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종(85, 이원면 원동리)
 
■ 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옥천신문이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지역 어른들의 인생을 회고합니다. 정지환 객원기자가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구술을 정리해 지면에 담을 예정입니다. 이번 호에는 이원면 원동리 박기종씨를 만났습니다

▲ 박기종씨가 환한 얼굴로 자신의 집 앞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1994년 누전으로 가옥이 전소됐지만 평생을 터를 일구며 살아온 그 답게 다시 일어섰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아무 것도 못 한다'고 하지만 마당 한편엔 그가 손수 널어놓은 시래기와 곶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을 속이지 말고 남에게 속지도 마라. 그것이 속고 속일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내가 후손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살아보니 애초에 잘못 빌려준 돈은 아예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좋더라. 그러니 받지 못할 돈은 아예 처음부터 빌려주지 않는 것이 좋다.

항아리에 식수를 가득 채워야 등교

나는 1933년 옥천군 이원면 우산리 2구에서 태어났다(우산리는 나중에 행정구역이 동이면으로 바뀌었다). 아버지(박계준)와 어머니(이월준)는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는데, 그 중 나는 장남이었다.

우산리 2구에는 개인 우물을 가진 집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강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나는 식수 나르는 일을 담당했다. 어머니가 물 걱정은 하지 않도

록 하고 싶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물지게를 지고 강으로 나갔다. 날마다 물을 가득 담은 양철통 2개를 양쪽에 짊어지고 강에서 집까지 세 차례 왕복했다. 큰 항아리에 식수를 가득 채워야 등교했다.

나는 지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원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가 더 멀어졌기에 식수를 채워놓고 등교하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다.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나마 참을 만했다. 그러나 칼바람 부는 겨울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둑에서 물을 긷는 강까지 약 250m 떨어져 있었다. 나는 주민들이 이용하는 그 길이 여름에 홍수로 훼손되면 보수했고,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빗자루로 쓸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2학년까지만 다니고 중퇴했는데, 청년이 되어서도 이 길을 관리하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마을을 위해 시작한 일이 또 하나 있었다. 미약한 수준이긴 했지만 야학(夜學)을 열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는데, 거기서 배운 제삿날 지방 쓰는 법과 각종 예의범절 등을 약 20명의 마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당시 자유당 소속의 김지환 면의원이 서당 훈장이었다.

1957년 나는 처음 고향을 떠나 군에 입대했다. 다행히 인접한 대전의 건설공병단 본부에 배속되었다. "글씨 쓰는 것에 자신 있는 사람은 자원하라"는 지휘관의 말을 듣고 10명이 앞으로 나섰는데, 그 중에서 나를 포함한 2명이 행정병으로 선발되었다. 한글과 한자 쓰기 실습 시험을 봤는데, 서당에서 한자를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휴가를 나가거나 영내를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행정병으로 열심히 일하며 부대에 기여한 덕분인지 제삿날마다 부관에게 특별 외박을 허락받았다. 심천역에서 내려 6km를 걸어서 집까지 와서 제사를 지내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조상을 제대로 모셔야 하는 것은 당시의 나에게는 최고의 지상 과제였다.

그 무렵인 1958년 우리 가족은 우산리에서 원동리로 이사했다.1960년 나는 만기 제대를 하고 옥천으로 돌아왔다.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마을에 야학을 여는 것이었다. 마침 야학은 중단된 상태였다. 먼저 있던 야학 선생이 하루 술 한 되, 담배 한 갑, 신문 구독을 위한 비용을 요구한 것이 이유였다. 나는 야간에 등불을 밝힐 석유 값 이외에는 어떤 비용도 받지 않기로 하고 야학 문을 열었다. 학교에 가서 교장 선생님을 면담하고 칠판과 백묵 등도 지원받기로 약속받았다.

■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확실한 비법

▲ 박기종씨가 자필로 쓴 자신의 신조.

"우리가 앞장서서 원동리를 전국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동네로 만들어 보자."

야학에 나온 약 30명의 학생들에게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제안이었다. 고맙게도 학생들이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우리는 마을 도랑 옆에 버드나무 500그루를 심었다. 마을 주변에는 개나리와 진달래를 각각 500그루씩 심었다. 마을을 빙 둘러서 사철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조성하기도 했다. 지나가던 관광버스가 멈춰 서서 쉬어갈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1961년 5월 16일 일부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야학과 마을 가꾸기 활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춘식 면장이 나를 이장으로 덜컥 임명했다. 그는 "아마 자네가 전국에서 최연소 이장일 것"이라면서 "원동리를 모범 마을로 만들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당시 내 나이 28세였다.

"저는 원동리로 이사 온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마을 형편도 자세히 모르고 누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릅니다."

하지만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선도적 마을이 필요했던 박 면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이장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싶었다. 우선 큰 종이에 마을 지도를 그려놓고 집집마다 세대주 이름을 적은 다음 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중해서 노력하자 보름 만에 마을 주민 이름을 모두 외우게 되었다. 그때 처음 마을 호수가 163개라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하지만 다른 동네에서 이사를 왔다는 것이 큰 굴레와 멍에가 되었다. 일부 주민의 모함과 강권으로 잠시 이장을 그만 두기도 하였다. 일종의 탄핵을 당한 셈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모든 진실이 밝혀져 오해가 풀리면서 이장으로 복귀하였다.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다. 사흘 동안 무조건 아침 일찍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면서 협조해 달라고 간청했다.

