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문화공간 온’과 <한겨레:온>에서 주최하고 (사)민족문제연구소 경기북부가 후원하는 탐방행사, 제2회 '잊혀진 항일독립투사를 찾아서'가 열렸다. ‘문화공간 온’ 조합원이면서 <한겨레:온> 주주통신원인 김재광 해설사가 진행한 경기 북부 연천. 포천지역 독립유적지를 찾아가는 행사에 초중학생을 포함하여 23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첫 방문지는 연천군 장남면에 있는 호로고루성이다.

▲ 호로고루성

연천에는 고구려 성이 3개 있다.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이다. 이중 호로고루성이 위치한 고랑포 지역은 한양으로 바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요지였다. 고구려는 이곳에 호로고루 성을 쌓았다. 호로고루성은 임진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삼각형 모양의 성으로 호리병같이 생겼다 해서 호로고루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남북으로는 강의 자연석벽이 둘러싸서 저절로 성벽이 되었고, 동쪽만 길이 90m, 높이 10m의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

▲ 호로고루성의 모습

고구려 시대에는 백제·신라 군사를 막는 요충지였으나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군이 패퇴할 때 호로고루성에서 방어진을 치고 최후까지 싸웠다. 후에 신라가 당나라군대와 결전을 벌일 때도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대한제국기,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한 정미의병 김수민 의병장도 1907년 고랑포를 공격하여 일제의 헌병분견소를 불태운 바 있으며, 1908년 2월에는 13도 창의군이 유격의병을 이끌고 고랑포를 공격한 일도 있다.

▲ 북한에서 보내줬다는 광개토대왕모조비
▲ 호로고루 홍보관에는 호로고루성에서 나온 유적들과 그 당시 활동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방문지는 연천군 백학면에 있는 두일리장터 3.1운동 독립만세시위지다

연천의 항일활동은 그 전통이 있었다.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1905-1910년 연천 출신이거나 전국에서 이름난 의병장들이 항일투쟁을 했으며 1910년 국권침탈 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토벌에도 항일의병활동이 이어진 곳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이후,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경기 의병활동의 본거지인 연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9년 3월 21일 백학면 두일리 장터에서는 조인식,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 한상혁, 구금령 등이 주도로 약 100여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제에 잡혀가 징역형을 치렀다. 조인식을 비롯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이름을 올린 주요 인물 50명은 석판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렇지 않은 이름 없는 독립 의병들도 많은데... 아무 기록이 없는 것이 아쉽다.

▲ 50인의 이름을 새긴 석판

세 번째 방문지는 연천 심원사에 있는 '항일의병묘역’이다.

▲ 항일의병비

1907년 일제의 고종 강제 퇴위와 신식군대 해산에 분개하여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이 묘역는 심원사 전투에서 순직한 의병 9분을 모신 곳이다. 심원사는 계곡이 깊어 연천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의 주요 근거지였다. 1907년 의병장 허위가 이끄는 의병부대 800명이 심원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이를 알고 토벌대를 보내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다. 수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6인의 시신이 연천군 신서면 사유지에 안장되었다. 2012년 땅주인이 퇴거를 요청해 연천군청은 이 묘를 심원사 부도밭 아래로 이장했다. 이때 도신리 일대의 무명 의병 3묘도 함께 합장했다. 하지만 봉분은 흔적도 없고 묘비는 풀이 무성해 잘 보이지도 않은 채 방치되었다. 2016년 민족문제연구소 연천지회와 연천군의원의 노력으로 ‘연천 항일의병비’가 건립되고 부지도 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무명 의병의 묘 앞에서

네 번째 방문지는 포천 신북면에 있는 최익현, 최면식 선생을 기리는 채산사(茝山祠)다.

▲ 채산사

채산사는 최익현선생과 최면식선생 두 분을 기리는 사당이다. 최익현 선생의 고손되는 최종규선생이 몸소 나와  두 분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면암 최익현(1833~1906)선생의 운명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포천 가채리에서 태어나 11살 때 충북 단양으로 옮겨 살다, 14세에 이항로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23세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나 국정이 잘못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상소문‘을 수없이 올렸다.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정치를 비판하는 '시폐상소'를 올려 "경복궁 복원공사 중단, 수탈행정 금지, 당백전과 사대문 문세의 징수를 혁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상서로 명성이 전국에 퍼지게 되어 호조판서로 승급하였으나, 고종 10년(1873년) ’계유상서‘를 올려 대원군이 실각되면서, 부자를 이간시켰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된다.

고종 13년(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자 다시 ‘오불가척화소’를 올려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다. 고종 32년(1895년)에 단발령을 계기로 ‘청토역복의제소’를 올리며 개화정책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와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였다. 항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73세 나이에 전라도 태인에서 항일의병을 조직하고, ‘창의소’를 올리고 민중봉기를 촉구하는 등 항일의병 활동을 수행하다가,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압송된다. 대마도에서 일왕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으로 항거하다 감옥에서 사망했다.

선생의 우국충정을 계승하기 위하여 많은 사당이 건립되었다. 그 중 선생의 생가가 있는 포천군 가채리에 건립된 것이 채산사다.

염재 최면식(1891~1944)선생은 최익현 선생의 후손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만주로 망명한다. 군자금과 무기조달에 전념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8년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광복회 재건에 힘쓰다 다시 체포되어 무기수로 공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감옥에서 얻은 병이 악화되어 출옥한 뒤 광복을 바로 앞둔 1944년, 54세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분은 옥중 단식으로 돌아가셨고, 한분은 옥중에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사당에 들어가 두 분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절하고 영혼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오늘 방문한 모든 조상들의 희생으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저 숙연할 따름이다.

이번 역사탐방 행사는 시간 상 계획된 '왕방산 의병전투지'를 가지 못하고 마쳤다. 내년 봄에 다시 진행할 계획이라고 하니 내년을 기약하면 될 것 같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참가원 모두에게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학생들이 약 10여명 왔는데 대부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부모님 권유로 참여했다고 했다. 요새 부모가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서는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초등학교 저학년들도 부모의 의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 참가한 학생들은 참 신기한 아이들이다. 민감한 사춘기 나이에 부모의 의견을 따라준 것이다. 평소에 부모와 아이들 간 소통이 잘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데.. 복 받을 아이들이고 고마운 아이들이다.

제1회, 제2회 '잊혀진 항일독립투사를 찾아서' 탐방행사에 재능기부 차원의 실무를 맡아 설명서를 만들고 새벽 3시까지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한 김재광주주통신원과 손가락이 곱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신 사진작가 김영준선생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보이지 않게 뒤에서 참가원들을 살뜰히 챙겨주신 김재광주주통신원의 천사 같은 아내 박영신님과 이 행사의 모든 물적, 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문화공간 온' 이상직 이사장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사진 : 김영준 사진작가, 김미경 편집위원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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