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의 슈바이처 항일독립지사 이태준

1. 영화 『밀정』에 등장하는 마자알! 그러나 이태준은 없었다!!

2016년 개봉돼 750만 명이 넘게 본 영화 『밀정』은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 계획을 시대 배경으로 한다. 일명 '황옥 경부 사건'으로 불리는데 여기엔 폭탄제조기술자 헝가리인 마자알이 등장한다. 연계순(현계옥, 한지민 분)과 부부로 위장한 채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경성역에 도착해 일본 제국경찰과 총격전을 벌이지만 사실과 다른 허구일 뿐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실체는 마자알이 폭탄을 운반하는 데에는 참여하지만 국내에 잠입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반 도중 사전에 비밀 누설로 거사 직전 의열단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영화 속에선 마자알과 부부로 등장하는 연계순(한지민 분) 역시 경성역 총격전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장면 역시 허구이다. 연계순은 상해에서 폭탄제조기술자 마자알과 부부로 위장한 채 양옥집에 거주하지만 직접 총을 휴대한 채 폭탄을 들고 경성에 잠입하진 않았다. 실제 인물은 현계옥으로 대구 출신 열혈혁명지사였다. 나중에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공산주의자가 된다.

여기서 폭탄제조기술자 마자알을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소개시켜 준 인물이 오늘 이야기할 항일독립운동가 대암(大岩)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김원봉을 만날 당시 몽골 고륜(오늘날 울란바토르)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이란 병원을 차린 의사였다. 이태준이 김원봉을 만나는 장면은 매우 우연한 일이었다. 레닌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으로 건넨 자금 일부를 상해로 전달한 뒤 북경을 거쳐 장가구-고륜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귀행 도중 이태준은 북경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조우했던 것이다. 1920년 당시 이태준과 김원봉의 만남은 서로에게 항일독립을 향한 불타는 의지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조우한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은 1919년 11월 의열단을 창단하고 1920년 제1차 대암살 파괴 계획을 실행하지만 실패한다. 거사 직전 내부 밀고로 국내에 잠입한 의열단원 대부분이 피검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자신들이 확보한 폭탄이 결정적인 순간에 불발되면서 너무 큰 희생을 치렀다. 실제로 2015년 개봉돼 1200만 관객이 넘게 본 영화 『암살』의 후반부에서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은 촛불을 켜놓고 앞서간 영령들을 위로하면서 너무 많은 동지들이 죽었다고 회한에 찬 대사를 읊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의열단원들의 희생이 컸다.

결국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 동지들의 희생을 줄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탄제조에 뛰어난 기술자를 수소문 끝에 3명을 소개받는다. 이탈리아인, 오스트리아인, 독일인이 바로 그들인데 그 중에 독일인이 만든 폭탄이 비교적 우수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뛰어난 폭탄제조기술자를 잘 알고 있던 이태준이 김원봉을 만난 것이다. 이태준은 북경 시내 어느 요정에서 김원봉을 만났고 강령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헝가리 출신 애국청년 마자알을 김원봉에게 소개하기로 약속하고 몽골로 돌아갔다. 마자알은 헝가리 출신 애국청년으로 이태준의 자동차를 운전했던 운전기사였다.

2. 의사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이태준은 누구인가?

이태준은 경남 함안군에서 1883년 태어났다. 당시 함안 시골에는 기독교 교회가 있었고 이태준은 이 곳 교회를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태준이 23세 되던 해인 1906년 부인이 사망하자 어린 두 딸을 남동생 이태식에게 맡기고 서울로 올라왔다. 상경해서 이태준은 제중원(세브란스 병원) 앞에 위치한 '김 형제상회'에서 일했다. 김 형제상회는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인 김필순이 경영하던 곳으로 안창호 등 항일독립지사들의 비밀아지트였다.

