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사회성을 돌아보게 만든 영화

 

★선생이 너무 많은 세상

21세기 IT의 발전으로 무척 복잡다난하고 분주한 세상이다. 가만두어도 바쁜데 사회 곳곳에 선생도 많다. 이런저런 주입식 교훈 등은 되레 뒷전으로 밀려난다. 지난 일요일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는 별 특징도 없는 제목의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영상과 대사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아주 아름답다. 많은 배역들을 등장시키지 않고, 주인공을 살리고 주제를 알려주느라 주절주절 어떤 장치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래서 잔잔하면서도 깔끔하고, 단촐하면서도 풍부한 감성을 일깨운다.

★첨보는 감독의 놀라운 영화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을 열어보았다. 최성현 감독은 ‘역린’ 시나리오 작가. 이 영화로 첫 감독 데뷔다. 소설이든 영화든 처녀작은 혼신의 힘을 다하되, 그 힘이 넘쳐서 어딘가 어색하고 빈틈을 보이는 아마추어리즘에 머물 수도 있다. 근데 이 영화는 이런 나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버렸다. 너무 빠른 전개로 멋을 부리지도 않고, 이런저런 욕심으로 군더더기를 바르지도 않았다. 적절한 호흡과 비애 속에서도 간간이 터지는 웃음과, 웃음 속에서 마음이 저려오는 동시성을 느껴야했다. 상영시간 두 시간도 안 되는 영화가 원고지 천 장에서 세밀히 풀어 낸 한 권의 소설처럼 깊은 감동을 주었다면 이 영화는 분명 성공작이다.

▲ 최성현감독님

★할머니부대의 관람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한 무리의 할머니들을 보았다. 기사를 꼭 쓰고 싶어서 포스터 사진을 찍다가 지나가는 할머니들을 불러세워 찍었다. “이 영화를 어떻게 보러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 중 한 분이 이 영화감독의 어머니라 했다. 경로우대 5천원의 관람료로 오신 분들의 눈가가 발갛게 젖어있었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든 이가 경주사람이라니, 놀랍고 반가웠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며 기사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명함을 건네며 감독의 연락처를 받았다. 근대사회는 날이 갈수록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고 있다. 내 가족만 평안하면 된다는 이기적 기복현상이 넘친다. 잠시 머무는 이 지구별에서 나는 곧 그들 이웃이다. 나만 잘 산다고 행복해지지 않는 현실은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숙제다.

★경주 촌놈, 출세작을 만들다

최성현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명작가로 오래 살았다는 그는 스스로를 촌놈이라 여겼다. 내세울 게 없어 프로필도 공란이며, 인터뷰도 최소화한단다. 그의 겸양이 인성을 울리는 영화를 만들었나 보다. 그는 엔딩씬을 가장 좋아한다.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무하마드 알리) 이 표어는 영화 속에서 하나의 경전처럼 내재한다. 세상 어떤 불행도 있을 수 있는 일이며, 희망은 누구나 꿈꿀 수 있기에 우리는 산다. 어머니(윤여정 분)의 장례를 마친 뒤, 주인공 ‘조하(이병헌 분)’는 서번트증후군을 앓는 이복동생(박정민 분)과 나란히 서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기 전 이복동생이 한 발 내딛자 ‘조하’는 말없이 동생 손을 당겨 꼭 잡는다. 나는 이 장면에서 왈칵 눈물이 터졌다. 그래 이복이면 어떻고, 남이면 또 어때, 우린 한 시대를 그렇게 살아가야 해. 울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다운증후군, 자폐증, 서번트증후군은 복합적 형태를 띤다. 그들은 잘못된 사람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일 뿐이다.

★이혼이 성행하던 그 때

1998년 IMF의 직간접적 소용돌이에서 유독 많은 가정이 해체되었다. 올해로 꼭 20년째다. 영화의 설정과 맞아떨어지는 시점의 모자가정이 허다하다. 북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아직 턱없이 모자라는 복지정책이다. 지금 겨우 누리는 얼마간 복지혜택이 그 때는 없었다. 가슴 에이는 모성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가난에 침몰했어야 했다. 구구절절 신파적 요소를 보여주지 않아도 이 영화는 관객이 이해하도록 이끌어서 좋다. 일부러 눈물을 자극하는 작위적 요소를 잘 걸러냈다. 삶이란 거기서 거기다. 들추어보면 누구나 눈물샘 몇 개는 꿰어 차고 산다. 남의 슬픔에 동승할 때, 굳이 옆구리 찌르면 공연히 화가 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일정 수준 이상이다.

★영화의 생명은 연기

이 영화의 또 하나 특징은 이병헌이라는 1급 배우의 명품연기에 버금 갈, 박정민의 연기가 무척 돋보인다. 상상할 수 없는 천재성을 지닌 서번트증후군의 특이한 피아노 연주를 대역 없이 훌륭히 연기하여 음향이 실제처럼 들리게 하는 혼돈을 준다. 감독은 피아노 연주가 생소한 그에게 직접 피아노 한 대를 사주었고, 6개월간 혼신을 다해 연습한 결과다. 영상물도 인쇄물도 넘치는 세상에서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12세 이상 관람가의 이 건전한 영화는 초등생부터 단체관람을 해도 좋으리라.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의 백 마디 말보다 잘 만든 한 편의 영화가 성인이 되기까지 미치는 순수한 영향력은 의외로 깊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이 영화가 보고 싶어지는 이유다.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야말로 선진 아닌가.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이미진 주주통신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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