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83~386일까지-강명구 마라톤119

9월 19일 그 날, 뜨거웠던 여름의 사나운 열기는 가셨지만 처처히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나의 조국. 할머니로부터 아버지, 나, 대대로 이어진 그리움 반쪽에 가까워지면서 내 가슴속 열기는 더 뜨거워진다. 거침없는 내 발길이 만리장성 동쪽 끝 관문 산해관을 경쾌하게 통과한다. 이 가을에 익어가는 것은 들판 곡식과 과일뿐이 아니다. 평화와 통일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불가역적으로 돌아가는 우리나라 평화시계와 나의 평화발걸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간다는 것은 기적과 같이 기분 좋은 일이다.

친황다오로 들어서자 비릿한 바다 내음이 어머니 양수처럼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인천 앞바다의 짠내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또 저기 건너 내가 가려던 아버지의 고향 대동강 하류, 송림시(겸이포)가 보이는 듯 가깝다. 작년 8월 31일 네덜란드 헤이그 대서양 바다 끝에서 출발하여 1년여 만에 태평양, 우리가 서해라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나 자신도 반신반의하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간다. 

▲ 2018년 9월 19일 중국 Shenhexiang(深河乡)인근에서 Dongmengjia Tun(东孟家屯)인근까지 달리면서

친황다오는 중국 보하이, 발해(渤海)만에 닿아있는 허베이성 유일한 항구도시이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사람을 파견했다 하여 친황다오라 부르기 시작했다.

태산에서 제를 올린 후 서복에게서 ‘삼신산(三神山) 신선은 불로초를 먹고 불로장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가 솔깃해진 진시황은 서복을 탐험대장으로 선단을 급조한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은 서복의 함대를 배웅하고 함양으로 가는 귀로에서 산둥 평원을 지날 때 길 위에서 51세의 아까운 나이에 객사하고 만다. 서복이 찾아간 삼신산 중 하나는 한라산이라 한다. 서복과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쌍이 도착한 곳이 제주도 정방폭포라는 말이 있다. 

▲ 2018년 9월 19일 중국 Shenhexiang(深河乡)인근에서 Dongmengjia Tun(东孟家屯)인근까지 달리면서

산해관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산해관 문을 통과하는 순간, 옛날 삼족오의 깃발이 휘날렸던 고조선과 고구려 강역이였을 땅에 들어서는 순간, 평양선언이 발표되었다. 식민과 분단, 전쟁, 우리끼리 아귀다툼으로 이어진 8천만 겨레의 70년 상처를 치유하며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출발점이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미국 안에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은 죽음의 상인 ‘군산복합체’의 거대한 장벽을 과연 남북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보기 좋게 날려 보냈다. 우리 힘의 잠재력을 확인한 발걸음은 더욱 경쾌해졌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 안에 있는 그 거대한 ‘신명’에 우리도 놀라고 세계인들도 놀랐다. 오늘 문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여명거리와 능라도 경기장 저 인파들의 ‘신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했던 그때의 신명과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을까. 저 뜨거운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새 평화시대를 열어젖힐 그 사람들이다. 남과 북이 손을 마주잡고 보니 그 손 위에 우리끼리 새 길을 열어가겠다는 배짱이 얹어졌다. 우리는 한번 한다면 하는 결기있는 민족이다.

산해관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중국이 인위적으로 이민족과의 경계를 설정한 선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두려워서 국가적 역량을 총집결하여 제발 이 성은 넘어오지 말라고 쌓은 거대한 성이다. 그 이민족이 바로 동이족이요, 고조선이다. 산해관 바로 옆 친황다오시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이 갈석산이 중요한 이유가 고조선과 중국 경계지역이기 때문이다. 산해관은 인위적인 중국 최북방 방어선이고 갈석산은 자연적인 방어선이다.

이곳은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공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내 심장은 첫사랑을 처음 바라봤을 때 박자로 요란하게 박동을 치고 있다. 산해관 주변에는 철 지난 해수욕장이 펼쳐져있다. 이곳은 베이징 근교에서 가장 아름답고 여름에 시원한 휴양도시라고 한다. 내가 묵은 숙소는 우리가 발해, 서해바다라 부르는 곳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 펜션이다. 30층이 넘지만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가격이 올라가 적당한 가격의 6층이다. 살짝 바다가 보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저녁은 일 년여 못 먹은 해산물이 먹고 싶었다. 서해바다의 살찐 게와 소라를 삶아달라고 하고 낙지 몇 마리는 그냥 손질해서 달라고 하니 놀란다. 이 사람들은 아직 생으로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가방에서 거의 일 년여 잠들어있던 초고추장이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 2018년 9월 21일 달리기를 마치고

산해관 바로 옆에 ‘노룡두’라고 있다. ‘노룡두’는 장성 종착점에 있다. 마치 늙은 용머리가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대륙을 가로지르며 만 리를 달려온 장성이 바다로 끝이 나자 용이 되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으로 중국 사람들은 보았다. 나는 만리장성과 같은 거대한 축조물을 볼 때마다 인간들에 대한 막막하고 알 수 없는 슬픔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 옛날 사람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보다 참혹한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진시황 초기에 시작된 장성 축조에 무려 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장성 축조에 차출된 청년들은 거의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강제로 동원되어 기아와 질병, 추위와 산등성이까지 돌을 메고 올라가야하는 난공사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주검은 장성의 바닥에 파묻혔다고 하니 장성은 현존하는 가장 긴 무덤이 되었다.

