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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②>전쟁과 세월의 격랑 속에서도 희망을 일구다

작성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 승인 2019.08.02  17: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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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금구리 안재익(80)씨
서울양복점이 옥천의 '정치 1번지'로 불린 까닭

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옥천신문이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지역 어른들의 인생을 회고합니다. 정지환 객원기자가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구술을 정리해 지면에 담을 예정입니다. 이번 호에는 서울양복점을 운영했던 안재익씨를 만났습니다.

▲ 옥천읍에서 서울양복점을 운영했던 안재익씨. 몇 년 전 암 수술을 받아 건강이 예전만 못하지만 여전히 활기찬 웃음과 에너지가 가득하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소년 가장이 된 그는 한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덕일까.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 지면을 위해 보낸 편지가 4통이 될 정도로 아버지를 생각하는 자녀들의 마음도 남다른 듯 하다. 지난달 29일 안씨가 자신의 방 안에 걸린 가족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밖에도 그의 방 한 켠에는 아내와 함께한 사진을 비롯해 자녀들, 손자·손녀의 사진이 가득했다.

나는 1938년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안충희)와 어머니(정을학)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철도 공무원이던 아버지 덕분에 익산역 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무렵 영동으로 돌아왔다. 부모와 함께 했던 행복한 시절은 1950년 전쟁이 터지면서 끝났다. 전쟁은 유년 시절의 모든 추억을 빼앗아 갔다. 비행기 폭격으로 집이 불탔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와중에 막내 재필이 폐렴으로 사망했다. 2년 후에는 어머니마저 채독(菜毒)으로 돌아가셨다.

당시에는 죽음이 늘 내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두 형이 있었지만 홍역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난 곳도 하필이면 미군과 인민군이 접전을 벌이던 전장의 중심인 영동 노근리 인근이었다. 포탄에 맞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계속된 포격이 끝나고서야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아수라 지옥을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지금은 곁을 떠난 동갑내기 아내와 함께. <제공: 안재익씨>

 

■ 대구에서 만난 평생의 은인

▲ 안재익씨의 큰 딸이 쓴 편지.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묻어난다

졸지에 고아가 된 우리 4남매는 큰아버님 댁에 얹혀살아야 했다. 사촌이 넷이나 있었기에 열세 살에 가장이 된 나는 큰아버님 일손을 도와야 했다. 겨울에는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야 했고, 나머지 계절에는 부역을 하러 신작로에 나가야 했다. 미군과 함께 1차선 도로를 만들었고, 국군 공병대와 함께 그것을 다시 2차선 도로로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

1951년 나는 대구시 친척이 운영하던 양복점에 취직했다. 양복 기술이 내 평생의 업(業)이 된 계기였다. 양복(洋服), 양장(洋裝), 양화(洋靴) 등 수공업 기술자는 당시 시골 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이 취직이지 하나라도 입을 줄여야 했던 우리집 형편과 정식 급료를 주지 않고 쓸 수 있는 일꾼이 필요했던 친척의 상황이 서로 맞아 대구로 보내졌을 것이다. 당시는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해도 고마워하던 시절이었다.친척이 운영하던 양복점은 대구시 대신동에 있었다. 이곳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어깨 너머로 양복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3~4년을 보낸 나는 대구시 화전동에 위치한 양복점 '창일라사'로 자리를 옮겼다. 화전동은 거리 양쪽에 화려한 양복점이 즐비한, 명실상부한 대구 멋쟁이들의 1번지였다.

여기서 나는 평생의 은인을 만났다. 양복 기술의 고수였던 재봉사 전○○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안타깝게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성이 밭 전(田)이라는 사실만 그나마 뇌리에 남아 있다. 나는 그에게 본격적으로 양복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의 소유자였던 그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사람과 달랐다.

첫째, 절대 욕을 하지 않았다. 당시 너무나 흔하던 "야, 인마"라는 말조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둘째, 확실하게 이해할 때까지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무작정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이치(理致)'를 알도록 가르쳤기에 전수해준 기술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고수에게 양복 기술을 제대로 배운 나는 1954년 강원도 장성(현재 태백)의 한 양복점으로 스카우트되었다. 그곳으로 가기 전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장성에서 마침내 첫 월급을 탔다. 첫 번째 평생의 은인인 백부에게 고스란히 가져다 드렸다. 나중에 큰댁에 가보니 외양간에 소 한 마리가 매여져 있었다. 물론 내가 드린 돈으로 산 소였다.

4·19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59년 나는 친구의 소개로 서울로 입성했다. 10명의 기술자가 일하는 '광성라사'에 들어가 상의 봉재사로 일했다. 양복 기술은 보통 하의, 조끼, 상의 순으로 배운다. 서울은 말 그대로 전국 고수들의 기술 종합 전시장이었다. 출신지만으로 실력 등급이 매겨졌는데, 인천, 부산, 마산, 대구, 전주, 광주 출신은 확실히 실력이 뛰어났다.

