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을 이야기하고 싶어 1년 전에 본 영화 ‘노예 12년’을 끄집어냈다.

‘노예 12년’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하다. 1840년대 미국은 노예 수입을 금지했다. 북부는 노예제도를 폐지했지만, 남부는 달랐다. 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내세워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노예수입 금지로 남부에 노예를 공급하는 게 어려워지자 노예 상인들은 북부에서 자유롭게 사는 흑인들을 납치해 남부로 팔아넘겼다.

사진출처  :한겨레신문(https://www.hani.co.kr/arti/PRINT/826279.html)
사진출처 :한겨레신문(https://www.hani.co.kr/arti/PRINT/826279.html)

바이올린 연주가 솔로먼 노섭은 뉴욕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섭은 백인에게 속아 워싱턴으로 연주하러 갔다 납치돼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노섭은 ‘플랫’이란 이름으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수차례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다가 12년 만에야 자유의 몸이 된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극적인 장면 없이 흑인들의 노예생활을 있는 그대로 세세하게 보여준다. 한국 사회가 소름 끼치도록 몰상식한 사회로 간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영화 속 인간의 모습과 그 인간이 만든 제도의 모습이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섭은 12년간 노예생활을 하면서 2명의 주인(포드와 엡스)을 만난다.

첫 번째 주인인 포드는 흑인을 학대하진 않아 인간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는 노섭이 납치된 자유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노섭을 사기 위해 낸 돈에 묶여 노섭의 권리는 모른 척한다.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위치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섭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법'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 상식과 윤리를 저버렸다 할까? 그러면서 성경 말씀은 열심히 설파한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예의와 미소 뒤에 있는 고통 받는 시커먼 양심 때문에 지옥에 사는 인간이다.

두 번째 주인인 엡스는 포드보다 노골적이다. 그는 흑인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흑인에 대한 연민도 없다. 엡스는 흑인에게 과도한 일을 시키는 것을 넘어서 병적으로 집착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괴롭히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행동해도 늘 떳떳하다. 인간이라면 양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왜 그럴까?

그는 ‘노예법’이라는 것을 내세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며 노예 학대를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법이 한 인간을 악마가 되는 길로 이끈 것이다. 이런 주인과 살면서 노섭은 깊이 절망하게 되고 무력감에 빠진다.

그때 캐나다인 목수, 베스가 나타난다. 베스는 노섭이 자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노섭이 노예에서 해방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베스는 왜 그런 일을 했을까? 영화에서 베스가 한 말에 그 답이 있다. ‘노예제도가 합법이기에 자신이 흑인을 사람 취급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엡스에게 베스는 이런 말을 한다.

“법이 보편적 진리보다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평등하며 아무도 사람을 사고 팔 권한은 없습니다. 이것이 보편적 진리입니다. 이 보편적 진리가 정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법치주의 국가에 산다. 보편적 진리는 잊어버리고 법으로 사회를 유지시키는 세상에서 산다. 애초에 사회의 문제는 법 이전의 상식, 즉 보편적 진리로 해결됐다. 이 보편적 진리로는 해결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것이 법이다. 하지만 지금의 법은 보편적 진리 위에 있다. 법 속에 정의가 아닌 불의가 숨어있을지라도 법이 우선된다. 특히 힘없는 자들에게 법은 정말 지독하리만치 엄격하다. 똑같은 죄여도 법은 없는 자에게 가혹하고 있는 자에게는 너그럽다. ‘노예법’의 아류가 판치는 세상에서 보편적 진리는 사라져 버렸다.

바로 지금, 대한민국에는 법 이전의 상식, 즉 보편적 진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진행하는 국가사업이 있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 사업이다.

강정은 해군기지 후보군에도 들어가지 못한 곳이다. 해군은 2002년 해군기지의 최적지로 '화순항'을 선정했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포기했고, 2005년 9월경 위미로 변경해 추진하다가 또 주민들의 반대로 포기하게 됐다.

그러던 2007년 4월 26일, 87명이 모인 강정마을 임시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해군기지 유치결의가 이뤄진다. 그리고 일주일 만인 2007년 5월 3일 도민 여론조사가 속전속결로 실시된다. 결론은 찬성 48%, 반대 44%. 이에 도지사는 주민 다수가 찬성한다는 이유로 2007년 5월 14일 강정해군기지 유치결정을 발표한다.

강정마을은 인구가 1,900명 정도, 투표권자는 1500명 정도 된다. 그런데 단 87명만이 비공개적으로 모여 해군기지유치결의를 했다. 이 결의가 상식적인 것일까? 보편적인 과정을 거친 것일까? 초등학생이 봐도 이건 아니다. 그럼 국가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제정신 가진 국가라면 87명에게 야단을 쳤어야 했다. “에이 이 나쁜 사람들아. 니들은 사기꾼이냐? 주민들 몰래 투표하고 그걸 국가에 제출해?” 그렇게 혼쭐을 내고 유치결정을 돌려보냈어야 했다. 하지만 국가는 그러지 않았다.

2007년 8월 20일, 마을주민 725명이 참여한 ‘해군기지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 결과, 유효 투표수의 94%인 680명이 반대했다. 하지만 사법부는 87명이 참여한 결과를 유효하다고 판결해버렸다. 한마디로 국가가 법이라는 무기로 상식을 짓밟아버린 것이다. 국가가 깡패, 사기꾼의 짓거리를 법의 치마폭 속으로 감추어 받아들인 것이다. 그 사업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국가가 저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노예법은 폐지됐다. 그리고 그동안 세월이 흘러 새로운 법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악법들은 쉽게 물러갔을까? 절대 아니다. 170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 좋고 힘 있는 자들이 만든 유사 ‘노예법’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그 법에 악이 교묘하게 파고들어 인간의 공정한 삶을 파괴하는 짓을 끊임없이 자행한다.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들여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 가진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세상은 진보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느리게 갈지라도 굴러간다고 누가 그랬던가? 상식이란 것을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음에도, 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상식을 짓밟고 보편적 진리 위에 군림하니 인간 세상이 과연 진보하고 있는 것일까? 문명은 발달해서 번쩍번쩍 빛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아도 결국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법이라는 굴레에 자신을 내맡기고 눈치 보며 사는 꼴이다

많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쩔 거냐고? 이미 저렇게 돈을 들여 진행했는데 어쩔 거냐고?” 혹은 “국가안보를 위한 사업인데 강정 주민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이해하고 양보해야 한다고.” 그런가? 정말 그래야 하는가? 정말 그렇게 된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이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보편적 진리를 무시한 국가는 법이라는 칼을 들고 반드시 또 다른 국민들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운이 나쁘면 그 희생자는 나 혹은 내 자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 골목마다 나부끼는 해군기지 결사반대 깃발
김미경 주주통신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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