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 최우삼의 묘비 제막식을 마친 역사학자들과 우리 형제들은 수남촌 라철룡 촌장의 안내로 봉오동전투 현장 답사를 시작했다. 먼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봉오동을 둘러싼 여러 산자락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우리 5남매와 역사학자들이 함께 했다.

1970년대 말에 완공했다는 봉오저수지 입구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돌면 남봉오동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지나 산을 넘어가면 대한북로독군부의 후방 지원부대인 제4연대(연대장 오하묵)가 주둔했던 장골이 있다. 지금 장골에는 도문시에서 관리하는 식용개구리 양식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그 길을 따라가니 오래지 않아 북로군정서 주둔지였던 서대파가 나타났다. 

▲ 봉오동 저수지 정문

봉오동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알려진 서대파가 봉오동 계곡을 따라 산을 넘어가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서대파에서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멀지 않은 곳에 사관연성소 주둔지인 십리평이 있다. 십리평은 넓은 들판이 십리에 이르렀다는 뜻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규모 군사들이 훈련하며 머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는 것이 한 눈에 느껴지는 지역이었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봉오동에서 각 계곡을 따라 북로군정서와 사관연성소를 비롯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적당한 거리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 북로군정서 주둔지 서대파에서
▲ 서대파 버스 정류장

『무장독립운동사』의 저자 이강훈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써 재류동포의 생활과 기타 모든 면에서 잘 짜여 있었다. 가옥구조도 한국식이어서 마치 국내의 한 지방 같았다. 중국인 가옥이 몇 집 끼어 있어서 며칠 만에 한번씩 중국 관헌이 순라를 돌 뿐 독립군의 자유무대였다.”고 봉오동을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봉오동을 중심으로 장골로, 서대파로, 십리평으로 이어졌고 양수천자로 방향을 틀면 안산으로, 도문으로 연결이 되어 모두 같은 지역권으로 모두 최운산장군의 소유지였다. 

▲ 계곡을 따라 길이 있었다

각 요지마다 몇 백 명씩 배치되어 있는 독립군부대로 보내는 군량미 수레의 이동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청옥 큰고모는 “어린 시절 홍범도 김좌진 등 각 부대장들이 총본부인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만나고 갈 때마다 식량을 실은 수레가 수없이 뒤를 따라갔는데 그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서대파와 십리평을 답사한 후에 양수천자로 방향을 틀었다. 아버지가 서훈신청서에 최운산 장군이 소유지 중 하나로 밝히셨던 곳이다. 봉오동에서 얼마나 먼 곳인지, 한자로 凉水泉子양수천자라고 쓴 것이 낯설어 냉수천자라 읽으며 물이 맑은 곳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던, 오랫동안 궁금했던 곳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지역 凉水泉子 주민회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지대가 높아 전쟁에서 유리한 지역이었을 안산으로 올라가니 도문시가 눈 아래에 있었다.

▲ 양수천자 정부청사 앞에서 기념촬영하는 후손들

이곳저곳 독립군 주둔지를 돌아보았다.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탓에 대규모 독립군들이 주둔했었다는 흔적이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옛 지명으로만 남아있는 장골에, 그리고 서대파와 십리평에 서보니 역사의 현장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훈련을 하고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첩보를 기다리는 그때의 긴박했던 하루하루가 우리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운산장군의 집에서 길렀다는 연락병으로 조련된 300마리 비둘기가 다리에 쪽지를 매달고 이곳으로도 날아와 본부의 명령을 전달했을 것이다.

▲ 벌판이 넓어서 십리평이라 불렸던 곳으로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가 있었다.

봉오동전투 당시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와 봉오동 계곡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런데 봉오동은 입구의 마을인 수남촌으로부터 10km 가량 안으로 들어가야 본진이 매복해 있던 산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군은 봉오동을 둘러싼 고려령을 넘어 옆구리로 치고 봉오동 안으로 들어왔다. 새벽에 강을 건너고 산을 넘었으니 나름대로 작전을 세운 공격이었다. 일본군의 움직임과 독립군의 대응을 상상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보니 차를 타고 이동했는데도 가을이라 오후 4시면 해가 기울어지는 동북의 특성상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마을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닫혀있는 길을 열고 산으로 들어간다. 이 길을 따라 10km정도 들어가면 본부가 있었던 상촌이 있다.

다음날 우리 5남매와 역사학자들은 라철룡 촌장의 안내로 아침 일찍 봉오동전투의 현장인 산으로 올랐다. 물 맑은 봉오동 계곡에 댐이 세워진 1970년대 후반 이후 수자원 보호구역이 된 곳이었다. 도문시는 봉오동 산길에 커다란 문을 만들어 닫아놓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어렵게 허락을 받은 라촌장이 가져온 열쇠로 문에 걸린 사슬을 풀어내는데 마치 비밀의 장원을 들어가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신비감을 느끼며 문을 열고 조심스레 산길을 따라 들어가니 봉오동전투 전부터 원래 있던 마을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차를 타고 댐 입구에서 10km정도 안으로 들어가니 높고 낮은 여러 개의 산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같은 지역이 나타났다.

▲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비옥했다는 넓은 논밭이 있던 곳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축구장 서너 개 넓이의 독립군이 훈련했던 연병장이라 여겨지는 넓은 평지도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평화로운 곳, 깊은 가을의 향취가 백 년 전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이라기보다 고향마을의 뒷산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다 아궁이 흔적, 굴뚝의 잔해 등을 발견했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연자맷돌을 발견했다. 지름이 1.5m가 넘어 보이는, 말이나 소가 끌었던 것이 분명한 맷돌이었다. 대군단의 살림을 책임졌던 할머니는 이 대형 맷돌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고 된장, 고추장을 담아 독립군 병사들의 식사를 준비하셨을 것이다.