▲ 1999년 옥천신문에 보도됐던 안재익씨 기사. <제공: 안재익씨>

 

배움에 대한 한(恨)과 열망

5·16이 일어난 1961년 가을,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결혼하고 곧 바로 군대에 입대했다. 형편이 어렵다보니 군 입대를 계속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북 영천에 있던 행정종합학교에서 8주 동안 인사행정 교육을 받았다. 입소한 98명 중 대다수가 관세청과 국회사무처 등에서 일하던 대졸자였다.

첫날 노트와 볼펜 등 학습도구가 지급됐다. 소년 가장이 되면서 학업을 중단한 아픈 기억이 떠올라 감개가 무량했다. 사실 대구에서 양복 기술을 배울 때 나는 대구서중 야간부에 입학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양복점에서 직접 교복과 모자를 만들고 '중(中)' 자가 들어간 배지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양복점 사장이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눈물을 삼켜야 했다.

배움에 대한 한(恨)과 열망이 있었기에 노트와 볼펜의 의미가 각별했다. 그래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가 많았지만 무조건 외우고 또 외웠다. 나중에 성적이 발표됐는데 98명 중 60등이었다. 대졸 출신의 공무원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꼴찌를 면한 것은 물론이고 이런 성적까지 거둔 것에 기뻤고, 솔직히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인사행정 지식은 나중에 양복점을 운영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나는 제도권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세상 공부는 다양하게 경험했다. 특히 대구 친척 어른 양복점에서 배운 신문 읽기는 나중에 내가 직접 양복점을 운영하며 '옥천의 정치 1번지'라는 소리를 듣게 만들 정도로 큰 참고가 되었다. 서울에서 피난을 온 공직자나 지식인 고객과 대화 눈높이를 맞추려고 친척 어른은 무려 4~5종의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다. 국제정세와 국내정세에 대하여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다림질 하면서 듣는 순간은 너무나 황홀했다.

▲ 젊은 시절 안재익씨와 이은애씨 부부. <제공: 안재익씨>

 

■ 동갑내기 아내 '이은애'를 말한다

1965년 군에서 제대한 나는 옥천에 터를 잡았다. 선산이 자리한 옥천은 사실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동생 재영이 미리 옥천에 와서 터전을 잡아놓은 상황이었다. 제대하고 첫해는 여동생을 결혼시키기 위해 서울을 오가며 일했다. 그러다가 대전시 지큐양복점 사장님이 옥천에 있는 문화양복점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된 옥천과의 만남과 동행이 어느덧 52년이 되었다.

1970년 나는 독립해서 '서울양복점'을 개업했다. 상호는 사업을 도와주던 친구가 지어주었다. "네가 서울에서 일하다가 왔으니 '서울양복점'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2002년 3월 29일 정식으로 폐업식을 할 때까지 읍내 중심가에서 32년 동안 서울양복점을 운영했다. 1951년 대구로 떠날 때부터 따지면 양복 기술과 인연은 51년이나 된다.

내 인생을 말할 때 절대 빠트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동갑내기 아내 이은애(1938~1994)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나는 1961년 유성 처녀 이은애와 중매로 결혼했다.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질 때까지 결혼하지 않으려 했지만 집안 어른들이 서두른 결과였다. 아내는 머리가 좋았고 리더십도 나름대로 갖추고 있었다.

▲ 안재익씨의 아내 이은애씨 사진.

1970년대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었다. 당시 아내는 서정리 부녀회장으로 활동했고, 서정리 마을금고 초대 이사장도 맡았다. 외국인 시찰단이 방문하면 앞에 나가 브리핑도 했다. 가족계획, 조산교육, 도박근절 등 생활개선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아내 역시 배우지 못한 한이 많아 기회가 되는 대로 교육을 받았다. 나도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배우라"고 격려했다. 짧게는 3~4일, 길게는 1주일 동안 서울에 교육받으러 간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고, 군대 시절 경험을 살려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새마을협동장 표창을 받기도 했던 열정적 아내는 안타깝게도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내 생이 무너지는 듯한 뼈아픈 이별이었다.

나는 아내와 사이에서 1남 3녀를 낳았고 자식들은 교육계와 출판계 등에서 일하고 있다. 그 1남 3녀가 다시 3명의 손자와 2명의 손녀를 낳아 주었다. 전쟁으로 무너진 가정을 맨손으로 다시 세우기 위하여 내 평생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대나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맨몸으로 나의 운명을 감내하며 꿋꿋이 살아왔다.

3년 전에 나는 암 선고라는 또 다른 시련에 직면했다. 대수술을 받고 암 투병을 하면서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자식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주변의 도움 그리고 간절한 기도 덕분에 현재는 많이 회복되었다. 도와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 지금은 곁을 떠난 동갑내기 아내와 함께. <제공: 안재익씨>

 

■ 가장 고마운 사람을 꼽는다면?

"백부님과 백모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전쟁 직후 농촌의 어려운 살림에 자기 자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4남매를 거둬주고 길러주셨다. 우리가 성장하는 동안 가슴 아픈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 가장 기뻤던 순간은?

"외아들이 장가간 순간과 손자, 손녀들이 태어난 순간이다."

