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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①>'학생사'는 명절에도 문을 닫지 않았다

작성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 승인 2019.07.23  08: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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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삼양리 학생사 이태기씨
집 샀을 때와 자식 대학 합격했을 때 '가장 기쁜 순간'

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옥천신문이 지역 어른들의 인생을 함께 회고합니다. 정지환 객원기자가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구술을 정리해 지면에 담습니다. 
 
▲ 이태기씨가 지켜온 학생사는 이제 그의 막내 아들 종구씨가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학생사 내부에서 이태기씨와 아내 강난이씨, 아들 종구씨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는 1932년 옥천읍에서 태어났다(호적에는 1933년 출생으로 기록).
 
아버지 이수천(1899~1965)과 어머니 박오남(1906~1963)은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나는 장남이었고, 위로 누님이 한 분 있다.나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 않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읍내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1942년 일본인의 군량미 도정을 위한 합작 제의를 거부했다가 파산했다. 아버지는 1927년 '이병석'으로 개명(改名)해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왜 이름을 바꾸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어려운 선택을 했는지는 5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밝혀졌다.
 
이듬해인 1943년 아버지가 서울로 떠났다. 이후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37세의 나이에 고향에 홀로 남은 어머니가 4남매를 키우느라 엄청나게 고생하셨다. 그 와중에 나는 삼양초등학교를 1회로 졸업했다. 옥천농중(옛 옥천농고)에 진학했지만 생활고 때문에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 이태기씨의 젊은 시절. <제공: 이태기씨>

내 인생의 소중한 보물, 은인, 희망

십대 후반 시절 나는 먹고 살기 위하여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가난에 위축돼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고독하게 지냈다. 아버지와 손잡고 읍내 거리를 다니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여가를 즐길 틈이 없었기에 아직도 '18번곡'이 없다. 해방 이후 우리 가족은 이재민 사택에서 살고 있었다. 허름한 초가집 뒷방에서 다섯 식구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어야 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이곳으로 외지인이 밀려들어왔다. 그 중의 한 명이 내 인생의 은인이 되어 주었다. 북한에서 단독 월남한 이창용씨 덕분에 직장도 얻을 수 있었고 결혼도 할 수 있었다. 영어 교사 출신인 이씨는 옥천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 부인의 중매로 읍내 처녀 강난이와 평생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이창용씨의 제안과 주선으로 1954년부터 경기도 문산에 위치한 국제연합정전위원단 PX에서 군속으로 근무했다. 당시 청산 출신인 장용호(YH무역 대표를 지냄)씨가 국제연합정전위원단에서 사람을 부리는 노무처장을 맡고 있어서 비교적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당시로선 적지 않은 목돈을 쥐고 1956년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침 어머니가 삼양초 앞에서 '할머니 점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간판도 없는 임시 가게였는데, 아이들이 붙여준 이름이 '할머니 점방'이었다(당시 어머니는 50세였다). 그것이 오늘날 학생사의 전신이 되어주었음은 물론이다. 잠시 삼양초 교내 매점도 운영했다.

현재의 학생사로 이사를 올 때까지 10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기간에 많은 사연이 있었다.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아내 강난이와 1962년 결혼했고,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은인인 어머니가 1963년 별세했고,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희망인 장남 종수가 1964년 태어났다. 그리고 1965년 아버지 별세 소식을 들었다. 당시 내 나이 33세였다.

▲ 이태기씨의 젊은 시절. <제공: 이태기씨>

 ■ 상호를 '학생사'로 작명한 사람은

인생에는 항상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1966년이 그랬다. 내 나름으로 철저한 시장 조사를 벌인 끝에 읍내 중심가의 문구점을 인수해 이사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학생사 개업 이후 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열었고, 밤 12시 때로는 1시가 되어야 문을 닫았다. 명절에도 쉬지 않는 연중무휴의 원칙을 세웠고, 그것을 철저히 지켰다. 물론 내 옆에는 늘 아내가 함께 했다.

상호를 왜 '학생사'라고 지었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제야 밝힌다. 이 상호는 대전에 있던 도매점인 '성심문구' 여사장님의 제안으로 짓게 되었다. 그 분은 간판까지 번듯하게 만들어 보내주셨다. 이렇게 인생은 다른 사람과의 고마운 인연 덕분에 풍요해진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잘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새로운 곳에 터를 잡고 열심히 일하자 수많은 단골손님이 생겨났다. 그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대하자 인생의 열매가 선물로 주어졌다. 5년 만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집을 산 것이다. 당시 비만 오면 물이 새는 낡은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마저 주인이 틈만 나면 "나가라"고 닦달하는 통에 뼈에 사무친 설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 명의의 집을 갖게 되는 순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물 배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67년 차남 종일이 태어난 이후 3년 터울로 장녀 혜경, 삼남 종구도 차례로 우리 부부의 희망이 되어주었다. 이후 4남매는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모두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특히 장남 종수가 옥천공고를 졸업하고 청주사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집을 샀을 때보다 더 기뻤다.