실제로 안창호는 서울 올 때마다 제중원(세브란스 의학교)에서 일하던 김필순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곤 했다. 그런 사실은 안창호가 미국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 내용 속에 나온다. 김필순과 안창호는 1878년생 동갑내기이자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매우 각별했다. 김필순이 다섯 달 먼저 출생하였기에 안창호를 동생으로 대했다. 김필순 역시 1907년에 상동감리교회 지하실에서 전덕기, 안창호, 양기탁, 이회영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에서 활동하였다.

김필순의 매제가 우사 김규식이고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김필순의 조카이다. 1930년대 중국에서 영화배우로 중국인의 우상이 된 김염은 김필순의 셋째 아들이다. 김염은 일제를 선전하는 홍보영화 출연을 거부했던 반파시스트 항일 전사였다. 1930년대 상해 영화계를 풍미하며 영화 황제로 우뚝 섰지만 김염은 견결한 항일의식을 잃지 않았다. 김염의 여동생 김위 역시 한 때 연예계에 발을 들여 놓지만 항일의식 또한 매우 높았다.

모두 다 한평생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쳤던 아버지 김필순의 뜻을 이어받은 모습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의 영향이었다. 김위는 조선의용대 시절 김학철(본명 홍성걸)이 고백한 사랑에 퇴짜를 놓았던 조선의용군 항일여전사이다. 김학철은 해방 후 『격정시대』, 『20세기 신화』, 『최후의 분대장』을 쓴 연변작가로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김학철은 김위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그녀로 인해 심한 가슴앓이를 한다. 결국 절친인 김학무 조선의용대 정치위원에게 실연의 고통을 호소한다. 비록 조선의용대 항일전사로서 20대 혈기왕성한 청춘남녀이지만 사랑 앞에선 마음이 크게 흔들렸던 것이다.

▲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구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 창립기념사진.사진 맨 앞줄 오른쪽 여성이 김필순의 딸 김위이다. 김위는 조선의용대 제2지대 항일여전사였다. 김위 왼쪽 옆에 있는 여성은 조선의 콜론타이 허정숙이다. (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김학무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김학철의 손을 잡아 주며 위로를 대신하며 친구의 아픔을 함께 했다. 김학무는 윤봉길과도 절친이었다. 둘은 좌우 이념이 달라 격한 논쟁 끝에 김학무가 인터내셔널가를 힘차게 부르면 윤봉길은 애국가를 부르며 맞대응하곤 했다. 윤봉길은 1932년 상해 홍구 공원에서 일본군 상해 수비대장을 폭살시켰다. 김학무는 1944년 태항산 반소탕전에서 일제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위는 가창력이 뛰어나 조선의용대 제2지대 여성대원으로 대일본 선무공작활동을 벌였다. 항일여전사 김위는 1940년대 태항산 시절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장인 김창만과 부부 사이가 된다.

1911년 일제는 105인 사건을 테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으로 조작, 날조했다. 평양 등 서북지역 항일 기독교인과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러자 지하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 활동을 하던 김필순은 체포를 피해 황급히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곤 서간도 통화현 신흥무관학교로 망명을 떠난 것이다. 1911년 12월 31일의 일이었다. 김필순 망명 당시 이태준은 경성역까지 김필순을 동행하며 배웅했다. 그리고 세브란스의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태준은 병원 내 널리 퍼진 소문에 즉각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소문인즉 김필순과 이태준이 중국으로 망명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태준은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 학생 시절 안창호로부터 비밀지하결사조직에 가입을 권유받았다. 신민회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한 것이다.

따라서 병원 내에 널리 퍼진 소문에 깜짝 놀란 이태준도 김필순을 따라 황급히 평양행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중국 난징으로 망명 직후 이태준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언어마저 통하지 않아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중국 기독교인의 도움으로 '기독회의원'에 취직하여 안정된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한 중국 인사들과 교류하거나 신해혁명에 참가한 조선인 유학생들과 조우하며 항일의식을 키웠다.

