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

처음부터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단체 일정에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없던 계획이었다. 만약 가이드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었다.  “이제 호텔에 거의 다 왔습니다.”

▲ 러시아에서 유학 중이라는 앳된 얼굴의 한국인 가이드. 중간 중간 날리는 멘트가 센스가 있었는데 '이번에 훌륭하신 분들과의 진행에서 느낀 바가 많아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더 좋은 안내를 하도록 하겠다' 는 립써비스가 압권이었다.

버스가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가이드가 안내를 했다. 참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가이드였다. 공부하러 이곳에 와 있다는데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여느 관광객하고는 조금 다른 것도 같고, 하여튼 호감이 가는 친구였다.

“지금 왼쪽 차창으로 보시면 금강산 식당이라고 보일 겁니다. 북한 식당입니다. 술과 음식을 파는데, 저녁은 드셨지만 간단하게 술만 한 잔 하실 수도 있습니다.”

▲ 호텔 맞은 편에 있어서 저녁에 걸어서 갔던 북한 식당. 촌스러운 간판과 글씨가 오히려 정겹다.

그 비싸다는 대게를 그야말로 배 터지게 먹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북한 식당 이라는 말에 모두들 차창 밖을 내다봤는데, 길가에 촌티가 물씬 나는 간판에 북조선스러운 글씨로 금강산 식당이라고 쓰여 있었다. 순간 오래전 방콕에서 맛봤던 이름도 잊어버린 북한 술의 향기가 코 끝에 알싸하게 떠 올랐다.

그것도 인연인지, 일 때문에 가는 나라마다 북한 식당이 있었다. 태국의 방콕에도 있었고 북경 그리고 하노이와 호치민. . . 처음에는 호기심에 갔었지만 방콕 이외에는 음식이 별로 입맛에 안 맞고 음식값이 만족도에 비해 비싸서, 소위 가성비가 안 좋아서 하노이에서 마지막으로 간 뒤로는 가지 않았는데, 안 간지 십여 년이 다 되어 뜻밖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북한 식당을 만난 것이다. 호텔에 여정을 풀면서 몇몇이 개인적으로 술 한 잔을 하러 가기로 했다. 내가 안내하기로 하고 로비에 모였다.

“몇 가지만 주의하시면 대우받고 즐겁게 한 잔 할 수 있을 겁니다.”

“식당에 가는데 뭔 주의사항?”

▲ 뒤에 걸려 있는 '선녀도' 그림에서 금방 나온 것 같이 춤사위가 하늘스럽다.

나는 내가 그동안 북한 식당에서 경험한 일들과 같은 민족끼리라서 오히려 더 지켜야 할 예의같은 것을 간단하게 말했는데, 사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을 거 같아서 기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무개념인 몇 사람 때문에 전체 판이 깨지기도 하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쪽을 택했다. 내가 부탁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손을 잡고 ‘고향이 어디냐?’ ‘고생스럽지는 않냐?’ 는 둥 심지어는 ‘여기서 돈 벌어서 북한에 있는 부모한테 보내는 거냐?’ 는 등의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말 것. 절대로 손을 잡지도 말고 스킨쉽은 아예 하지 말 것.

2. 혹시 대화할 일이 있으면 가급적 북한 이라는 말 대신 북조선으로 하던지 아니면 그냥 북측으로 해 줄 것. 북한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의 ‘한’ 자를 기준으로 하는 말이니 조선을 국명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거북한 단어임.

3. 신기한 물건 보듯이 하지 말고 그냥 한국의 어느 식당에 있는 것 같이 편한 마음으로 대하면 됨.

사실 세계 각국에 있는 북조선 식당들은 한국 관광객을 상대하려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에 외화벌이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대표 식당들이었던 것인데 그런 나라들에 한국 관광객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가면서 관광객들의 호기심과 가이드들의 돈벌이, 그리고 손님 하나라도 아쉬운 북한식당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한국인들이 출입하게 된 것이다.

▲ 스탈린을 비판한 죄로 8년간 시베리아 노역형을 받기도 했으나 1970년 노벨문학상, 2007년 러시아 국가 문화 공로상을 수상한 러시아의 대문호 솔제니친의 동상. 극동함대와 어우러져, 러시아가 군사력 못지 않은 문화강국임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1997년의 어느 날, 방콕의 북한 식당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못한다. 술에 취한 남한 관광객은 쥐꼬리만한 권력 혹은 돈푼이나 있어 보였다. 태국 업체 직원과 좀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간 나는, 저녁 공연이 끝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여종업원을 붙잡고 그야말로 룸싸롱 버전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었다. 가끔 북한 종업원의 손을 잡고 딸이나 손녀 모드로 눈물이 글썽거리는 버전은 봤어도, 룸싸롱 버전은 말로만 듣고 직접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같이 온 일행들인 듯한 인간들은 웃으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급기야 북한 남자 매니저가 오고 시비가 커지고, 결국 태국 경찰이 출동해서야 막장 드라마는 끝이 났다. 그 날 이후, 내가 가 본 곳 중에 가장 맛있는 북한 식당에 다시는 가지 못했다.

▲ 무대 쪽에서 바라본 식당 전경.