산해관에는 수많은 전쟁과 애끓는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맹강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맹강녀 남편은 결혼 3일 만에 여름 홑옷만 입고 장성 인부로 징용되었다. 겨울이 닥쳐와도 소식이 없자 그녀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솜옷을 정성껏 만들어 보따리를 안고 몇 달 만에 만리장성에 도착한다. 그러나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에 너무도 원통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니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더니 장성이 무너지고 남편의 시신이 나왔다.

장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대노한 진시황은 맹강녀를 잡아들였다. 잡혀온 맹강녀를 본 진시황은 그녀 미모에 반하여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남편의 제사를 지내게 해주면 그리하겠다고 약속하고 제사가 끝나자 맹강녀는 남편의 유골을 안고 흰 거품이 이는 산해관 앞바다로 뛰어든다. 후대인들은 만리장성이 잘 바라다 보이는 곳에 맹강녀 묘를 만들고 동상을 지어 지조와 절개를 지킨 그녀를 기리고 있다.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북경이 공격당하자 오삼계는 50만의 병사를 이끌고 북경을 구하러 가던 중에 황제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자성에게 항복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애첩이 이자성의 부장에게 겁탈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산해관으로 돌아가 대치중이던 청군에게 산해관의 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청군은 피도 흘리지 않고 북경을 접수해버렸다. 명의 시대에서 청의 시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당시 30대 열정적인 사나이는 어쩌면 조국보다도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 못한 것을 참담해하는 ‘사랑 바보’였을 수도 있다. 가끔 역사의 큰 물줄기는 한 사람의 사랑 때문에 확 뒤틀려 버리기도 하니, 누구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평화의 역사로 확 물줄기를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혹시 트럼프의 사랑 때문에?

연개소문한테 혼쭐이 난 당태종은 ‘사람이 장성보다 낫다’라는 말을 남겼다. 만리장성은 북방의 적을 막아내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지어졌지만 정작 전쟁보다 더 큰 고통과 아픔을 인민들에게 안겨주었으며 큰 전란도 막지 못했다. 전쟁은 물리적 방어보다 외교와 소통, 민심을 얻음으로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남과 북은 군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비용를 교육과 복지로 돌린다면, 더 나은 미래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000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했습니다. 남북관계를 전면적이고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기자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의 능라도 연설 중에서

▲ 2018년 9월 18일 중국 Yaozhancun(腰站村) 인근에서 Shenhexiang(深河乡)인근까지 달리면서 만난 휠체어 여성과 함께
▲ 2018년 9월 18일 중국 Yaozhancun(腰站村) 인근에서 Shenhexiang(深河乡)인근까지 달리면서
▲ 2018년 9월 18일 중국 Yaozhancun(腰站村) 인근에서 Shenhexiang(深河乡)인근까지 달리면서
▲ 2018년 9월 19일 중국 Shenhexiang(深河乡)인근에서 Dongmengjia Tun(东孟家屯)인근까지 달리면서
▲ 2018년 9월 21일 중국 Dongmengjia Tun(东孟家屯) 인근에서 Gouhechengcun(狗河城村) 1.5km 전까지 달리면서
▲ 2017년 9월 1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2018년 9월 21일 중국 Gouhechengcun(狗河城村) 1.5km 전까지(최소 누적 거리 13,243km, 중국 누적거리 4,305km)

 * 평화마라톤에 대해 더 자세한 소식을 알고 싶으면 공식카페 (http://cafe.daum.net/eurasiamarathon)와 공식 페이스북 (http://facebook.com/eurasiamarathon), 강명구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kara.runner)에서 확인 가능하다. 다음카카오의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8063)과 유라시안마라톤조직위 공식후원계좌(신한은행 110-480-277370/이창복 상임대표)로도 후원할 수 있다.

[편집자 주] 강명구 시민통신원은 2017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년 2개월간 16개국 14,500km를 달리는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시작했다. 그는 2년 전 2015년, '남북평화통일' 배너를 달고 아시아인 최초로 미대륙 5,200km를 단독 횡단한 바 있다. 이후 남한일주마라톤, 네팔지진피해자돕기 마라톤, 강정에서 광화문까지 평화마라톤을 완주했다. <한겨레:온>은 강명구 통신원이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달리면서 보내주는 글과 이와 관련된 글을 그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날까지 '[특집]강명구의 유라시안 평화마라톤'코너에 실을 계획이다.

사진 : 강명구, 현지 동반자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강명구 주주통신원  myongkuk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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