이다.

공은 선조 1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재신과 함께 당시 두만강 접경 지역을 괴롭히던 북쪽 오랑케인 호적 대장 ‘니탕개’를 경원에서 정벌하였다.

선조 25년 임진란에는 거제현령으로 있었으나, 관군이 패전하자 의병장으로 나서서 무계현에서 왜장 모리휘원<毛利輝元> 부대를 격멸 하였다.

▲ 임진왜란 왜준 전투 진행로<구글이미지>

이듬해 6월 20일에는 창의사 김천일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6만 군사와 함께 진주성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사천현감의 자격으로 동문을 책임지고 진주성을 포위하고 있는 왜군 10만 명을 상대로 싸웠다. 밤낮 8일간의 피투성이의 전쟁을 벌이다 보니 9일째 되는 6월 29일에는 더 이상 싸울 무기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에 장군은 죽창<대나무를 깎아 창 모양을 뾰족하게 만든 것>을 들고 말을 달리면서 온 종일 악전고투를 하였으나, 김천일, 최경회, 고순후, 황진, 장윤, 이종인 등과 함께 죽는 순간까지 온몸을 바쳐 싸웠으나 끝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 때 진주성에서 함께 목숨을 바치신 최경회 장군이 촉석루에서 김천일, 고순후와 함께 나라를 위해 최후의 순국할 것을 맹세하면서 읊은 서사시<誓死詩 죽음을 맹세하는 시>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矗石樓中三人壯士 - 촉석루에서 세 장사는

一盃笑指長江水 - 잔 들어 장강을 가르킨다.

長江之水流滔滔 - 장강 물 구비쳐 흐르니,

波水渴皆魂不死 - 저 물 다 말라도 우리의 넋은 죽지 않으리

맹세를 한 세 장수는 나라를 위해 진주성에 몸을 바치고 말았으니, 오늘도 조용히 흐르는 남강물은 그 분들의 큰 뜻을 알고나 있을까?

이러한 공을 높이 받들어서 조정에서는 가선대부형조판서<법무부장관> 겸 지의금부사를 추증<돌아가신 분께 공을 높이 받들어서 벼슬을 내림>하였으며, 선무원종훈에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록권<공신의 훈공(勳功)을 새긴, 쇠로 만든 패>을 하사하였다. 현제 진주 장렬사에 동지장사 31분과 함께 모셔져 있으며 매년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를 올린다. 조성면 덕산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 참고 : 湖南節義錄.山陽三綱傳, 全南道誌, 寶城郡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

* 글 출처 : 전자책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저자 김선태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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