▲ 아직도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아궁이

대규모 살림을 했다는 증거로 남아있는 커다란 맷돌을 보니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또 다른 맷돌에 관한 일화가 떠올랐다. 한일합방 이후 독립군이 되겠다고 간도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만주 각지에서도 젊은이들이 봉오동으로 모여들었다. 1912년부터 대규모 사병부대를 운영하셨던 최운산 장군은 독립군을 자원하는 애국청년들이 계속해서 늘어나자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 봉오동 산의 나무를 벌목하고 산중턱을 개간했다. 몇 백 명의 독립군 병사들이 함께 훈련할 수 있는 넓은 연병장을 만들었고 대규모 막사 3개동을 건축했다. 그리고 독립군 기지의 본부인 저택 주위에 거대한 성을 쌓았다. 1915년의 일이었다.

▲ 할머니 김성녀 여사가 쓰셨던 대형 맷돌

할아버지가 쌓은 토성은 흙과 짚을 이겨서 쌓고 그 위를 말이 맷돌을 끌며 단단하게 다져서 강도가 높아 웬만한 총포에도 끄떡없었다. 토성의 네 귀퉁이에 포대를 쌓고 대포를 두었다. 높은 성벽은 폭이 넓어서 그 위를 말을 타고 걸어 다니며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밤에 성문이 잠기면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이 되는 곳이었다. 대한군무도독부의 본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밀정들이 알아내기 어려웠다. 그렇게 차근차근 전쟁준비를 해 나갔다. 1920년의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우리 독립군의 오랜 기간에 걸친 치밀한 노력의 대가였다. 100년이 더 지나고 봉오동 마을 터에서 발견한 이 커다란 맷돌이 할머니가 콩을 갈아 메주를 쓰고 두부를 만들었던 맷돌이라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 참호
▲ 검은색 부분이 참호다.

일본군의 진군 행로를 더듬어 보다가 길이 없는 가파른 산으로 올라 전투 당시에 파놓았던 참호를 여러 개 발견했다. 산의 능선을 따라 길고 짧은, 크기가 각각인 참호가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봉오동전투 후 백년이 되도록 방치되어 있던 참호는 그 세월만큼 쌓인 낙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낙엽이 삭아서 검은 흙처럼 변한 참호에 조심스레 발을 담그니 발아래가 푹신푹신 했다. 기관총과 장총으로 무장한 우리 독립군들이 총사령관인 최진동장군의 사격 개시 명령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산길을 따라 들어가는 일본군을 주시하고 있었을 그 자리에 서자 1920년 6월 7일, 역사의 그날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 참호에 서서 독립군이 되어본다.

그날 참호에 몸을 숨기고 사격을 했던 우리 독립군들은, 이날의 승리로 고무되었던 많은 독립군 병사들은 그날의 승리 이후 연해주에서, 자유시에서, 북만주의 또 다른 전투현장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산화했을 것이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감사의 묵념을 올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예전에 참호 주변에는 독립군들이 봉오동전투 당시 사용했던 탄피가 많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수남촌 마을의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산으로 올라 참호 주변에서 탄피를 배낭 가득 주워갔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이 가져온 탄비를 학용품이나 과자로 바꿔주고 탄피들은 모아서 고철로 팔았다고 한다. 그렇게 부지런했던 마을 아이들 덕분에 지금은 탄피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다행히 수남촌장은 오래전에 발견한 수류탄이나 철모, 총신, 약간의 탄피 몇 개를 보관하고 있었다.

▲ 이름 없는 무덤

산을 내려오다 커다란 무덤을 발견했다. 임시로 만든 것이 분명한 주인 없는 무덤이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산속에 버려져 있는 이 커다란 무덤에 누가 묻혔을까... 나는 문득 봉오동전투에서 전사한 우리 독립군들의 주검을 함께 모신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사망한 독립군의 숫자가 적었다고 했지만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봉오동전투에서 아군의 전사자가 수십 명이라고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두만강을 건너온 젊은 영혼들을 위해 제대로 된 진혼곡을 쓸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언젠가 봉오동전투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될 때 이름 없는 그들도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살펴본 봉오동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였다. 종합운동장 서너 개 넓이의 햇볕이 잘 드는 넓은 땅을 여러 개의 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본부가 주둔했던 마을을 둘러보며 봉오동전투의 규모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산 위에 매복한 독립군들이 봉오동 계곡에 일본군을 몰아넣었다고 설명하고 있어 비좁은 계곡에서 집중적으로 전투가 있었다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주 넓고 비옥한 땅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지역이었다. 산을 따라 모든 계곡에 물길이 있는 비옥한 땅, 살기 좋은 마을이 있던 곳이다.

저수지를 만들면서 마을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켰고 댐이 완공된 후에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던 수자원 보호구역이라 세월이 흘렀지만 봉오동전투의 현장은 오히려 훼손되지 않고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댐을 만들면서 산 아래 계곡에서 가까웠던 마을 하나가 물에 잠겼지만 산 위의 전투현장과 총본부인 할아버지의 저택이 있었던 상촌의 마을 터는 세월의 흔적을 품은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속에 수없이 등장하던 봉오동 마을이, 당신이 사셨던 집이,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가, 우리 집안의 역사가 세월을 품고 그곳에 그렇게 남아있었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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