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차출에 힘을 쓰던 삼인방의 하나!

필명   김   자현                                                                      

 

눈물 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곳을 떠나련다

개 짖는 마을들아

닭이 새벽을 알리는 촌가(村家)들아

잘 있거라

별이 있고

하늘이 보이고

거기 자유가 닫혀지지 않는 곳이라면-

 

위는 “고별”이라는 제목의 시 마지막 구절이다. 노천명 1951년 작품으로 <별을 쳐다보며>라는 시집에 실린 작품으로 한국전쟁 중 감옥에 있었던 그녀는 여러 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피난 가지 못하고 있다가 임화 등과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는 등으로 9.28 수복 후 부역 죄인으로 20년 형을 선고 받지만 같은 문인들의 탄원으로 6개월여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다.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하는 <사슴>의 시인으로 알려진 노천명의 작품은 누구보다도 서정성이 높고 아름다워 대한민국에서 중고등 이상의 수업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의 가슴엔들 살아 있지 않으리요. 세간에 사슴의 시인으로 불렸지만 정작 사슴의 시인은 당시 백석이었다. 외모가 훤칠하여 그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백석 첫 시집의 제목이 <사슴>이라서 당시에는 백석이 사슴 시인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더구나 백석을 좋아해 그에게 프로포즈 했다가 거절당한 노천명에게 있어서는 사슴 시의 한 소절인 “....젊잖은 편 말이 없구나!”의 당사자가 백석 아니었을까.

평생을 독신을 고수했던 까칠한 성격으로 알려진 노천명이 친일로 변절하기까지는 일제로부터의 획책과 강요가 전제된 것은 아닐까 안타깝게 매달려 본다. 1911년 황해도 장연 출생인 그녀는 병약할 뿐만 아니라 6세 때 홍역을 크게 앓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본래의 이름 노기선을 버리고 노천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다. 9살에 부친을 잃고 어머니의 친정 쪽 서울로 이사 와 명문이던 진명여자보통학교 졸업 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이다.

따라서 이화여전을 나온 모윤숙과 자별하게 지냄으로써 그녀의 친일은 가깝고 자연스럽게 시작된 것 아닐까. 일제 때는 모윤숙과 더불어 일제 종군 위안부 차출에 힘을 쓰는 삼인방의 하나였다니 이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 우리는 유구무언이다. 또한 해방 직후 미군정시절에는 이승만이 제안하고 지원했던 국가 비밀사교 클럽, 낙랑클럽의 회원이기도 했다. 말이 좋아 사교 클럽이지 미군 고위직을 상대하는 매춘클럽이었다고 여기저기 문헌에 나오니 이 무슨 해괴한 치욕인가.

그녀가 최초로 문단에 나온 것은 대학교 재학시절 <신동아> 잡지에 “밤의 찬미”와 “포구의 밤(1932년 6월호)을 발표하면서이다. 대표시 사슴 말고도 친일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게 하는 시편들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많다.

저녁별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두울 나 두울

논 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 소리-들은지 오래

고향 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오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에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따 내리는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려

램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 되다

산너머 지나온 저 촌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와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장날

대추 밤을 돈 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우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푸른 오월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우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여인네 맵시 우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구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을 먼데 하늘을 본다

기인 담을 끼고 외따른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혼잎나물 적갈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하고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던 그녀가 왜 그렇게 변질되었을까. 우리 민족의 원형질이 그대로 녹아있는 시편들! 유년을 도회가 아닌 곳, 황해도 장연에서 자라서일까? 향토색 짙은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점점이 우리 민족의 얼이요 혼이 시의 편편마다 얼비친다.

그녀의 시 <남사당>을 만나서는 클라리넷의 음조, <라 스트라다>가 들려오는 것은 무엇일까!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바닥을 치는 인생 인생들의 군상! 언제든 우리의 가슴을 저밀 것처럼 떠오르는 노스텔지어들, 그 집시들! 점철되는 역사의 오류와 풍랑을 넘나들며 살아내는 민중의 하나하나들! 하늘을 천개 삼고 땅을 발판 삼아 살아가는 남사당패가 우리 전통시장을 점유하고 향단이도 되었다가 월매도 되는가 하면 그 모습과 흡사한 덜컹거리는 포장 친 유랑마차를 타고 <젤소미나>가 <앤소니 퀸>이 나타나 우리의 원초를 건드리며 별 같은 눈물 한 방울 고이게 하는 것은 무슨 일일까. 그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던 그녀는 왜 역사의 절름발이가 되었을까?

시- 부인근로대(매일신보-1942년 3웕)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한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이여! 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시-젊은이들에게(삼천리-1942년 1월)

늙은 영국을 대해서/ 저 혼혈아 아메리카를 향해서/ 제국은 드디어 선전을 포고했다/정의를 위해 대동아 건설을 위해서/ 우리는 불수레를 달렸다

 

기원 (조광-1942년 2월호)

신사의 이른 아침/ 뜰엔 비질한 자욱 머리 빗은 듯 아직 새로운데/ 경건히 나와 손 모으며 기원하는 여인이 있다/ 일본의 전 아세아의 무운을 비는 청정한 아침이어라/

어머니의 거룩한 정성/ 아내의 간절한 기원/ 아버지를 위한 갸륵한 마음들.../ 같은 이 시간 방방곡곡 신사가 있는 곳/ 아름다운 이런 정경이 빚어지고 있으리

 

싱가폴함락(매일신보- 1942년 2월)

