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 도태였던 증조부 최우삼은 4남 2녀를 두셨다.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을 이끈 진동(명록), 운산(명길), 치흥(명순) 3형제와 막내 명철, 그리고 위로 딸이 둘이다. 그중 복실이라는 이름의 고모할머니가 우리 외가인 차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셨다. 복실은 아들(차범철)과 딸(차범순)을 낳았는데 우리 어머니(차연순)와 사촌 간이다. 내가 복실 고모할머니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집안 규모가 커서 멀고 가까운 친척들이 많았고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았다. 그러나 다양하고 생생했던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우리 집의 대화 소재는 매순간 다양했지만 아무래도 봉오동에서의 무장독립전쟁이다. 그날의 승리가 가장 많이 선택되는 주제였다. 그래서 최운산장군 형제들과 자랑스런 우리 독립군들이 성취했던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손자인 우리 형제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 만주 독립전쟁 이야기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 해야 하는데 경제적 어려움을 핑계로 후손의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집안이야기를 떠벌리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만 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제대로 된 기록물 하나도 남겨놓지 못했다. 뒤늦은 아쉬움이 컸다. 아버지가 늘 강조하신 것처럼 무인 집안의 기질을 닮은 탓인지 평생 일기도 쓰지 않던 내가 이제라도 가족사를 정리하기 위해 기억을 되짚어가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독립전쟁을 직접 지휘했던 최운산 3형제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할머니와 아버지는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함께 투신한 것을 설명하면서 넷째 명철은 나이가 어려 형님들의 심부름이나 했을 뿐이라고 표현했다. 형제라도 주요 멤버가 아니니 선을 긋는 고지식함이다. 몇 년 전 최운산 장군의 집에서 마굿간을 관리하던 마부였던 분이 봉오동 주민의 증언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형님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활약한 <대한북로독군부>의 전략가인 참모 최치흥은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하셨다. 너무 안타깝고 죄송한 일이다.

▲ 3형제의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오른쪽 최치흥은 그 아들의 사진을 붙인 것

셋째 치흥(명순)은 어릴 때부터 개구쟁이로 소문난 분이었다. 집에 놀러온 이웃들의 바지를 벗겨버리는 장난은 다반사, 식구들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가깝고 먼 친척들까지 명순에게 골탕 먹지 않은 이웃이 없었다. 예전엔 부엌이나 광에서 가끔 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년 명순은 뱀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집 주변에 뱀이 나타나면 쫓아버리지 않고 꼭 한 두 대씩 때리며 데리고 놀다가 놓아주곤 했다. 어느 날 증조할머니 전주이씨 부인이 부엌문을 여니 뱀이 바닥에 가득했다고 한다. 깜짝 놀란 증조할머니는 이게 모두 셋째의 장난 때문에 동네 뱀들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임을 직감하고 정한수를 떠놓고 아들 대신 용서를 청했다. 그렇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자 얼마 후 뱀들이 하나둘 떠나갔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개구쟁이 명순의 면모를 드러내는 재미있는 일화로 가족들이 자주 공유했던 에피소드다.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가 중국군에 함께 복무할 때 첫째 명록(진동)은 喜(희)라고 불렀다. 지나치게 근엄하고 무게를 잡는 명록에게 좀 웃으면서 지내라는 의미로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둘째인 명길(운산)은 豊(풍)이라 불렀다. 긍정적적이고 너그러운 성품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최운산 장군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셋째 명순(치흥)은 興(흥)이라고 불렀다. 주변사람들 모두를 웃게 만드는 재주를 지닌 가장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란 것이 드러나는 이름이다.

할머니는 바로 아래 시동생 명순(치흥)을 특별히 아끼셨다. 늘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설명을 더 붙여서 말씀하시곤 했다. 명순도 둘째 형수를 잘 따랐고 두 분이 서로 잘 통하셨던 것 같다. 두 분의 관계를 상상해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첫째 며느리인 최진동 장군의 부인은 아들을 셋, 딸 둘을 낳았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인 할머니 김성녀는 계속해서 딸만 낳았다. 딸이 넷이나 되자 할아버지는 첩을 들이라는 집안 어른들의 요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적당한 사람을 찾아 집을 마련해주고 돈과 패물 등을 보내주고 첩을 냈다.