하여튼 예방주사를 맞은 탓인지 모두들 정말 서울의 어느 식당에라도 온 듯 태연하게 북한 종업원들한테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사실 어쩌면 이제 북한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자체가 20 여년전의 태국과는 비교가 되질 않으니 관심 밖인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서너 명의 여성 종업원들의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보았으며 음식이 나올 때 쯤에는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술이 몇 잔 돌고 아니나 다를까 이요상 단장 특유의 통일 건배사가 시작되었는데 그녀가 ‘평화’ 하면 우리가 ‘통일’을 하거나 ‘통일’을 먼저하고 ‘평화’를 나중에 하는 식이었다. 나는 계산대가 보이는 쪽에 앉아 있었는데 북한 종업원들은 그 주변에 모여 서서 미소 띈 얼굴로 우리가 하는 양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마침내 ‘평화통일’과 ‘통일평화’가 마무리 되었을 때 나는 분명히 그녀들이 크게 웃으며 박수를 치는 것을 보았다. 그들과 우리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들어 낸 작은 통일, 작은 평화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처음 우리가 들어갔을 때 보았던 경계심은 반가운 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동안 여러 나라에서 북한 식당을 수십 번은 더 갔지만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이거 맛 있습니다. 더 드시겠습니까?”

나는 그녀의 가슴 어름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보았다. 박혜정 동무 . . . 하고 가만히 불러보았는데 그녀가 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났을 때라 하루 한차례 하는 저녁 공연을 보지 못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 날도 일정상 저녁을 북한 식당에서 먹을 수가 없다는 데 있었다. 식당측과 협상했고 이런 저런 요건들을 충족시킨 뒤에야 우리만을 위한 특별공연을 해주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모두들 우리에겐 사소한 그런 일들이 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몰랐을 것이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이십여 년전 방콕에서는 그 어떤 힘으로도 그런 특별공연을 하게 만들 수가 없었는데, 한 번은 방콕에서 공연료를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말했다가 면박을 당한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은 전체적으로 공지를 해서 이십여 명이 갔는데 사전에 어제 한 예방주사를 재방송 한 것은 물론이다. 뭐 그렇게까지 해서 가느냐는 핀잔은 들었지만, 핀잔을 듣는 것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무안한 꼴을 보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는 게 내 지론이다.

예상보다 많이 온 우리를 보고 반갑게 맞아 준 것은 어제 이미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반갑게 맞아 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안다. 그냥 어서오세요 하는 것과 반가운 마음이 얼굴에 번지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 . .

사실 북한 식당에 드나들 때도 공연은 잘 보지 않았었다. 협력업체 직원들이나 한국에서 온 사람들 접대하는 상황이 아니면, 매일 똑같은 내용으로 감동 없는 얼굴에 촌스런 화장으로 떡칠을 한 무표정으로 하는 공연은 그저 호기심으로 본, 한 번이면 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 갔던 북한 식당을 한 번 더 가자는 말에 나는 여러 번 보았다고 사양했는데 인솔자가 뭐 하는 거냐고 한 번 핀잔을 들은 후 마지 못해 조금 늦게 합석했다. 나로서는 어제 그것으로 만족했고 뻔한 공연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었다. 차라리 블라디보스톡 어느 구석엔가 있다는 멋진 바에 가서 순종 보드카나 홀짝이고 싶었다. 같이 가자는 일행도 있었는데 못 따라 가고 억지로 두 번이나 북한 식당에 온 것이었다.

▲ 북조선 동무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그들도 우리도 이때만큼은 빨갱이들도 아니고 미제국주의 앞잡이들도 아니었다. 그저 한민족 한겨레 가족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노래와 춤 그리고 짧은 연극이 시작되었다. 처음 노래가 시작될 때부터 ‘어라?’ 그 전에 듣고 보던 공연이 아니었다. 노래도 그 노래가 맞고 한복이나 어설픈 화장도 그 전과 여전히 같은데 . . .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그녀들은 진정으로 우리가 반갑고 흥겹고 좋은 것이었다. 누가 봐도 눈에 보이는, 그 전 무대에서는 보지 못했던 진정성이 있었다. 수없이 보았으되 생전 처음 보는 공연이었다. 노래 중간에는 그녀들이 우리 자리로 들어와 먼저 손을 잡고 무대로 이끌어 내더니 같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요를 부를 때는 우리 뿐 아니라 그네들의 눈가도 촉촉이 젖어갔다. 누가 그랬던가 . . .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 . .

▲ 공연도 술자리도 끝나고 마지막 기념 촬영. 맨 뒷줄 왼쪽에서 다섯번 째가 박혜정 동무이다. 딴데서는 쓰기 어려운 말, 우리가 잃어버린 '동무'라는 말을 실컷 쓰고 왔다.

예상 시간을 넘기고도 몇 잔을 더 하고 아쉽게 일어나 모두들 인사를 나누었는데 마치 오랫동안 같이 지내던 친구와 이별을 하는 느낌이었다. 길을 건너 호텔로 들어가는데 뒤를 돌아보니, 내가 빠지려고 꾀를 부릴 때 안 가면 안 된다고 호통을 치던 단장이 뒤에 오고 있었다. 나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안 갔으면 어쩔 뻔 했수 . . . .” (계속)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유원진 객원편집위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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