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누나만 넷, 다섯째로 딸 부잣집의 귀한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최운산장군의 수려한 용모를 물려받은, 요즘말로 엄친아의 전형이었다. 최운산장군의 큰아들 봉우鳳羽가 태어나던 날 봉오동 초모정자산에 환한 서기가 감돌았다는 이야기가 오래도록 전해질 만큼 아버지는 그 마을의 신화적 인물이었다. 얼굴뿐 아니라 결단력까지 최운산 장군을 닮았던 아버지는 봉오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홀로 일본행을 감행할 만큼 담대했다.

독립군의 아들이 아버지 밑에서 무장투쟁에 참여하지 않고 유학을 떠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사람이 독립군이고 경제적 여유도 있었다. 어린 장군의 아들에게는 총을 드는 일보다 공부를 하고 자신을 세우는 일이 더  우선적인 요구였다. 당시는 1930년대 중반 만주국 시기였다. 일제하 만주에서  최운산 장군은 삼림지역에 비밀리에 독립군을 양성하며 무장투쟁에 집중하던  때였다.

최봉우는 부모님이 일본 유학을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용돈을 모아 무작정 봉오동을 떠났다. 할머니 전주 이씨의 친정이 있어 가족들에게 낯설지 않은 서울로 여행을 간 줄 알았던 아들 봉우가 바다 건너 일본 동경에서 소식을 보내왔다.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겠다는 선언에 모두 깜짝 놀랐으나 최운산 장군은 아들의 결심을 받아들여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했다. 아버지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모두 일본에서 다니셨다.

와세다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20대의 최봉우
와세다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20대의 최봉우

최봉우는 학창시절 내내 창씨 개명도 하지 않고 일본 학생들과 정면으로 겨루는 강단이 있었다. 물론 부모의 경제력 덕분에 고생스럽지 않았고,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해 교우관계도 원만했다. 대체로 편안한 유학생활이었으나 조선의 어린 학생이 혼자 타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엔 조센징이라고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을 닮은 형형한 눈빛의 최봉우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승부사 기질이 있어 학기 초가 되면 그 반에서 제일 강한 아이와 겨루는 것으로 승부를 걸었다. 최봉우는 언제나 이겼다.

싸움꾼도 아니고 덩치도 크지 않은 아버지가 어떻게 일본 아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냐는 나의 질문에 "싸울 때는 힘이나 싸움 기술이 부족해도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면 상대가 이길 수 없는 법이야. 만약 그 싸움에서 진다면 나는 어차피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사생결단을 하고 싸운 거지" 하고 답하셨다. 덩치 큰 일본 아이들도 포기를 모르는 당찬 조선 학생 최봉우를 이길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싸움에서 한 번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들보다 센 조선인 친구를 사이상(최씨)”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예전에 일본에서 아버지와 유학생활을 함께 하신 친지 한 분이 아버지의 와세다대학교 학생 시절을 기억하며 당시 청년 최봉우의 눈빛이 얼마나 강했는지 동급생들이 친구 최봉우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었다고 전해주었다. 게다가 싸움까지 잘 했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잘 모르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눈꼬리를 내리고 미소를 짓는, 화가 나 목소리가 커졌다가도 내가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웃어주던 딸바보다.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늘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하고 밀양아리랑"을 흥얼거리셨던 아버지는 노래를 참 잘 부르셨다. 타고난 미성과 풍부한 성량으로 성악콩쿠르에서 입상해 음악대학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받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와 함께 있던 사촌형 국빈(최진동 장군의 셋째아들)이 심하게 반대했다. “우리 집안에 딴따라는 없다. 내가 작은아버지(최운산 장군)한테 알리고 유학자금을 끊게 하겠다.”며 강력하게 만류했다. 아버지는 결국 성악과가 아니라 정외과로 진학하고 말았다

성악가의 길을 포기한 것에 미련이 남아서인지 아버지는 가끔 이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사실 나도 노래를 좋아하고 음악가가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기에 아버지의 추억에 공감하곤 했다. 최씨 집안 사람들은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잘했던 것 같다. 해방 직전 최진동 장군의 둘째 부인이 사망하자 후처의 어린 자식들은 외조부모와 함께 서울로 내려와 살았다. 최진동 장군의 막내딸 복순 당고모가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했었다.

얼굴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최운산 장군과 닮았던 아버지와 통화할 때는 전화기를 귀에서 멀리 떼어야 했다. 내가 아버지,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아프니 조금 작게 말씀해주세요.” 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허허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 할아버지가 봉오동 마을 뒷산에서 독립군들을 훈련할 때면 구령소리에 산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려서 산 아래에 있는 집에서도 최운산 장군의 호령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단다.”하고 웃으며 답하곤 하셨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성량이 부족한 나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큰 목소리를 제대로 닮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형제들 중 내가 외모도 성격도 아버지와 제일 많이 닮았다. 그래서일까 큰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언제나 특별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