그런데 최운산장군이 그 여인을 만나러 가기 직전, 명순(치흥)이 그녀를 찾아갔다. "우리 형수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아느냐고, 우리 집안에 들어오면 우리 형수 때문에 앞으로 편히 살기는 힘들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명순은 그 여인에게 이미 받은 재산을 챙겨서 떠날 것을 종용했다. 만주 독립전쟁의 전략가인 최치흥이 어떻게 설득을 했는지 그녀는 정말로 재물을 챙겨서 그 곳을 떠났다. 최운산 장군이 첩실을 두는 일은 명순ㅇ로 인해 전격 취소되었고 김성녀 여사도 마음고생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다섯째로 태어난 첫아들이 아버지 봉우다. 할머니 김성녀 여사는 둘째 아들(봉학)까지 낳고 나서야 그 부담에서 벗어나셨다. 46세에 늦둥이 막내아들을 낳은 김성녀 여사는 막내아들의 이름은 당신이 직접 짓겠다고 당당하게 남편에게 이야기하였다. 이상주의자 최운산장군이 지은 두 아들의 이름이 鳳羽(봉우), 鳳鶴(봉학)이었지만 김성녀 여사는 다른 선택을 하셨다. 당시 최운산장군의 휘하에 있던 독립군 중 金浩石 대장이 제일 멋진 분이었다. 김성녀 여사는 막내아들의 이름을 호석이라고 지었다.

최운산장군은 머리 좋은 동생 치흥(명순)을 학교에 보내고 좋은 스승을 초빙해 공부를 시켰다. 어린 시절 가정경제를 돕느라 배움을 놓친 형님 최진동장군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기 때문이다. 최측근 외에는 가까운 부하들도 최진동장군이 글을 모른다는 것을 몰랐다. 동생의 극진한 배려와 동행으로 최진동장군은 불같은 성격의 카리스마와 위엄을 갖춘 지휘관의 면모를 마지막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많아 늘 주위의 주목을 받았던 셋째 치흥은 봉오동전투를 비롯한 항일 무력전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충실히 해냈다. 봉오동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을 유인하여 봉오동 계곡으로 들어오게 하는 등 작전에서 이미 일본을 능가했다. 최치흥은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전했으며 연해주에서 만주독립군이 와해되는 자유시참변의 고통도 함께 겪었다. 그러나 형님들과 함께 절망하지 않고 다시 독립군을 모아 사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동참했다. 특별히 이 시기 최치흥은 북간도 흑룡강성 농촌에 장기간 머물면서 아편 농사를 짓는 농부로 위장하고 독립군의 군자금 운반 및 연해주와 만주를 연결하는 비밀연락책으로 활약했다.

▲ 6촌 동생(왼쪽)과 함께 우리 3형제가 고향 봉오동을 방문했다.

독립투사 최치흥은 아직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로 서훈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후손들이 모두 연변에 살았던 탓이다. 중국이 문화혁명기를 지날 때 최치흥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 유명한 최진동 최운산의 동생이라는 것이 알려지는 게 두려웠다. 자식들에게 할아버지 최명순이 독립투사 최치흥이란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손자들은 할아버지 최치흥의 역사를 모른 채 성장했고 세월이 흘렀다.

목숨을 걸고 무장투쟁에 나섰던 만주 독립군은 대부분 만주와 연해주 등 독립전쟁의 현장에서 순국하셨다. 후손들이 연변에 살고 있어도 선조들의 치열했던 삶과 분투를 증명할 방법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수천의 무장독립투사들 중 극히 일부만이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있다. 역사자료에서 발견한 최운산 장군의 친척들도 있지만 아직 서훈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2015년 봉오동 방문 때 연변에 살고 있던 셋째 할아버지의 손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6촌 형제들 중 두 여동생이 이미 한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로 교류가 없던 탓에 한국에 들어온 것을 몰랐다. 다른 친척도 없는데 같은 서울에 살면서 모르고 지냈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6촌들은 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은 후에야 할아버지 최명순이 독립투사 최치흥이란 것을 알았다. 같은 동네에 살던 최진동장군의 손자들이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한국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서야 할아버지 3형제의 역사를 알게 된 것이다. 아직 살아계신 고모(최치흥의 딸)가 그때서야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그들은 이제야 다시 가족사를 돌아보고 있다. 그들이 몰랐던 선대와 가문의 역사를 6촌인 우리가 전해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 최운산장군의 집터에서 최치흥의 손녀(맨 왼쪽)와 나, 최진동의 외손자 부부, 작은오빠와 함께

그러나 6촌 동생들은 당당한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할아버지 최치흥 장군이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독립투사 최치흥의 손녀들은 10여 년 전 취업을 위해 거액의 수수료를 브로커에게 지불하고서야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6촌들은 아직도 조선족 가사도우미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제야 우리를 만나 할아버지 최치흥의 독립유공자 서훈신청서를 다시 제출했다. 그러나 보훈처의 서훈 기준은 여전히 벽이 높다. 최진동 장군, 최운산 장군과 함께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에 기여한 전략가 최치흥은 지난 2년 동안 보훈처의 서훈심사기준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보훈처는 그 독립투사 최치흥과 오늘 서훈을 신청한 이 최치흥이 동일인이라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훈심사에서 탈락시켰다고 한다. 우리가 6촌을 가짜로 세운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100년 전 만주에서 모든 가산을 바쳐 무장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독립전쟁을 준비한 3형제의 분투를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오늘이라면 독립투사 최치흥의 이름을 이렇게 오래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