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선수의 <유라시아 대륙횡단 평화마라톤> 지원을 위한 첫 상면식에서 누군가 나에게 “시민운동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 어떤 계기가 있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물었을까? 칭찬의 의미(그런 듯 보였다)라면 그냥 "시민운동을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라고 묻는 게 상식일 것 같은데, 마치 내게 그런 '계기'가 있었다는 걸 알고 물어보는 듯하다. 사실 내가 시민운동에 오랜 세월 투신하고 있는 데는 계기가 있다.

그것은 아직도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우리 국군의 군사작전권에 관련된 쓰디쓴 경험이다. 우리나라가 전시군사작전권을 아직도 미국에 헌납해놓고 되찾아오지 않고 있는걸 보면 수시로 부글부글 가라앉지 않고 떠오르는 불쾌한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그리 오랜 세월 시민운동에 투신케 한 동력이었다.

그러잖아도 요즘 남북 시대상황과 맞물려 그 옛날의 에피소드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누군가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다니, 기이한 우연의 일치라 할까.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벌써 33년이나 전의 일이다. 모 연구소에 다니던 나는 전두환의 구역질나는 저질 폭정에 심신이 망가져가고 있었고 그래서 계획하던 유학을 앞당겨 감행했다.

위궤양으로 공부하기 힘들 거고 미국에선 수술도 어려울 거라며 수술하고 가길 권한 의사의 말도 뒤로하고 혹성탈출처럼 서둘러 비행기에 올랐다. 3개월분의 위궤양 약 포대(?)와 함께.

그렇게 해서 밟은 땅이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베이브릿지를 건너 버클리로 가는 길에 펼쳐진 경관은 신천지처럼 장엄했고, 자유라는 공기가 독재에 시달려 쪼그라든 내 심장 안으로 터질듯 밀려들어왔다. 아, 그때 나는 분명 차 안에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었을 것이다.

후에 나온 영화 ‘쇼섕크 탈출’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자유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때 나의 모습을 그린 건 아닐까?

그곳은 길가에 서있는 나무도 자유롭고 평화로운 듯 했다. 미국 히피의 본산이라는,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그곳에서, 독재와 최루가스 성분이 제로인 공기를 마시며,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치유였다. 나를 그토록 괴롭히던 위궤양은 한 학기 끝날 때쯤 헐렁해진 바지와 함께 깨끗이 사라졌다.

그곳에서의 첫 숙소는 I-House (International House)라는 기숙사로, 입주자는 미국인 학생 50%, 세계 각국에서 모인 이방인 학생 50%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신이 났었다. 공부하는 게 힘들어 졸면서 다닐망정 그렇게 다양한 인종들과 한 건물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대화하고 생활하는 게 너무 좋았다.

그러다 만난 대만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그곳으로 온 새내기 유학생이었다. 그는 원자핵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는데, 잘 웃고, 사근사근 붙임성도 좋아 금방 친해졌다.

그런데 당시 미국이 중국(중공)과 수교한다며, 오랜 수교국이었던 대만과 단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대만보다도 그 친구가 더 걱정됐다. 그래서 기숙사에서 그 친구를 보자마자 "너희 미국과 국교가 끊어져서 어떻게 하냐? 큰일 났겠구나" 하고 걱정스레 물었다.

그랬더니 곧바로 돌아오는 말이 "아무 상관없어. 우리는 독립국이야. 너희는 군사작전권을 미국이 갖고 있지? 우리는 독립국이야"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우리는 독립국이야(We are independent!)"라는 말을 힘주어 두 번 반복했다. 그의 갑작스런 표현에 나는 놀랐고 할 말을 잃었다. 그건 조롱이었고, 모욕이었다. 내 질문 취지에 딱 맞는 답도 아니었다.

단지 평소에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란 생각을 품고 있다가, 그런 질문을 받자 그의 속내가 튀어나온 것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그와의 대화를 정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어색하게 있다가 헤어진 것 같다. 그 뒤로 우리는 만나도 그저 Hi~ 하며 지나칠 뿐이었다.

