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430~436일

초겨울 북방의 나라 러시아 국경을 넘는 버스 창문을 뚫고 따뜻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온다. 한국에서는 이미 수명을 다해 사망신고가 내려졌을 버스가 이곳에서 환생해서 한국 학원광고가 그대로 남아있는 채 패어진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낯설다. 국경을 통과하고 끝없이 펼쳐진 갈대 우거진 벌판을 달릴 때 버스 안에서는 영혼의 끝자락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것 같은 러시아 음악이 감미롭게 흘러나온다.

▲ 11월 7일 단동을 떠나기 전.... 압록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단둥에서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마음이 못내 착잡하다. 분단의 나라에서 태어나 그곳 뒤틀린 환경에서 자라고 나이 들어간 사람에게는 슬픔과 허망함은 오히려 친숙한 것이다. 나는 에둘러 그리움을 찾아 나선다 했고, 할아버지 성묫길이라 했고, 아버지와 화해의 길이라 했고, 고행의 수도 길이라 했다. 또 세상을 만나보는 여행길이라 했지만 혁명의 기가 흐르는 항일 무장투쟁의 본거지인 만주벌판을 순례하고 이제 다시 연해주로 넘어가면서 내 몸 깊은 곳에서 뜨겁게 끓는 혁명가의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가족사와 국가 역사란 언제나 얽히고설키게 마련이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나는, GPS 자동항법장치에 의해서 어머니 강을 찾아가는 연어처럼, 뭔가 모를 힘에 빨려 들어가는 아뜩한 느낌을 받는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 신식군인이었던 증조부가 김옥균 등의 갑신혁명에 실패하자 망명해있던 곳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가 가는 길에 황해도 송림에서 할머니를 만나 정착하고 그곳에서 해방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 후 할머니가 시집간 딸 하나 남겨두고 아들 5형제를 손에 잡고, 등에 업고 내려오셔서는 영영 되돌아가지 못하고 통한의 세월을 살다 돌아가셨다. 남북한과 러시아의 삼각협력을 통해서 동북아 공동번영의 전진기지가 될 연해주는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전후부터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하여 항일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기도 하다. 특히 우수리스크는 내가 유라시아 마라톤을 시작한 이준열사 기념관과 관계가 있다.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특사를 한 대한광복군 정부 대통령 이상설이 활동한 무대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현재 크라스노스트에서 12명의 비밀 결사체 ‘동의 단지회’를 조직하여 왼손 무명지를 끊고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썼다.

단둥에서 연길까지는 고속열차를 타고 연길에서 하룻밤을 잔 후 아침 7시에 우수리스크 행 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약 20여 명이 탔다. 훈춘에서 한 번 멈췄는데 옛날에는 러시아 보따리 장사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고 한다. 바로 옆 건너편에는 아까 버스표를 살 때 도움을 준 조선족 여자가 앉았다. 사람이 많지 않아 듬성듬성 앉았다. 중국 국경을 넘을 때 버스에서 각자 자기 짐을 가지고 내려서 짐 검사를 받았는데 간단한 수속으로 끝났다.

▲ 11월 11일 우수리스크에 도착해서 원불교 후원자와 함께

러시아 국경에 들어가서 입국카드를 적고 있는데 북한 사람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영어 글자를 모르는데 대신 적어달라며 자신의 북한 여권을 내 손에 쥐어준다. ‘1959년 생, 김명국’ 여권번호 등을 적고 국가이름을 적는 난에서 여권에 새겨진 국가명을 바로 찾지 못하고 “국가 이름이 뭐죠?”하고 묻는 촌극을 벌였다. 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당연히 “조선이요.”하고 대답하고 난 “그것 말고요!” 하며 내 것의 ‘Republic of Korea’를 보여주다가 곧 그의 여권에서 국가명을 발견하였다. ‘DPR Korea’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단체여행객으로 보이는 일행과 러시아인 몇 명이 내리고 나니 이젠 버스에는 한민족 혈통의 사람만 6명이 남았다. 나와 중국에서 청바지 공장을 한다는 젊은 사람이 남쪽 사람이고,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 북쪽 사람이고, 우수리스크에 사업차 자주 간다는 조선족 한 명이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도 되어서 나는 준비해간 초코파이 한 상자를 열어서 “이것 좀 드세요!”하고 두 개씩 나누어 주니 다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더니 내가 이거 남쪽 과자니 “맛 좀 보세요!”하고 말하니 마지못한 척 받아든다.