"식전이면 들어와 아침이나 먹고 가게나."

그것은 마음이 바뀌었다는 우회적 표현이었다. 그때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사흘 동안 찾아가서 진심으로 말하면 누구든지 설득되고, 어떤 오해도 풀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12년 동안 이장으로 활동한 나는 원동리가 1구와 2구로 분리된 이후에도 2구 이장을 7년 동안 더 맡았다. 그러니까 꼬박 19년을 마을을 위하여 봉사한 것이다. 이장을 맡고 있는 동안 주민의 편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특히 주민증 등본과 초본 발급, 출생 신고, 혼인 신고, 분가 신고, 사망 신고 등과 관련된 일체의 서류 작업은 내가 대행해 주었다. 단 인감 증명만은 본인이 직접 하도록 했다. 초상이 나면 부고장을 써주고 사흘 동안 꼬박 도와주는 일도 거르지 않았다. 그는 종중 관련 일에도 무척 많은 애를 썼다.

▲ 그는 종중 관련 일에도 무척 많은 애를 썼다. 본인이 주관해 추진한 종중 일을 적어놓은 서류를 든 박기종씨의 주름진 손.

■ 가옥 전소 화마도 태우지 못한 것들

이장에서 물러난 이후의 일이다. 옥천에서 영동까지 이어진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원면 구간을 맡게 된 두산건설 현장사무소가 원동리에 설치되어 경비로 일하게 되었다. 그냥 경비 업무만 맡으면 되었지만 확장 공사 구역 내에 있는 토지와 묘지를 파악하고 보상하는 업무를 자진해서 도와주었다.

당시 건설사의 입장에선 유연고 묘지의 당사자를 파악하여 신속하게 보상하는 업무가 공사 기간 단축과 관련해 매우 중요했다. 불필요한 오해로 민원까지 발생할 경우에는 실무자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동네 사정에 밝은 내가 나서서 도와주니 이원 구간이 다른 구간에 비해서 업무 효율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 입장에서도 이익이었다. 보상을 받으려면 밟아야 하는 복잡한 절차와 서류 처리를 내가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필요한 경우에는 대행해주니 고마워했다.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을 촬영한 사진 3장을 반드시 제출해야 했는데, 나는 회사에서 빌린 카메라로 모두 처리해주고 비용도 일절 받지 않았다. 당시 건설사와 주민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 '해결사'였다.

이장으로 일한 19년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한 일이 있다. 45년 동안 종토(宗土) 구입 등 문중(함양 박씨 영상공파)을 위해 봉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많은 애로가 있었으나 이장으로 일하던 때의 자세, 즉 삼고초려와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해결해나갔다. 조령리에 4대 조상(15~18대)의 신도비를 세웠을 때와 첫 종토가 생겼을 때 큰 보람을 느꼈다.

조상을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한 보답이었을까. 1994년 전기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해 가옥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지만 신기하게도 미리 준비해놓았던 부모님의 수의와 두루마기, 종중 토지 등기권은 타지 않았다. 전화위복(轉禍爲福). 화재는 무너진 초가 터 위에 새 기와집을 짓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동이면 청마리 출신인 동갑내기 아내 정순복과 중매로 결혼해 5남1녀를 낳았다. 모두 건실하게 살고 있는데, 충북도의원에 이어서 이원면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맡고 있는 차남 영웅이 지역사회에 봉사하며 살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5남1녀가 다시 6명의 손자와 4명의 손녀를 낳아주어 이 세상에 나온 보람을 얻을 수 있어 또한 고맙게 생각한다.

내 이름을 한자로 쓰면 '基鍾'인데, '터'와 '종'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선지 집터를 세우고 새벽종을 울리며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부디 후손들은 튼튼한 터전 위에서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둘째 아들의 감사편지>

감사보다 불만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까지의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솔직히 별로 없습니다. 학창 시절 형성된 부모님에 대한 감정도 '감사'보다는 '불만'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겨울에 원동리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북서풍을 정면으로 맞부딪치며 가야만 했습니다. 나일론 양말에 검정 고무신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칼바람 추위였습니다. '왜 우리 집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나?' 이런 물음이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변질되곤 했습니다. 장맛비 그대로 맞아야 했던 변변치 못한 우산, 제때에 낸 적이 없었던 육성회비, 도시락을 지참하지 못한 등굣길, 농사일 돕기로 정신이 없었던 방학 등 모든 것이 불만투성이였지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성장하면서 부모님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5남1녀의 자식과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던 두 분의 인생의 무게가 가볍지 않았겠구나, 특히 여러 자식의 학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겠구나 생각이 들면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어린 시절 불만투성이로 살았던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그 죄송한 마음은 다시 감사한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도의원으로 활동하고 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것도 내가 부모님 특히 아버님의 합리적인 모범생활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에 대한 불만의 마음이 죄송한 마음으로, 죄송한 마음이 감사한 마음으로 변화해온 것에 따라 저도 성장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적인 사회생활로 바쁘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통렬하게 반성합니다. 솔직히 이 복잡한 마음을 부모님께 직접 전하기에는 아직 용기가 없었는데 옥천신문 지면을 통하여 먼저 고백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 동안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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