3.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의 항일운동

그러던 차에 처사촌인 우사 김규식의 권유로 중국 생활을 접고 1914년 몽골 고륜으로 이동해 병원을 개업했다. '항일독립운동에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로 병원 이름을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 지었다. 김규식은 김필순의 매제로 해외독립군 무관학교 건설을 위해 이태준을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제의 러시아, 몽골지역 진출 등 국제정세의 변화로 독립군 무관학교 건설이라는 큰 뜻을 이루진 못했다. 무엇보다 독립군 무관학교 건설을 위해 약속된 운동자금이 들어오질 못했기 때문이다.

▲ 우사 김규식과 아내 김순애 김순애는 의사면허 1호 김필순의 여동생으로 김규식은 김필순의 매제가 된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이태준에게 몽골에서 의사로서 지낸 6년간(1914-1921)은 몽골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크나큰 선물을 안겨다 주었다. 당시 몽골 국민들 사이에 번진 전염병을 치료하고 국민의 70-80%가 감염된 성병을 치료하는 데 이태준의 근대의학은 탁월한 빛을 발했다. 매독 균이 성대를 침범해 목소리를 잃어버린 몽골 인들에게 이태준의 의술은 목소리를 다시 되찾게 만들어주었다.

당시 근대의학의 산물이 동양으로 전파되면서 에를리히(P. Erlich)가 발명한 매독치료제 살바르산이 이미 상용화한 시절이었다. 이태준은 몽골 국민들로부터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로 추앙받았고 '신인(神人)'으로 존경받았다. 이태준은 몽골 마지막 국왕 보그드 칸 8세의 주치의가 되어 왕실과 왕족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하여 몽골 국왕은 1919년 7월 이태준에게 '귀중한 금강석'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에르데닌 오치르'라는 국기훈장을 수여했다.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등급의 훈장이었다. 그러나 이태준은 한시도 조국의 독립과 항일의지를 외면한 적이 없었다. 의사로서 현실에 안주하며 사회적 존경 속에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중국 북경에서 몽골로 넘어가는 길목인 장가구와 고륜을 넘나드는 항일독립지사들의 안식처로 자신의 병원을 내주었다.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표현이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였다. 동의의국에 몇 개월 기식했던 항일독립지사 이강훈의 회고에 따르면 매일 40~50명의 항일독립지사들이 이태준의 병원을 찾았고 숙식을 해결했다고 한다. 동의의국(同義醫局)은 항일 독립 운동가들에겐 중국에서 몽골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가는 거점이자 중간 기착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태준은 죽음도 불사하는 열정과 의지로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모스크바로부터 건네받은 독립운동자금을 북경을 거쳐 상해로 비밀리에 운반했던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이었다. 또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이후 이태준은 의열단에 가입하고 의열단 활동에 적극 협력했다.

1914년 가을 몽골로 이동한 이태준은 몽골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당시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으로 주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인사회당은 아시아 최초이자 한국 최초로 건설된 사회주의 정당이다. 이동휘, 김립, 김알렉산드라, 박애, 박진순, 이한영 등이 중심이 되어 창당했다. 당원 수도 많지 않고 코뮤니즘에 대한 이론적 깊이도 약했다. 그러나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에 가입한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볼세비키 정권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받았고 식민지 해방운동 자금 또한 획득했다. 약속 받은 독립운동 자금 200만 루블 가운데 1차 40만 루블에 해당하는 금괴를 운반하는 데 이태준이 관여한 것이다. 금괴를 운반한 박진순과 한형권은 총을 쥔 채 금괴 상자 위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운반했다.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 가운데 김립이 12만 루블을 몽골을 통해 상해로 운반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한형권과 박진순이 운송하기로 했다.