■ 후손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욕심 내지 말고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살아오면서 남의 입길에 오르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인생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리 환호해도, 죽도록 고생해도 결국에는 그 주기가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잘 나간다고 오만할 필요도 없고, 조금 어렵다고 죽을 상을 지을 이유도 없다."

■ 혹자들은 서울양복점을 가리켜 옥천의 '정치 1번지'라고 하는데?

"군내 각계에서 퇴직한 원로들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리는 곳이기 때문에 붙었던 애칭이다. 실제로 사랑방 노릇을 하면서 옥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박준병, 이용희 등 역대 정치인들이 찾아오면 옥천의 솔직한 민심을 전하기도 했다. 대화 수준을 높이려고 시간만 나면 신문을 읽었다."

 

▲ 안재익씨가 아내와 손자 사진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셋째 딸의 감사편지>

부르기만 해도 가슴 저리고 먹먹한 이름, 아버지

아버지! 저에게 아버지는 부르기만 해도 가슴 저리고 먹먹한 이름입니다. 한 많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 누구보다 가족과 자식 사랑이 제일 먼저였던 가슴 따듯한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옥천에서 유년기와 성년기를 무사히 보낸 우리 4남매들은 각자 생계를 꾸리러 타지로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곁에서 당신의 아픔과 고통을 보듬을 겨를도 없이 모두 감내하시면서 묵묵히 우리 가족을 지켜주셨던 아버지가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어찌 글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아버지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요? 3년 전 모진 병마와 싸우고 너무 많이 늙어버리신 우리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세상 어떤 꽃보다 아름답고, 푸른 초목보다 더 성성하며 우리들 마음속의 지주입니다. 세상 어떤 아버지들보다 가슴 아픈 시련과 격렬한 슬픔을 이겨내야 했던 아버지의 삶에 무한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눈물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둘째 딸의 감사편지>

속상하고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는 아버지 말씀

서정리에 살 때 아버지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셔서 집 주변의 풀을 정리하고 가게로 출근하셨다가 밤 10시 넘어서 퇴근해 저녁을 드셨지요. 그 때마다 아버지 밥상에 붙어 앉아서 반찬 나누어 주시는 것을 먹으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딸만 내리 두시다가 남동생이 태어나자 무척 좋아하시던 모습, 그 소중한 아들을 늘 자전거 뒤에 태우고 가게로 출근하시던 일, 제가 감기 걸렸을 때 병원 치료를 마치고 종합상가에 데려 가서 파랑색 바지랑 도널드 덕 운동화 사주셨던 일, 제가 농구할 때 창밖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던 기억, 아침에 양복점 청소하고 나면 용돈 주시면서 ‘줄 때 받아라. 없으면 못 준다’라고 말씀하시던 일, 제가 학교에서 영어 점수를 잘 받아오고 영어에 특기를 보이니까 형편이 넉넉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30여 년 전 당시 16만원이나 하던 빨간색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사주시며 ‘네 특기를 살려 영어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던 일, 제 대학 졸업식 때와 첫 발령 때 기뻐해 주시던 일, 갑작스럽게 병마가 덮친 엄마를 정말로 극진히 간호하셨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속상하고 힘들 때마다 아버지 말씀을 들으면 아주 큰 위로가 됩니다.

 

<외손자의 감사편지>

할아버지와 옥천에서 보낸 시간들 행복했어요

저는 아직도 고2 때를 기억합니다. 창백한 얼굴의 할아버지가 병석에서 저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셨죠. 힘없이 저에게 걱정 말라고 하시던 할아버지를 보면서 마지막 이별의 순간인 줄 알았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던 저였지만 수술 날 만큼은 온갖 신이란 신은 다 찾으며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그 날 정말 다행히도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나오신 할아버지를 봤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눈물이 그냥 흐르더군요. 옛날에 부모님이 일 나가면 할아버지가 저를 유모차에 태워서 옥천 여기저기 많이 갔었지요. 많이는 기억 안 나도 할아버지와 강에서 물고기를 봤던 행복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항상 한없이 사랑해주시고, 걱정해주시는 우리 할아버지! 늘 저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할아버지의 버팀목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외손녀의 감사편지>

할아버지처럼 지역사회 존경받는 사람 될래요

사랑하는 외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우리 모두에게 튼튼하고 듬직한 나무 같은 분이세요. 할아버지의 기도 덕택에 우리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앞으로도 더욱더 건강하시고 재미있는 삶을 보내세요. 할아버지는 성공적인 인생을 사시는 것 같아요. 친구도 많으시고, 지역신문에도 여러 번 나오셨죠. 저도 할아버지처럼 가족들은 물론 지역사회의 자발적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살아야할 텐데요. 긍정적으로 살자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장래를 걱정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한답니다. 그렇지만 쉬지 않고 스스로 마인드 훈련을 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잘 되겠죠. 사랑하는 우리 할아버지. 부디 여생은 큰 행복, 행운과 좋은 추억으로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하세요.

▲ 안재익씨의 아내 이은애씨도 생전 옥천신문을 통해 보도된 바 있다. <제공: 안재익씨>

 

▲ 서울양복점이 있던 2002년 당시 주변 건물 풍경. <제공: 안재익씨>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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