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87~390일째

중국의 시 중에 ‘달은 고향의 것이 더 밝네’라는 시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고향이 있고, 고향마다 달이 있지만 사람들이 고향의 달만 사랑한다.” 랴오닝 성의 진저우 지역을 달리고 있는 지금, 중국 하늘에도 달이 휘영청 떠오르니 고향의 달이 그립다. 작년 추석에 이어 올 추석도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이 애틋하다. 그러나 지금 마음속에 보름달처럼 꽉 차오르는 꿈을 안고 달리는 발걸음엔 힘이 붙는다. 좀 늦어지겠지만 이 길은 난생처음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하러 가는 세상에서 가장 먼 성묘길이다. 나는 1만5천km를 달려서 성묘하러 가는 길이다.

유라시아 대륙 어느 나라도 추석과 비슷한 명절은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각별한 추석은 없다. 우리 추석에는 유교 전통이 어우러진 조상과 가족, 마을공동체, 고향의 끈끈한 연이 녹아있다. 그 추석날 모두들 즐거워하지만 마음이 아파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실향민들이다.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 작은아버지들의 아픔을 지켜보면서 자랐고, 그 슬픔을 물려받았다. 잠시 이별인줄 알았던 핏줄을 영영 보지 못하는 아픔을 안 당해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이산가족 대부분이 고령인 점을 고려하면 늦었지만 남북 모두의 큰 결단이 절실하다.

▲ 2018년 9월 22일 중국 Gouhechengcun(狗河城村) 1.5km 전에서 Xiaowangtuncun(王屯村)까지 달리면서 만난 북적이는 시장과 낛시하는 사람.
▲ 2018년 9월 23일 중국 Xiaowangtuncun(王屯村)에서 후루다오 시(葫芦岛市)인근까지 달리면서 만난 사람들, 중추절을 앞둔 시장 그리고 고층 아파트

중국의 중추절은 단오절, 청명절, 춘절과 함께 4대 전통명절이다. 월요일이지만 공휴일이라 아침거리는 한산하다. 공원에는 기공 체조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아주머니 수십 명이 무지갯빛 부채를 들고 군무를 추는 모습과 둥그렇게 둘러 모여 제기차기 하는 모습이 정겹다. 자주 보는 모습이지만 이 사람들 제기 차는 발기술이 대단하다. 앞발, 뒷발 다 사용해서 제기를 차는 모습이 마치 무술영화의 신공 같기도 하다. 이렇게 발재주들이 좋은 사람들이 왜 축구에서는 공한증에 떠는 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 2018년 9월 24일 24일 공원에서 만난 사람들

추석 대표음식으로 우리나라에 송편이 있다면 중국에는 월병이 있다. 영어로는 Moon cake이라 부르는 것이다. 보름달 모양으로 둥근 빵에 돼지기름, 설탕, 달걀, 호도, 밤 등 견과류를 넣어서 만든다. 중추절이 되면 보름달에 이 빵을 바쳐 가족의 행운과 안녕을 비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월병은 중추절에 가장 많이 주고받는 선물이고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월병 역사는 은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 한나라 때 장건이 비단길을 열고 서역으로부터 호두와 깨를 들여왔다. 이를 월병 소로 사용하면서 호두로 만든 월병을 호병(胡餠)이라고 불렀다. 중추절 밤, 당 현종이 달을 보며 양귀비와 호병을 먹다가 호병의 호자가 오랑캐 호자를 연상시킨다고 투덜거리자,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보름달의 정취에 젖어있던 양귀비는 자신도 모르게 ‘월병’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호병이 월병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2018년 9월 25일 중국 Jinzhou Expo Park 인근에서 Dayouxiang(大有乡) 5km 전방 까지 달리면서 만난 어르신

중국 중추절은 달구경이나 가을잔치의 개념이지만 우리 추석은 대동제 성격이 강하다. 월병은 꽉 찬 보름달 같고 송편은 반달 같다. 보름달은 기울어갈 것이고 반달은 차츰 커져서 만월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미래지향적이었다. 이제 그리도 오랜 세월 꽉 찬 보름달이 되고픈 우리가 통일을 이루어 꽉 찬 보름달 같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세계를 향한 대동제를 신명나게 펼쳐나갈 때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추석을 맞아 한국 극장가에서는 ‘안시성’이라는 영화가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하는 것 같다. 안시성은 내가 지금 지나는 후루다오와 진저우를 조금 더 가면 랴오닝성 하이청(海城)의 동남쪽에 있는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했다. 당군은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쳤다. 성과가 없자 당 태종 이세민은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 성으로 쉽게 넘어가려 했다. 60여일 만에 토산이 완성되었는데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병사들이 새벽에 기습 공격해 토산을 점령한다. 설상가상으로 당나라 보급을 맡은 수군이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자 88일 만에 이세민은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양만춘장군이 추격하다가 당 태종의 눈에 화살을 정확하게 박았다.

