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에서 증조부 최우삼의 산소를 찾은 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2015년 첫 방문에서 고향인 봉오동을 지키고 살던 초면의 고종 6촌 오빠(최진동 장군의 외손자 김금철)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20년 전인 1997년, 봉오동을 떠난 지 53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찾았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봉오동에 사는 후손들도 모르고 지냈던 증조부 묘의 위치를 알려주셨고 곧 비석을 세우러 다시 오겠다고 조카부부와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셨고 신부전증이 심해져 2년여 투석치료 끝에 2001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연변 道台로 봉직하면서 조선말기 간도 주민들을 돌보던 증조부 최우삼의 삶을 존경하고 기리고자 하셨다. 당시 연변은 조선 땅이었고 조선인의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태 최우삼은 한족을 연변으로 이주시키는 청나라의 간도정책에 맞서 연변지역에서 한족(중국인)을 모두 쫓아내는 등 강하게 저항하며 청나라군과 무력충돌 하셨다. 당시 도태 최우삼의 저항을 “道台의 亂”이라고 불렀다. 힘의 열세로 증조부 최우삼은 청군과의 전투에 패하셨다. 최진동 최운산 형제들이 어린 시절을 고생스럽게 지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분 할아버지는 그 경제적 어려움을 견뎌내며 자력으로 간도 제1의 거부가 되어 무장독립전쟁의 기틀을 닦으셨고 평생 독립투사의 길을 걸었다.

손자인 아버지는 조부 최우삼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언제나 잊지 않으셨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삶도 훌륭했지만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런 아들들의 뒤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셨던 연변 도태 최우삼의 영웅적 삶에 대해서도 증손인 우리들이 잘 이해하기를 바라셨다. 아버지는 연변 도태였던 증조부 최우삼이 청나라를 상대로 일으킨 “도태의 난”은 조선 말기 나라의 힘이 쇠락해지고 국경이 축소되어 가던 때 고토 회복의 염을 담은 民族的 굴기(倔起)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시곤 했다.

▲ 처음 발견 당시의 모습

봉오동에서 증조부의 묘를 찾은 우리 5남매는 연변 道台 최우삼의 묘소에 비석을 세워드리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리기로 마음을 모았다. 증조부가 돌아가신 1925년 당시는 북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던 최진동 최운산이 모두 잡혀가 몇 년씩 투옥되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전쟁을 치르던 중이라 일부러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증조부의 묘소 뒤에 세 그루의 흑송(검은 소나무)을 심었다. 아버지는 그 산에는 소나무가 별로 없는 산인데 증조부 최우삼의 묘소에만 일부러 흑송을 심어 표식이가 되게 했다고 하셨다. 그 흑송이 백년 가까이 자라 우리 앞에 그 모습을 우뚝 드러냈을 때, 일제시대와 공산화된 중국의 문화혁명기를 거치며 이산의 아픔을 처절하게 겪어야 했던 우리 집안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의 감동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 증조부 최우삼의 묘와 흑송 세그루

비석을 세우기로 결정하기는 쉬웠으나 중국 땅에 증조부 崔友三의 비석을 세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연변의 비석공장은대부분이 중국인이 운영하고 있어서 한국식 비석을 만들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대한민국의 첫 시기를 사셨던 증조부 묘소에 구름 문양의 중국식 비석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러 방법을 찾아보다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한국에서 원하는 모양의 비석을 만들어 중국으로 운반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먼저 비문을 만들었다. 원로 언론인 박래부 선생님이 초안을 잡아주시고 역사학자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연변 도태 최우삼의 비문을 완성했다.

비문을 한국의 석재공장에 보내 비석을 주문하고 운반방법을 확인하던 중 한글이 새겨진 돌은 중국 통관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법을 바꿔야 했다. 조선식 갓비석의 설계도면을 가지고 다시 연변을 찾았다. 연길과 도문 주변의 여러 석재공장들을 돌아다니다 며칠 만에 사진과 설계도면을 보고 비석을 만들 수 있겠다는 곳을 발견했다. 봉오동에서 가까운 도문이라 더 반가웠다. 한국에 돌아와 한글을 모르는 중국인 석공을 위해 비석에 고무판을 대고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를 새길 수 있도록 실제 비석과 같은 크기의 고무판에 비문을 파서 중국으로 보냈다.

매번 현지에 갈 수 없어 몇 달 간 전화와 이메일, SNS로 작업을 진행한 탓인지 단 한 순간도 쉽게 넘어가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확인해보니 큰소리치던 도문의 석공이 조선식 비석 제작이 어려워 목단강 근처의 석재공장에 재의뢰 했고, 고무판까지 만들어서 보냈던 한글 비문도 자신이 없다고 했다. 제막식을 일정을 잡은 후라 급하게 유능한 석공을 도문으로 초빙해 작업을 맡겼다. 며칠간 비문을 새긴 후에 우리가 도착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함께 했다. 정말 매순간 긴장하면서 힘들게 비석을 완성할 수 있었다.