나는 그 친구의 마지막 ‘우리는 독립국’ 이라고 얘기를 할 때의 그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너는 미국의 속국 국민이니 그런 게 벌벌 떨 일이겠지만, 난 (우리 대만은) 아니야, 이 멍청한 친구야!’ 머쓱해하면서도 경멸이 살짝 보이던 그 표정을.

그 친구의 그 짧은 대답은 나에겐 엄청난 깨우침이었다. 뒤돌아보건대 나의 의식이 그렇게 크게 화들짝 깼던 건 아마 그 때가 처음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군사작전권이 미국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나에게 그리 큰 문제로 다가왔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대만친구는 남의 나라(한국) 군사작전권이 미국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자기 나라가 비록 작아도 미국의 속국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국교가 단절되는 순간에도 당당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 대만의 동년배 친구보다 훨씬 의식이 뒤져있는 학생이었다.

나는 부끄럽고 또 부끄럽고, 그리고 또 부끄러웠다. 지금 30여 년이 지나 그에 대한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또 부끄럽다. 그 뒤로 나는 공학을 하면서도 다른 분야, 특히 민족, 남북관계, 대미관계, 통일 등 사회의 여러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것은 나의 사회참여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귀국 후 다음해인 1992년 5월 미국 LA 흑인폭동 당시, LA 경찰당국이 흑인폭도들을 의도적으로 한인타운으로 돌려 우리 동포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보게 만들었을 때 분노해서 미국 대사관 앞에서 1인 피켓시위를 벌일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각성 때문이었다. 그때는 아직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의 끄트머리로 사회 분위기는 아직 얼어붙어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 뒤 얼마 안 있어 시민사회(친일청산) 운동에 투신했고, 그 후 대전의 대덕연구단지로 내려온 후에도 안티조선운동, 통일운동 등, 시민운동 중에서도 주로 최전방(?)에서 칼바람 맞는 운동을 4반세기나 하는 중이다.

대덕연구단지의 만여 명의 이공학자들 중 나같이 희한한 짓(?)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만일 젊은 시절 그런 쓴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저 많은 공학자의 한사람으로 내 분야 지키며 살아갔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젊은 시절 부끄러운 조국의 일면으로 인해 당한 개인적 수모를 그렇게 풀어내며 나의 의식결핍을 그렇게 속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내 안에 아주 오래 웅크리고 있던 그런 계기가 그 사람에게는 보였단 말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이 나라의 군사작전권이 미국에 있음으로 인한 해프닝이 해외 거주하던 국민의 한사람에게 벌어진지 이제 30년이 넘었건만, 이 나라는 아직도 언제 전시군사작전권을 돌려받을지 모른다. 부끄럽고 또 울화가 치미는 일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국민)들에게는 그게 정말 별 일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수십 년이 지나도 나라의 핵심주권인 군사주권을 되찾을 생각을 안 한단 말인가? 아니, 돌려준다고 갖고 가라고해도 ‘아니다. 제발 도로 가져가 달라’고, 그것도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많은 국회의원들이, 심지어 별을 달았던 많은 장성들까지 나서서 통사정을 해대니 이 나라가 제 정신 박힌 나라인가?

▲ 사진출처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02809.html

도대체 몸뚱이도 작지 않게 성장한 이 나라, OECD 가입국이고, G20국이라며, 선진국이라도 된 양 매일같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니 뭐니 하고 떠들면서, 전 국민이 나라를 목숨 걸고 지켜낼 생각은 않고 남의 나라에 군사주권을 맡기고도 부끄럽지 않은가? 속국의 삶, 굴종의 삶이 DNA가 됐는가? 정신이 벌레 먹었는가?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요즘 그 대만친구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는 그동안 만나온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며 살아왔을까? 그는 나에게 의식을 깨워준 은인인가, 아니면 나의 의식을 깨워서 나락(?)으로 빠뜨린 사탄인가?

그리고 미국에 있는 나의 두 아들이 아비가 30여 년 전에 겪은 그런 수모를 또 누군가로부터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생각이 미치니 미안하기 짝이 없고, 못난 유산을 자식세대에게 물려준 내가 다시 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도대체 이 나라는 허우대 멀쩡한 정신박약 속국에서 언제쯤 벗어날 것인가?

▲ 2006년 8월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기자회견(사진출처 : 통일뉴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이동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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