아세아의 거시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의 독아에서/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를 뺏어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간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어ㅣ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43년 8월)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나도 사나이였으면 나도 사나이였드라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우리의 숙원을 뿜으며/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전쟁 말기로 접어들면선 조선청년에게 전쟁터로 나갈 것을 선동하는 시)

 

흰 비둘기를 날려라(매일신보-1942년 12월)

추녀 끝 드높히 나부끼는/일장기 깃발도 유난히 선명한 이 낮/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푸른 하늘에 흰 비둘기를 날려라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 1주년을 기념하는 일본군의 명복을 비는 내용)

 

군신송( 매일신보—1944년 12월)

이 아침에도 대일본 특4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 네거리를 지나며/ 12월 하늘을 우러러 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적기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성좌처럼 솟는다. (대동아전쟁 3돌 기념 특집호—매일신보)

 

이 외에도 <그녀는 함남 여자 훈련소>에 스스로 입소하고 있다.  神恩과 皇恩을 외우는 것이 훈련의 중심이요, 신체제에 잘 어울리는 황국의 여성이 되게 하는 군인 훈련소와 다름 아닌 곳! 흡사 감옥 같은 곳에서 3개월 훈련을 받고 그녀는 일제가 우리 순결한 소녀들을 잡아다 길을 들이고 어떻게 洗腦 시키는지를 고발하는 내용이 아닌, 바른 규율과 질서,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지 않는, 참으로 황국과 황민은 선진적인 국민이라 찬양하는 내용을 참관기라는 이름으로 1943년 국민문학 6월호에 발표하고 있다. 더구나 이 국민문학은 바로 일어로 발간하는 잡지였음을 우리는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친일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는 것은 시인 김동환이 발행하던 <삼천리> 잡지에 “젊은이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대동아 전쟁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시를 쓰면서부터이다. 2월에는 조광이라는 잡지에, 같은 달 매일신보에 "싱가폴 함락"을 싣고 3월에는 역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부인근로대"라는 시를 발표하므로써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에 가담한다. 위의 친일 시편들 말고도 해방을 바라보는 1945년 2월에 산호림에 이어 그녀의 두 번째 시집 <창변>에는

“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학병”

“신익-마쓰이 오장 영전에”

“병정”

“천인침”

“싸움하는 여성”

등의 제목으로 친일 시들이 실리고 여류 중에는 상당히 많은 스물두 편의 친일 시편과 산문을 발표했다.

더구나 친일 시들을 발표하기 이전, 1939년에는 전쟁 지역인 중국 화북지방을 순회하며 황국위문사절단 단원으로 일제 황군을 독려했으며 총독부 산하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도 가입, 문협을 포함한 총독부 관변 4개 단체가 합류한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전쟁물자 보급 운동을 펼칠 때 부인대 간사로 근로 봉사는 물론, 군복 수리 운동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모윤숙 최정희와 함께 위안부 차출에 힘을 썼다는 것이니 우리의 얼이요 혼이 녹아난 시를 많이 발표했던들 그 죄를 무엇으로 갚으리요. 오히려 안 썼느니만 못한 것 아니었을까.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아까운 청춘들을 진흙밭과 피밭에 내던졌으니 어찌 하리요. 전쟁을 독려 선동하는 대회와 행사에 참여, 학도병으로 가미까제 특공대로 자원은 얼마나 영예스러운가, 시를 낭독하고 있으니 어이하랴! 급기야 “기원”이라는 시에서 그녀는 정갈한 신사의 마당에서 전 아세아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흉악하고 포악한 일제의 승리를 향한 더 없는 기도에 임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당시를 문헌을 통해 상상할 뿐인 후예들 역시 유구무언이지만 초근목피하다 못해 휴대하고 있었던 양초를 씹으며 일제와 싸웠던 독립군들을 생각하면 뼈가 저린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와 봉오동 청산리, 영하 30도가 오르내리는 추위에 베잠방이 하나 걸치고 동상이 걸린 맨발로 산과 계곡을 타던 영혼들 앞에 무슨 항변이 가하리요. 일제 전선을 부수기 위해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영령들 앞에 열개인들 어떻게 입을 벌리랴!

출옥한 다음 해 52년에 그녀는 옥중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회한이 담긴 시편들 “오산이었다” “영어에서” 등을 엮어 위에서도 말한 바 <별을 쳐다보며>라는 시집을 발간한다. 55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는가하면 경성방송국 촉탁을 지내는 등,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정국에서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노천명 역시 민족적 어떤 제재도 없이 명예롭게 살다가 57년 6월 16일에 사망한다. 또한 2001년에는 현대시문학연구회에서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었으니 국민의 혈세를 누수시키며 우리 민족의 얼룩이요 치욕이 지금도 후세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청산되지 못한 역사로 인해  다시금 우리 조국을 찬탈하고 우리 민족의 찬연한 역사를 훼손하려는 이무기들이 대선전에 나와 어정거리는 꼴을 차마 날마다 보고 있다. 그들을 떼지어 환호하는 세력들이 버젓이 백주를 뒤덮으니  오호 통재라!

극장가와 인터넷에서 불고 있는 친일 행각 청산의 열풍! ​​​​​​​https://img.hani.co.kr/imgdb/resize/2015/0818/143981390091_20150818.JPG
극장가와 인터넷에서 불고 있는 친일 행각 청산의 열풍!풍! https://img.hani.co.kr/imgdb/resize/2015/0818/143981390091_20150818.JPG

 

사진 : 한겨레 포토

참고 문헌 :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친일인명사전, 위키백과, 한민족문화대백과 등

편집 : 

김승원 주주통신원  heajoe@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