이태준은 김립의 12만 루블 가운데 먼저 1차분 8만 루블을 한인사회당원 조응순과 함께 몽골 고륜을 거쳐 장가구, 북경, 상해로 무사히 운반하였다. 1920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다시 2차분 금괴 4만 루블을 가지러 고륜으로 돌아가던 길에 북경을 들렀을 때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났던 것이다. 김원봉과의 만남에서 이태준은 의열단의 강령에 흔쾌히 동의하여 입단하였다. 그리고 폭탄제조기술자 헝가리인 마자알을 북경으로 데려 오겠다고 약속한 후 헤어졌다. 그러나 1921년 초 몽골 고륜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중국군대는 러시아 반혁명파인 '미친 남작'운게른 스테른베르크가 이끄는 백위대에 의해 점령당한다. 백위대에 점령된 고륜 지역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학살과 중국 상점, 그리고 은행에 대한 약탈이 자행되었다.

1921년 초 마자알은 고륜과 장가구를 오가던 독립지사들을 자동차로 태워주었던 인물이다. 이태준은 마자알과 함께 금괴 4만 루블을 갖고 상해를 향해 북경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백위파 부대에 참모로 활동하고 있던 일본군 장교 요시다(吉田)에 의해 이태준은 백위파의 추적을 받고 북경으로 오던 도중 중도에 체포돼 다시 고륜으로 압송되었다. 이태준은 일제 첩보에 의해 독립운동을 꿈꾸던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이미 낙인찍힌 상태였다. 러시아 혁명세력과 연계돼 한인사회당 당원으로서 혁명자금을 운반하던 일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태준이 운영하던 동의의국 병원이 항일애국지사들의 중간 기착지였음도 밝혀졌다. 이태준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38살 젊디젊은 나이였다.

▲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이태준은 의열단원이자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이었다. 모스크바 독립운동자금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 가운데 일부를 북경을 거쳐 상해까지 운반했던 항일독립운동가였다. 이태준의 자동차 운전기사가 폭탄제조기술자인 헝가리인 마자알이다.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마자알을 소개해준 인물이 이태준이다.(사진출처 : 이태준 선생 기념사업회)

4. 교과서에 기록해야 할 항일독립지사 이태준

의사로서 이태준의 숭고한 봉사와 헌신 그리고 항일독립지사로서 열정적인 활동과 죽음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로 전락한 암울한 현실에서 이태준은 좌절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의사로서 독립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항시 고민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사 교과서엔 이태준에 대해 단 한 줄도 기술돼 있질 않다. 교과서엔 의사(醫師) 출신 독립운동가가 거의 전무할 정도이다. 일반 국민들 역시 이태준을 잘 모른다. 몽골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 이태준은 그동안 망각의 인물이었다. 해방공간 월북한 작가 이태준은 알아도 의사 출신 항일독립지사 이태준은 생소하기 그지없다.

다행이 몽골 정부는 2007년에 울란바토르 2000평 땅에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공원 입구에는 한국어 안내 표지판이 있는데 거기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태준 선생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선생은 1914년 울란바토르로 이동하여 상해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운반하고 의열단 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선생은 또한 인술을 베풀어 당시 몽골에 만연해 있던 질병을 퇴치하여 1919년 몽골 정부로부터 '에르덴 오치르' 훈장을 받았다. 선생은 1921년 러시아 백군에 의해 피살당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국과 몽골 정부는 독립 운동가이며 위대한 의사인 이태준 선생의 고귀한 삶을 기리기 위해 2007년 7월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그의 삶과 죽음의 발자취가 시대를 초월하여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헌신과 삶의 치열함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우리의 집단적 망각 속에 교과서에 한 줄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몽골 여행을 가서야 '이태준' 이름 석 자를 알게 되고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후손된 도리가 아닐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사회정의가 가물거리는 것은 역사정의가 좌절된 때문이다. 하루 빨리 한국사 교과서에 성의(聖醫) 이태준 선생의 삶과 죽음의 치열한 자취를 기록하여 자라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이태준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주주통신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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