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페르트 기조연설 ‘기술혁신 시대의 사회적 합의’

인공지능을 활용한 생산 자동화가 인간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4차 산업혁명'은 노동자에게 기대보다 걱정을 더 많이 준다. 오죽하면 4차 산업혁명의 ‘4’가 넉 四가 아니라 죽을 死자 '죽자 산업혁명'으로 보인다고 할까?

이런 4차 산업혁명에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걱정이 많다.

지난 15일 ‘2017 아시아미래포럼’ 기조연설자로 나선 리처드 프리먼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면 기계투자는 늘어나고, 노동자 임금은 하락할 것이다. 기계투자로 인한 로봇생산성 이익을 공유하지 않으면 4차 산업혁명은 불평등이 확대되고 새로운 경제 봉건주의로 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디언> 칼럼니스트인 폴리 토인비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소득불평등이 더 심각해질 것으로 우려되는 만큼 노조의 힘이 세져야 한다.”고 했다.

가이 스탠딩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공동대표도 “4차 산업혁명으로 자본가와 대기업의 소득은 크게 늘고 노동소득이 줄면서 소득분배가 더욱 불평등한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대안으로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샌드라 폴라스키 전 국제노동기구(ILO) 부총재도 비슷한 결과를 예측하며 노동권 보장과 사회보장, 조세정책 개선 등 기존 해법의 강화를 제시했다.

▲ 하르트무트 자이페르트 한스뵈클러재단 선임연구위원 기조연설 중

반면, 16일 ‘기술혁신 시대의 사회적 합의’란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 하르트무트 자이페르트 한스뵈클러재단 선임연구위원은 4차 산업혁명은 위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전에 위험요소를 줄이고 기회를 살리는 대비책이 마련된다면 노동위기는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독일은 수출의존형 제조업 강국이다.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5%다. 2008년, 2009년 금융위기가 왔을 때 제조업 생산에서 25%가 하락했다. 전후 최대 규모의 하락이었다. 하지만 고용주 협회와 노동조합은 합의를 통해 정리해고를 선택하지 않았다. 근무시간단축, 근로시간저축제, 탄력근로제 등을 택함으로 노동자는 고용을 보장받았고, 고용주는 경영위기를 안정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10년 전부터 제조업 디지털화가 진행되고 있다. 중소기업은 조금 뒤쳐지지만 서비스 분야는 이미 50% 이상 디지털화가 진행되었다. 독일 전체 기업의 50% 정도는 디지털화를 고려하고 있다.

2008년, 2009년 금융위기를 겪은 독일은 디지털화에 따른 고용위기를 선제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2012년부터 ‘산업 4.0’과 ‘노동 4.0’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2016년 말 연방노동부는 <노동 4.0 백서>를 발간했다.

<노동 4.0 백서>는 정부, 경영협회, 노동협회 등을 망라한 17개 고위급 단체가 모여 협의하고 합의한  백서로 다음의 중요한 6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새로운 고용유연성은 고용주가 원하는 고용유연성과 노동자의 고용 보장 간의 공정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노동시간을 선택적으로 운영해야한다. 셋째, 평생교육과 지속적인 직업교육 및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법으로 규정한 연금제도를 통해 자영업자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의 고용보험이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다섯째, 비교적 불안정한 고용환경에 있는 저학력 비숙련 청년들을 대상으로 창업, 휴직시 교육등이 제공되는 개인학습계좌가 실시되어야 한다. 여섯째, 노동자와 개별 기업의 협상과정을 강화해 일자리를 위한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고 노동자 권리를 보호해야한다.

이 6가지 큰 지향점에서 고용주 협회와 노동조합 간에 합의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개별정책이나 구체적 내용, 예를 들면, 근무시간, 클라우드 워크 규제, 고용유연성 확대, 교육비 부담 비율, 노동자의 경영 참여 등에서는 두 집단 간에 견해 차이가 있다.

<노동 4.0 백서>의 실현을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크다. 정부는 고용주와 노동자 간 견해 차이에 합의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하고, 모호하고 추상적인 원론은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되고 세분화하는데 주력해야한다. 고용주의 이해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독일은 디지털화에 따른 고용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실제 15일 기조연설을 한 세드리크 나이케 독일 지멘스그룹 부회장은 '산업 4.0'을 적용 시행한 후 다음과 같이 긍정적인 결론을 내놓았다.

“독일에서는 대량생산에서 개인맞춤 생산으로 변하면서 더 많은 로봇이 사용되고 있지만, 일자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로봇 때문에 인간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새로운 시대에는 노동자의 꾸준한 재숙련화와 훈련이 필요하다. 사회와 기업에겐 노동자들을 재교육할 책임이 있다”

하르트무트 자이페르트 선임연구위원은 지멘스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했다. 독일의 다른 기업 중 지멘스보다 잘하는 기업도 있고 못하는 기업도 있다고 했다.

17개 고위급 단체의 합의를 이끌어 낸 독일이 부럽다. 이 합의의 성공은 고용주가 얼마나 성실하게 합의를 지키느냐, 노동자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느냐 그리고 정부의 개입이 얼마나 공정한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노사정위원회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자본가의 힘은 막강하고 노동자의 힘은 너무나 약하다. 노조 가입률이 10년째 10%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 시장이 자본가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제까지 우리나라는 정부도, 언론도, 심지어 법원도 더 자본가의 입장에 섰다.

기륭전자의 경우를 보자. 기륭전자 회장은 2010년 국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일종의 사회적 합의였다. 하지만 회장은 7년 동안 이를 지키지 않고 버티다 올해 10월 실형선고를 받았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부당해고와 비정규직 차별에 맞서 싸운 지 12년 만의 결과다. 왜 그럴까? 정부가 나 몰라라 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노동자들이 막강한 자본과 협의하여 양자에게 공정한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의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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