이 지역이 옛 고구려 땅이었거니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 부근에는 석유시추공이 수없이 보인다. 갑자기 배가 아파진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곳은 요동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채호는 그의 <조선사 연구초>에서 하이청 부근을 고평양(古平壤), 즉 고조선의 옛 수도라고 지목했다.

고평양이니 고조선이니 하는 말 앞에 ‘고(古)’자가 붙은 것은 후의 평양,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학자들이 붙인 말일 것이니 이곳에 진짜 우리 평양이 있었고 조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일대가 고구려 중심지였던 것이다. 가끔 내 안에 광개토대왕 유전자가 있어 ‘만주벌판을 달리는 꿈을 꾸었나!’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지금 나는 그의 위엄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의 땀방울이 떨어졌을 이 땅 위에 나의 땀방울을 섞으며 할아버지 묘소에 성묘하러 가고 있다.

▲ 2018년 9월 22일 중국 Gouhechengcun(狗河城村) 1.5km 전에서 Xiaowangtuncun(王屯村)까지

개인적인 성묘길에 ‘남북평화통일’이니 ‘세계평화’니 하는 거창한 표어를 내걸어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 고백하지만 나는 통일열사로 교육받거나 거창한 사상이나 이념 같은 것이 없다. 더군다나 평화운동가로 내 인생 목표를 삼은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내 체력이란 것도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되어 시작할 때 내 자신도 이렇게까지 거뜬하게 달려올지 의심했었다. 그러니 나를 열사니 초인이니 이런 말로 오글거리지 않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 2018년 9월 23일 중국 Xiaowangtuncun(王屯村)에서 후루다오 시(葫芦岛市)인근까지

남북무장군인 백만여 명이 70여 년간 철통같이 지켜낸, 안시성보다도 더 견고한, 저 삼팔선을 뚫고서 성묘할 길은 도저히 없었다. 그래서 1만5천km나 되는 우회로를 생각해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성묘길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북평화통일’이니 ‘세계평화’란 간판을 도용했다. 그러니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죗값을 단단히 치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힘들게 먼 길을 오는 동안 기적 같이 평화가 내 길동무를 해주었다. 평화가 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어 행진해주었다.

▲ 2018년 9월 24일 중국 후루다오 시(葫芦岛市)인근에서 Jinzhou Expo Park 인근까지

내가 성묘를 다녀오고 누군가 또 성묘를 다녀올 수 있다면, 추석 하루만이라도 성묘길을 열어준다면. 그 길은 성묘길이 되고, 그 길은 수학여행길이 되고, 또 신혼여행길이 되었다가 자유왕래길이 될 것이니 내가 ‘남북평화통일’이니 ‘세계평화’란 간판을 도용한 것을 나무라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평화운동가로 행세를 하더라도 크게 나무라지 말고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다. 다만 열사니 초인이니 이런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피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국 동해안 길을 따라 달리는 길에 가을바람이 넉넉해서 달리기에 더없이 좋다.

▲ 2018년 9월 25일 중국 Jinzhou Expo Park 인근에서 Dayouxiang(大有乡) 전방 까지
▲ 2017년 9월 1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2018년 9월 25일 중국 Dayouxiang(大有乡) 전방까지 (최소 누적 거리 13,411km, 중국 누적거리 4,473km)

 * 평화마라톤에 대해 더 자세한 소식을 알고 싶으면 공식카페 (http://cafe.daum.net/eurasiamarathon)와 공식 페이스북 (http://facebook.com/eurasiamarathon), 강명구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kara.runner)에서 확인 가능하다. 다음카카오의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8063)과 유라시안마라톤조직위 공식후원계좌(신한은행 110-480-277370/이창복 상임대표)로도 후원할 수 있다.

[편집자 주] 강명구 시민통신원은 2017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년 2개월간 16개국 14,500km를 달리는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시작했다. 그는 2년 전 2015년, '남북평화통일' 배너를 달고 아시아인 최초로 미대륙 5,200km를 단독 횡단한 바 있다. 이후 남한일주마라톤, 네팔지진피해자돕기 마라톤, 강정에서 광화문까지 평화마라톤을 완주했다. <한겨레:온>은 강명구 통신원이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달리면서 보내주는 글과 이와 관련된 글을 그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날까지 '[특집]강명구의 유라시안 평화마라톤'코너에 실을 계획이다.

사진 : 강명구, 현지 동반자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강명구 주주통신원  myongkuk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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