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봉오동 전투 100주년에 맞춰 영화 <봉오동전투>가 제작되어 8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5년 전 이 영화가 기획될 때 지인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 잘못 알려진 '봉오동 전투'의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영화제작사에 연락했다. 내가 만주 봉오동에서 무장독립군기지를 건설한 최운산 장군의 손녀라고,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역사적 사실이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가족사를 통해 전해진, 알려지지 않은 봉오동의 역사를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제작사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이미 시나리오가 완성이 되었다고, 역사적 사실을 건드리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몇 번 연락을 취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동안 감독이 바뀌기도 하면서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작년에야 유명 배우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촬영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드디어 개봉을 앞두고 홍보를 시작했다. 그런데 영화 홍보물을 보니 걱정이 되는 부분이 더 많아지고 있다. 특히 이 홍보 문구 '1920년 마지막 조선'이란 말은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설정이다. '봉오동전투'를 치른 독립군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 그들은 임시정부를 받아들였고, 공문에 대한민국의 연호를 사용했다. '마지막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첫 군대였다.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1920년 5월 19일, 북간도의 대소 독립군부대는 봉오동에 모여 대규모 통합군단이 창설되었다. 먼저 각 부대의 대표들이 18개 항에 합의한 “재북간도각기관협의회서약서”를 작성한 날이 “대한민국2년 5월3일”이다. 그리고 계속적인 논의를 거쳐 주력부대인 ‘대한군무도독부’와 ‘국민회’가 개별 부대의 명칭을 버리고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로 대통합을 이룬 날짜가 “대한민국2년 5월19일”이다. 만주의 독립군들은 이미 사라진 나라 조선을 되찾기 위해 총을 든 것이 아니다. 상해의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민초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을 함께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함께 뭉쳐 공화국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던 그들을 사라진 나라 조선의 이름으로 호명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봉오동 독립군들의 중심에는 최운산 장군이 1912년부터 훈련 양성한 사병부대가 1919년 임시정부 출범과 함께 대한민국의 군대로 재창설된 정예 무장독립군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가 있었다. 대통합군단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의 중심에 실전경험이 풍부한 정예군 “대한군무도독부”가 있었기에 우리 독립군은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1920년 3월 이후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군은 두만강변의 헌병대와 국경수비대 습격전을 비롯해 수십 차례의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했다. 국내외의 항일세력에게 용기를 주고 일제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봉오동전투>는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군과 싸우면서 봉오동으로 그들을 유인해오는 실제 봉오동 전투의 작전을 그렸다. 일본군이 봉오동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두만강변의 삼둔자에서, 안산에서, 봉오동에서 벌어지는 3일 간의 전투가 이 영화의 주요 스토리라고 한다. 99년 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 역사적 사실이다. 지속적으로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해 무장력을 구비했고, 3.1운동 이후 많은 청년들이 간도로 들어왔다. 늘어난 병력과 준비된 무장력으로 대규모 군사체계를 갖춘 만주의 독립군들은 일본 군대와의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화 <봉오동전투>의 주인공 배우 류준열과 유해진은 유인 작전에 투입된 독립군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실제 그 작전을 수행한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군과 신민단이 아니라 홍범도 장군의 부하들로 설정되었다고 한다. 빨치산들의 눈물겨운 사투를 그리는 극적 요소를 위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비틀었다. 당시 연해주에서 주로 활동을 하던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전투’ 직전인 5월에야 통합군단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에 합류했다. 이런 작전을 준비할 위치도,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이 영화 포스터처럼, 주인공들이 마치 빨치산처럼 보이는 이 모습은 그 자체로 커다란 왜곡이다. 당시 봉오동에는 8대의 미싱이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어 입힌 기록이 있다. 그리고 봉오동전투 후 일본군이 기록한 봉오동전투상보는 독립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적은 전부 러시아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도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거리 측량이 불확실한 7~8백미터 거리에서도 사격을 하며 지형을 이용해서 방어할 때는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또 용감하게 싸운다.”

봉오동에서 패한 후 기록한 일본 외무성 문서다.

“금회 다음의 사실을 확인하였다. 대안불령선인단은 정식의 군복을 사용하고 그 임명 등에 사령을 쓰며 예식을 제정하고 있는 등 전적으로 통일된 군대조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나측은 이를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제 경고를 줄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전투력에 놀라고 감탄하고 있다. 그리고 독립군의 활동을 보장하는 중국 측에 대한 불만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나 다큐는 대부분 질서 정연한 일본군대와 흐트러진 모습의 빨치산이란 눈물겨운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지만 그런 표현은 이제 그만 벗어나야 한다.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한 우리 독립군은 기관총과 대포를 구비했고, 뛰어난 사격술로 일본군을 압도했던 정예 무장군인이었다.

이 사진은 청산리전투 후에 찍은 거라고 알려져 있지만 아마  6월7일 봉오동의 승전을 기념는 사진 중 하나일 것이다. 봉오동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일본군대를 격파한 첫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축하 잔치를 벌이고 기념촬영을 했다. 청산리전투는 이동하는 과정에서 싸웠던 시가전의 성격이다.  이동 중 전투를 버리이고 또 이렇게 정식 군복을 차려입고 기념촬영할 여유도, 동반한 사진사도 업었을 것이다. 10월말,11월의 만주는 겨울이다. 코트를 입어야 하는 때다 당시 전투 후에 눈이 많이 왔다고 한다. 이렇게 코트도 없이 견딜 수 있는 날씨가 아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이 사진은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 후 찍은 사진이라고 짐작한다.
이 사진은 청산리전투 후에 찍은 거라고 알려져 있지만 아마  6월7일 봉오동의 승전을 기념는 사진 중 하나일 것이다. 봉오동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일본군대를 격파한 첫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축하 잔치를 벌이고 기념촬영을 했다. 청산리전투는 이동하는 과정에서 싸웠던 시가전의 성격이다.  이동 중 전투를 버리이고 또 이렇게 정식 군복을 차려입고 기념촬영할 여유도, 동반한 사진사도 업었을 것이다. 10월말,11월의 만주는 겨울이다. 코트를 입어야 하는 때다 당시 전투 후에 눈이 많이 왔다고 한다. 이렇게 코트도 없이 견딜 수 있는 날씨가 아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이 사진은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 후 찍은 사진이라고 짐작한다.

봉오동 전투는 신화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다. 봉오동의 독립군은 매일 실전처럼 연습을 했고 전쟁을 준비했다. 봉오동전투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일본군에 필적할 신형무기를 사용하는, 정식 군복을 입은 정규 군대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영화 <봉오동전투>가 아직 개봉 전이니 가능하다면 몇 가지 중요한 오류가 수정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 <봉오동전투>를 통해 역사의 이름으로 복원된 그날의 전투현장이, 그 역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를! 비록 한 편의 영화지만 그 시간을 통해 치열했던 당신들의 삶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기를! 영화의 성공을 기원한다.

편집: 이동구 에디터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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