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와 위서(魏書)

우리나라의 역사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국과 일본의 이해에 따라 좌우되어 왔고, 그 피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글로 기록할 수 없었던 태생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최근 사학계의 갈등과 대립으로 우리 고대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역사학도는 아니지만 평범한 일반인의 눈으로 고대사를 논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몇몇의 전유물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상상력과 고증으로 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군이야기, 고조선 이야기, 한사군 이야기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김부식이 1145년에 서술한 삼국시대의 정사 삼국사기와, 뒤를 이어 1281년 고려의 승려 일연에 의해 편찬된 야사인 삼국유사입니다.

우리의 건국신화인 단군이야기는 야사인 삼국유사에 최초로 나오지요. 일연은 유사 이래 가장 큰 공포를 안긴 몽고군의 침략으로 어쩌면 나라와 민족 자체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삼국유사를 편찬하지 않았을까요? 우리 한민족이 천년만년 이어지기를 염원하면서.

魏書云:乃往二千載有檀君王儉,,,,,,,開國號朝鮮與高同時.(위서에 이르기를: 이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다. 고(高)와 같은 시기다.)

古記云:환인(제석)의 서자 환웅이,,,,,,,,,檀君王儉以唐高卽位五十年,,,,都平壤城[今西京]始稱朝鮮.(고기에 이르기를: 환인의 서자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낳은-단군왕검이 당고(唐高)의 즉위50년에,,,,,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불렀다.)

위 삼국유사를 보면 일연이 읽은 책은 위서(魏書)이며 요임금 이후 2천년 후에 쓰인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환인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말 하늘, 하느님의 한자음을 차용하였습니다. 괄호 안의 제석은 불교 용어로 산스크리트어 샤크라입니다. 천제(天帝, 하느님)를 의미하며 후대에는 제석천으로 더 많이 불립니다.

원문의 고(高)는 고려 3대왕의 이름이 요(堯)이므로 쓰지 못하고, 고(高)로 대신 사용하였습니다. 아래 당고(唐高)도 요의 다른 표기입니다. 고려시대 우리나라에서만 이루어진 일은 아닙니다. 시작은 당태종 이세민입니다. 왕이 된 후 일반 백성들은 자신의 이름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지요. 서역을 다녀온 현장법사로부터 불교를 많이 접했고, 당나라 불교 중흥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에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에서 세(世)를 쓰지 못 하게하여 관음보살이라 부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 가서도 확인하였습니다.

요(堯)는 당요(唐堯) 혹은 도당요(陶唐堯)라고 쓰기도 하는데 도와 당 지역의 부족국가의 우두머리였음을 의미하며, 여러 부족 연맹체의 우두머리가 된 요는 순과 함께 삼황오제에 들어갑니다.

가장 곤혹스런 평양성에 관한 이야기는 한사군이야기에서 다루겠습니다.

위서(魏書)는 위나라 역사책으로 봐야하는데, 동명의 위나라는 세 번 나옵니다. 1. 전국시대 전국 칠웅의 위나라, 2. 위촉오 삼국시대의 위나라, 3. 위진 남북조 시대 5호 16국을 통일한 북위의 위나라가 그들입니다.

▲ 기원전 260년 경 전국시대의 지도입니다. 중국에서 만든 다른 지도에서는 동 시기임에도 연나라를 한반도의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까지 그려넣기도 합니다. 사진: Wikipedia

1. 춘추전국시대의 위나라는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지요. 시조는 주나라 무왕의 동생 필고(畢高)입니다. 후손인 필만(畢萬)부터 위만(魏萬)으로 바뀌어 위씨(魏氏)가문과 위나라가 시작됩니다. BC 403년 위(魏)나라는 최강의 국가가 되면서 전국시대를 열게 됩니다. BC 225년 진시황에 의해 망할 때까지 180년을 유지한 나라이지요. 이 위나라의 역사서는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2. 조조가 죽은 220년 아들 조비가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아 세운 왕조가 위촉오 삼국의 위(魏)나라입니다. 후손이 5대 45년 통치를 하고 265년 사마의(사마중달)의 손자 사마염에게 망합니다.

서진의 진수(AD 233~297)가 쓴 삼국지가 전해지고,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도 나오지만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3. 5호 16국을 통일한 선비족 탁발부에 의해 세워진 위나라(북위)가 386년에서 534년 까지 약 150년 이어집니다. 이때의 역사를 북제의 위수가 554년에서 559년에 편찬한 위서(魏書)가 가장 널리 알려진 책입니다. 이 위서에는 고구려, 백제, 거란 등등 여러 동이의 기록이 들어있지만 단군조선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같은 이름의 위서(魏書)라는 역사책이 9종류가 있었다고 하는데, 북제의 위수가 쓴 위서와 삼국시대 삼국지 위지만 존재하고 그나마 7개는 사라졌습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시기는 1281~1283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일연이 아무 근거 없이 단군왕검을 창조하였거나 구전설화를 기록하였다면 서두에 ‘위서에 이르기를’ 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거짓말쟁이거나 사기꾼이 되어야겠지요.