▲ 11월 11일 우수리스크에서

10시간 정도 가는 6명이 탄 좁은 버스 안에도 알 수 없는 3,8선은 있어서 서로 말을 섞지 않는다. 나는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내 소개를 간단히 하면서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을 소개하였다. 금방 젊은 남쪽 사람은 인터넷으로 나를 검색하더니 “와 대단하세요!” 한다. 조금 전 내가 입국카드를 대신 작성해주었던 김명국씨가 “정말입네까? 그걸 어떻게 증명합네까?”하고 묻는다. 나는 손목에 찬 GPS시계를 보여주며 이것을 스마트폰에 연결하면 지도에 내가 뛴 거리, 시간, 날씨 등 모든 정보가 나온다고 설명을 해주니 고개를 끄덕인다.

작은 마을에서 간식도 사고 용변도 볼 수 있게 버스가 멈추었다. 화장실을 찾아갔다가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다. 15루블을 내야하는데 환전을 못해 러시아 돈이 하나도 없다. 다시 나오면서 “화장실에 돈을 받네요. 어디 으슥한 곳이라도 찾아야겠어요.”하며 투덜거렸더니 지금껏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북쪽 사람이 “이리 따라오시라요!”하며 돈을 대신 내주어서 용변을 아주 특별히 시원하게 보았다. ‘통일 용변’의 시원함은 가슴까지 시원했다.

내리면서 북쪽 여자도 내게 “꼭 평양 거쳐서 서울로 달려가시길 빌겠습네다.”하며 응원 말을 남기고 간다. 이렇게 남과 북이 만나 많은 작은 통일을 이루어내어 큰 통일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 11월 12일 우수리스크에서

나는 어쩌면 돈키호테보다도 더 무모하게 뚜벅뚜벅 달리면서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동맥경화에 걸린 어혈을 풀어주고 평화의 시대, 상생·공영의 혁명을 꿈꾸었다. 나는 넘어지고 깨지고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더 결기를 다졌다. 이 일은 포기할 수도 없고 새 세상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함께해주고 마음을 모아 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그 길을 묵묵히 달려갈 것이다. 언제나 슬픔과 허망함에서 더 큰 희망과 용기가 나온다.

▲ 11월 12일 우수리스크에서 과거 독립운동가들 모습 같다.

* 평화마라톤에 대해 더 자세한 소식을 알고 싶으면 공식카페 (http://cafe.daum.net/eurasiamarathon)와 공식 페이스북 (http://facebook.com/eurasiamarathon), 강명구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kara.runner)에서 확인 가능하다. 다음카카오의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8063)과 유라시안마라톤조직위 공식후원계좌(신한은행 110-480-277370/이창복 상임대표)로도 후원할 수 있다.

[편집자 주] 강명구 시민통신원은 2017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년 2개월간 16개국 14,500km를 달리는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시작했다. 그는 2년 전 2015년, '남북평화통일' 배너를 달고 아시아인 최초로 미대륙 5,200km를 단독 횡단한 바 있다. 이후 남한일주마라톤, 네팔지진피해자돕기 마라톤, 강정에서 광화문까지 평화마라톤을 완주했다. <한겨레:온>은 강명구 통신원이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달리면서 보내주는 글과 이와 관련된 글을 그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날까지 '[특집]강명구의 유라시안 평화마라톤'코너에 실을 계획이다.

사진 : 강명구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강명구 주주통신원  myongkuk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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