내 인생의 뿌리는 가지로, 가지는 꽃과 열매로 이어졌다. 장남 종수가 1남2녀(보영, 지환, 선영), 차남 종일이 1남1녀(민지, 정한), 장녀 혜경이 1녀(유해강), 삼남 종구가 1남(주한)을 낳아주었다.

사실 내가 아내와 결혼할 때 양가에서 한 푼도 도와주지 못했다. 도와줄 사정이 되지 못했고,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밑천 없이 시작한 인생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참으로 과분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추억 삼아 이런 얘기를 나눌 때마다 아내는 눈시울을 붉힌다. 우리 부부 인생 55년의 기승전결(起承轉結)에는,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항상 눈물이 배어 있다.

▲ 이태기, 강난이씨 부부가 학생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씨는 이 건물이 옥천에서 가장 먼저 올려진 2층

■ 나를 '무대'와 '받침대'로 삼아주길

아버지가 청주농업학교(현 청주농고) 재학 당시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육동천씨가 알려줬다. 아버지의 독립유공을 인정받기 위한 20년 명예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19년 4월 9일 징역 5개월을 선고받은 아버지는 출소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1927년 '이병석'으로 이름을 바꾸고 살았다. 하지만 이 개명 때문에 정부는 '행적 묘연'과 '증빙자료 부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서, 독립유공자 신청서, 청주농고 학적부, 재판 기록, 각종 관련 기사 등을 정리하고 아버지를 기억하는 고령자 주민들을 찾아 나섰다. 이 과정에서 충북대 박걸순 교수의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 박 교수는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판결문을 찾아내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객관적으로 증명했다. 마침내 정부는 2014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아버지에게 표창하고 독립유공자로 추서했다.

원래 내 이름은 이대기(李臺基)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편하게 '이태기'라고 부르면서 이태기(李台基)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높고 평평한 건축물'을 뜻하는 대(臺)에는 '무대'와 '받침대'라는 의미도 있다. 태(台)는 주로 '별'과 '태풍'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내 후손들이 나를 '무대'와 '받침대'로 삼아 '별'과 '태풍'처럼 이 세상을 빛내면서 주도적으로 살기를 바란다.

나는 2004년 충북과학대학 실버대학, 2008년 노인복지관 문화정보대학을 수료했다. 여기서 서예를 공부했다. 81세가 되던 해인 2013년 충북노인문화예술제와 한국향토문화미술대전에서 서예로 입선과 특선의 영예를 안았다. 우리 집 거실에는 내가 직접 쓴 휘호 편액 '낙본인화(樂本人和)'가 걸려 있다. 나는 즐거운 인생의 근본은 인화라고 믿는다.

▲ 2004년 충북과학대학 실버대학을 졸업했을 당시 모습. <제공: 이태기씨>
▲ 이태기씨는 복지관에서 서예를 배우기도 했다. 붓글씨를 쓰고 있는 이씨. <제공: 이태기씨>
▲ 이태기씨 집 거실 한쪽 벽 풍경. 상장과 사진 등 이씨 가족의 추억이 가득하다.이태기씨 집 거실 한쪽 벽 풍경. 상장과 사진 등 이씨 가족의 추억이 가득하다.
▲ 여든의 이태기씨가 벽에 걸린 칠순 잔치 때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막내아들의 감사편지>

코끝 찡하게 하는 아버님의 손톱

안녕하세요. 막내아들 종구입니다. 아버님 마흔이 되시던 해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아버님 나이가 많으셔서 조금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장사꾼 아들'이라고 놀리던 친구도 있었지요. 그 친구 아버님 직업은 교사였습니다. 국사책에 조선시대 신분계층이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나뉘어 있다고 기술돼 있었는데, 그 친구가 "네가 바로 상인 아들"이라고 놀렸지요. 그렇게 놀리던 친구가 지금도 가끔 가게로 찾아오곤 합니다. 아버님은 지금도 새벽 5시쯤 기상해 운동하시고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시며 서예 공부를 꾸준히 하십니다. 아직도 가게가 바빠지면 가끔 제 일을 봐주십니다.

아버님이 가게에 계시면 50~60대 손님들이 알아보시고 "건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부모님의 건강함이 제게 얼마나 큰 에너지를 주고 있는지 느끼게 됩니다. 부모님은 근검절약으로 자식 넷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결혼까지 시키셨습니다. 달랑 하나 있는 자식에도 힘들어 하는 저 자신을 돌아보며 인생의 선배인 아버님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님 손톱 밑에 낀 먼지 때가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아빠, 손 좀 깨끗이 씻어"라고 버릇없게 면박을 주곤 했었지요. 그랬던 제가 어느덧 가업을 이어받아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손톱 밑에 낀 까만 먼지 때를 보면 코끝이 찡해지면서 '그 동안 부모님이 정말 열심히 사셨구나'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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