어렵게 비석이 완성하고 나니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석이 무거워 산으로 옮기기 힘드니 크레인으로 운반 작업을 해야 하는데 크레인이 올라가기엔 산길이 너무 좁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석을 다 만들어 놓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계획에 없었던 일이지만 결국 산길을 넓혔다. 봉오동 라철룡 수남촌장의 도움이 컸다. 길을 내고 제막식을 준비하는 사이에 비가 와서 땅을 말리느라 또 사흘을 더 지체해야 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비석을 세우기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의 비용이 들었다.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비석을 세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많았다. 매번 최선을 다했고 기도하고 기다렸다.

간도에서 조선인들의 안위와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던 증조부 최우삼의 묘소에 중국식 비석을 세워드릴 수 없다고 판단한 때부터 단 한 순간도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치며 한길을 걸으셨던 할아버지 최운산장군의 삶을 생각했고 증조부 최우삼의 애국적 삶을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고자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되고자 했다. 준비부터 제막식까지 꼬박 1년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우리 형제들의 마음을 보시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다. 매순간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해결책이 나타났다. 정말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2016년 10월 9일에 봉오동 증조부 최우삼 묘소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제막식에는 큰아들인 최진동 장군의 외손자 부부와 둘째 최운산 장군의 손자인 우리 5남매, 그리고 연길에 살고 있던 셋째 최치흥의 손자들까지, 봉오동과 한국, 연길에 살고 있는 6촌 형제들이 함께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윤경로 이사장님과 신주백 교수를 비롯한 역사학자 몇 분이 동행했다. 연변역사학회장인 김춘선 교수를 비롯한 연변의 역사학자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과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봉오동 수남촌의 라철룡 촌장과 마을의 간부들이 함께 했다.

▲ 연변 도태 최우삼의 비석
▲ 비문

 최우삼의 <비문>

국운이 쇠잔해 가던 조선 말기 이 땅에서, 선조들의 삶터와 국권을 회복하려는 높은 뜻을 품고 한 생애를 가열차게 살았으며, 그의 가문 또한 조국을 위해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헌신케 한 겨레의 선각자 崔友三 公 여기 잠들다.

公은 道台를 지냈고 貫籍은 珍山, 崔秀平公의 15대손으로 1860년 6월 22일 함경북도 온성에서 諱鎮榮의 二男으로 태어났고 字는 仁權이다. 1880년경 두만강을 건너 연길에 자리를 잡고 道台로 봉직하면서 조선 사람들의 안위를 살폈다. 公은 조청간의 분쟁이 생기자 조선인의 자주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분하게도 패퇴하여 옥고를 치렀다. 公은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일가 4대를 이끌고 봉오동으로 이주하여 독립군기지를 만들고 사관학교를 세워 애국청년을 양성하는 등 독립전쟁 준비에 힘을 쏟았다. 아들들이 연해주에서 독립군부대를 이끌 때에는 군자금을 조달했다. 公은 아들 振東, 雲山, 致興 등이 일본군에 맞서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하던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의 독립을 여망하며 숨을 거뒀다. 장례는 독립군이 도열하고 예포를 발사하는 가운데 독립군장으로 엄숙하게 치러졌고 여기 봉오동에 묻혔다.

▲ 절하는 우리 5남매

비문을 낭독하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절을 올렸다. 후손인 우리 5남매는 지나간 마음고생을 모두 하늘로 띄워 보내며 깊은 감사와 감동을 담아 증조부 묘소에 절을 올렸다. 최운산 장군의 맏손자인 큰오빠가 후손들을 대표해서 참석자들에게 감사말씀을 전했다.

▲ 한국과 중국의 증손자들

<감사 인사>

오늘 저희 증조부 최우삼의 비석 제막식에 함께 해주시기 위해 연변 각지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이곳 봉오동까지 찾아와주신 여러분께 저희 형제들과 6촌형제들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 형제들은 작년 7월 4일 선친의 기일에 모여 저희 집안의 역사가 곧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흐름이니 이것이 더 이상 방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년 9월 처음 방문한 봉오동에서 20년 전에 저희 선친께서 찾아놓으신 증조부 최우삼의 묘소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증조부님, 할아버님, 선친 세분 모두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과보고 때 말씀드린 것처럼 중국에서 한국식 비석을 세우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 1년여의 준비과정 동안 가장 고마운 분이 여기 계신 수남촌의 라철룡 촌장님과 연변대학교 김태국 교수님 이십니다. 이 두 분이 함께 해주셔서 한국에 있는 저희가 이곳에 증조부의 비석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라촌장님은 이곳에 비석을 다시 세우고 싶다는 저희의 소망을 실현시켜주시기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해주셨습니다.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저희 형제들을 대신해 봉오동을 지키고 발전시키고 계신 라촌장님과 김금철 형님 부부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이 자리는 돌아가신 선친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싶은 저희의 작은 소망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일이 봉오동의 역사와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사를 다시 살펴보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정말 기쁘고 감사한 입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인사하는 맏손자 최윤주

우리 형제들이 증조부의 비석을 세운 일은 효도가 아니라 후손인 우리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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