하지만 국사를 지낸 승려가 전혀 근거 없는 책을 있는 것처럼 썼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만약 실재하는 위서를 봤고, 요임금으로부터 2천년 후에 쓰인 역사서를 가정하면 기원전 225년에 망한 전국7웅의 하나인 위나라의 사서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저 추측할 뿐입니다.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요임금과 대략 2,500여년 차이가 납니다.

세 번째 위수가 쓴 위서와 요임금 사이에도 약 2,800여년 차이가 나는데 단군왕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이 책을 일연이 인용했다고 하는 것도 근거가 약합니다.

▲ 좌: 춘추전국시대에 대나무를 다듬어 만든 죽간을 이용하여 만든 죽책. 서체는 대전체임. 우: 당시 각 지역마다 사용하는 글자의 모양과 뜻이 달라 진시황이 이사를 시켜 문자를 통일한 후 정해진 소전체 사진 Wikipedia

사서에 기록된 역사를 모두 사실이라고, 한 점 오류도 없다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진시황이 이사를 시켜 문자를 통일한 서체가 소전체입니다. 즉 BC 221년 이후의 역사 기록들은 대체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BC 770년 춘추 전국시대를 지나며 수많은 사상가들이 많은 저술을 내어 놓았는데, 당시에는 대전체를 사용했습니다. 이 시기의 기록도 문자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요.

하지만 동주 이전의 기록은 전래된 이야기나 다른 저서를 인용하였다고 봐야합니다. 즉 문자로 당시를 기록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 상나라 말기 국가적인 대소사에 점을 치기위해 사용한 갑골과 청동기 시대(상말 주초) 청동제기에 사용한 금문. 사진: Wikipedia

현재 천여 글자가 해독이 된 갑골문으로 보아 상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도 없습니다. 그 이전의 하나라와 요순시대의 기록과 유물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기에 등장하는 삼황오제 이야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단군조선 이야기를 다르게 볼 이유는 없지요.

그렇지만 단군과 달리 요순은 후대로 가면서 중국인들의 조상으로 자리를 잡아갑니다. 사마천의 사기가 나온 후 거의 400여년이 지난 서진의 황보밀(215~282)은 고사전이란 책에서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허유와 소부를 포함한 여러 은둔 기인들을 소개하며 요순시대의 전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고, 그 뒤를 이은 후손들이 살을 더 붙여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허유와 소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간략하게 소개를 하면 요임금이 나라를 물려줄 현자를 찾아 나섭니다. 물어물어 허유를 찾아가 나라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자 거절하고, 허유는 기산으로 들어갑니다. 요임금이 또다시 기산으로 찾아가 일부라도 맡아서 다스려달라고 하자 거절하고 영천에 가서 귀를 씻지요. 마침 소를 끌고 와서 물을 먹이려던 소부가 그 연유를 묻자 자초지종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소부는 소를 끌고 상류로 가면서 그런 더러운 이야기를 듣고 귀를 씻은 물을 자기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줄거리에 살을 붙여 허유와 소부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지요.

우리민족의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들어있지만 일연이 언급한 위서가 남아있지 않기에 의혹을 떨칠 수 없고, 쑥과 마늘을 먹고 곰이 여자인 웅녀로 변신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초등학생들도 머리를 내젓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민족의 개국신화를 다시 살려내 다듬고,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으로 분열과 갈등으로 갈라진 남북과 동서가 한 민족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연이 참고한 위서가 실존했었다는 추정으로 당시를 상상해봅니다. ‘이미 사라진 7개의 위서 중에 하나였거나, 아니면 고조선에서 편찬한 자체의 역사책을 위서라고 하지 않았을까’라고요. 다음에 쓸 고조선 이야기에서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자료를 상세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위만조선은 손자 우거왕까지 86년간 이어집니다. 사기에는 만(滿)이라는 이름만 존재하는데, 사기를 바탕으로 200여년 후에 쓴 한서와 400여년 후에 쓴 삼국지위지동이전등에는 위만(衛滿)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일연은 魏滿으로 표기를 합니다.

즉 일연이 본 많은 자료 중에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이야기는 현재 남아있는 중국의 사서와는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중국 문헌에 의하면 위만이 연나라에서 일천여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오는데 상투를 틀고 조선인복장을 하고 들어옵니다. 또한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는데 통치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즉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이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어느 조선인 일행이나 부족이 당시 선진국인 연나라에 가서 군인으로 성공한 후, 연나라가 진시황에게 망하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왕위를 찬탈했다고 봅니다. 연나라에서 군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자기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개명해야 했고, 당시 연나라에 많은 위(衛)씨 대신, 주문왕의 아들이며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동생이 시조인 위나라의 위(魏)씨를 사용하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씨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필만(畢萬)으로 진나라 헌제에게서 위(魏)나라를 하사받고 위만(魏萬)으로 성씨를 바꾼후, 후손이 다스린 위나라가 전국시대의 강국이 됩니다.

위만이 정권을 탈취하고 86년간 통치를 하면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편찬한 역사서인 사서가, 단군조선이 등장하는 위서(魏書)라고 추측합니다. 위만이 魏滿이라고 표기하자 후대 중국 모든 사서는 衛滿으로 표기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유사의 魏滿 대신 衛滿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위만조선에 대한 중국문헌의 자료도 다음 조선이야기에서 서술하겠습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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