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현의 <묘지의 노래> - 늘샘의 명시 단평 -

나의 등단 초창기 시다. 글이라도 쓰지 않고는 생을 지탱할 수 없었던  때. 지금 들여다 보아도 끔찍했던 세월이었다. 문학론? 시론? 어느 것 하나 서 있지 않았던 습작과 같은 시였다. 그러나 생애 중 가장 비극적이지만 내 영혼을 가장 드러낸 시라고 자평하기에 누군가의 진정한 평을 듣고 싶었으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우연히 늘샘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찬사를 듣는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귀 오고 말리라 홀로 기약하---" 던 그 숲으로, 가장 커다란 귀를 가진  늘샘이 오신 것일까? 

                                                                                                                                                                                              사진 출처 - 필자
                                                                                                                                                                                              사진 출처 - 필자

■늘샘 ( 김상천)의 명시단평 
-김자현 님의 '묘지의 노래'

세계 '앞에' 마주 선 궁핍한 시대의 시인!
우연의 새라 했던가...

나는 이 만만치 않은 장시를 어티케 해설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다가온 버스처럼 하이데거의 버스에 올라탔다. 빈 자리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편안하게 여정을 즐길 수 있었다. 

묘지의 노래

밤이면 행장을 갖추고 
그늘진 성의 뒷문을 나선다
우울한 골짜기 위로 
젖은 눈으로 검을 별을 쫓는 너를 본다
밀도를 상실한 침묵 위로
떠났던 바람이 온다
生子와 死者
무례한 이름들이 
빈 그루터기 위에서 하나가 된다
검푸른 그물이 던져진 숲
창백한 달빛을 건너
내 살에 뿌리를 내린 목관악기가 자라
청중 없는 연주를 한다
언젠가 이 숲에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귀
오리라 홀로 기약하면서

 

비석과 나무들 사이
큰 키의 갈대 무성한, 버려진 묘혈을 넘어
지난날의 노래가 들린다
가장 오래도록 잊을 것 같지 않던 사랑하던 사람들
눈물의 골짜기 마르기도 전
패인 웃음 날리며 구더기 덤비듯

만찬과 관능에 몸 떠는 것을 본다
지상에 놓고 온 
지난날 흔적들 찾아 기웃거리던 영혼들
새벽에 쓸쓸히 
회한의 성으로 돌아오면
질투의 시신들이 관 속에서 몸 부딪는 소리 숲을 흔들 때
지상에 어느 곳 하나 
찾아 나설 흔적도 없는 비탄에 나는 통곡한다

 

어둠의 성곽은 신이 소리를 먹어버린 곳
하늘에 닿는 기도 소리와 
묘혈을 파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는 곳
떠나 온 세상의 낙과 소리도 
깊은 우물에 두레박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벌써 그리운 
생자들의 다투던 소리
벌떡 일어나 단 한 번 비명으로 
침묵하는 성채에 잠자는 고인 일시에 깨우고
시신의 입술에 구더기 기어오르는 
소리까지 들리는 적막을 찢고 싶다

 

겨울이 오고 
흰 눈발이 숲에 점묘의 수채화 그리던 날
가을에 던져두었던 
으름, 도토리 찾는 청설모가
눈가루 날리며 능청거리는 나뭇가지를 탄다

낮이 점차 떠나고 
어둠의 사람들 어디로 갔는지
숲이 무거운 속눈썹을 내려 감을 때
영혼은 이제야 진정 살았노라고
숲을 점령한 어둠이 
어떻게 우리의 낮을 삼켜가는지
내게 들려주곤 한다


먼 마을에서 들리는 
닭소리에 놀라 
황망히 내 본거지에 이르면
다른 하나의 내가 
어느 석수장이가 쪼았을 비문을 지우며
그 비석에 새 핏줄 찔러 넣는 것을 
젖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겨울도 지난 발아의 신열로
대지가 꿈틀거리는 사월!
아직도 끝내지 못한 방황하는 영혼이 발견한다
어디선가 벌 떼의 왱왱거리는 소리
무덤과 무덤 사이 양지바른 곳에
全裸의 남과 녀
마늘로 코뼈 해 박고 손마디 끊어져 나간
몸둥이 하나는 문둥이, 하나는 소경
관능의 춤이 멈출 때마다 
사뿐히 내려앉는 벌 떼가 아닌 파리 떼!
어디가 묘지이고 어디가 지상인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 온 영혼이 
비석에 기대어 무언가 웅얼거렸지만
내 귀는 이미 떨어져 나간 뒤
영혼은 차츰
육탈해 가는 제 육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구름에 가리운 태양이
희미한 빛을 뿜던 어느 날
서걱대는 삽질 소리
봉분 다지는 소리
누가 또 고통의 바다 건너 숲의 사람이 되었나
상념에 젖어 나는 들었다
바람에 실려 
언덕을 넘는 경건한 기도
젊고 늠름한 수사의 목소리
관 뚜껑 위로 작은 꽃 뭉치 던지고 돌아서는 
시든 가족들의 긴 발자국
영혼은 젊은 목소리에게 다가가
청춘의 화살을 꽂고 말았다
젊은 수사는 놀라 가 버리고 영혼은 슬픔에 잠겨 있다
다시 밤이 오고 
성문 여는 소리가 숲을 진동한다
흉측하게 산화된 제 얼굴을 외면하는 영혼이여!
나는 다가가 너를 안는다
노래하라, 노래는 묻히지 않으리
자고 나면 지금 부르지 못한 노래가 
더 큰 회한으로 남으리
노래는 썩지 않으리

-김자현의 '묘지의 노래' 전문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 이것은 김수영을 사로잡은 하이데거의 그 유명한 릴케론이다. 횔덜린의 질문을 모두母頭로 릴케 만년의 즉흥시를 소재로 삼아, 신이 떠나가 버린 궁핍한 시대에 시인이 떠맡아야 할 사명은 어디에 있는가를 진지하게 숙고한 천고에 빛나는 명문이다. 김수영이 외우다시피 하먼서 자신의 철학적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 '반시론'의 근거가 된 바로 그 문장이 아닌가.

자, 이 하이데거의 명문이 김수영의 그것과 함께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체 그것은 하나의 철학적 시론으로서 금줄처럼 빛나는 의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 철학적 시론의 핵심으로 박혀있는 것은 바로 '모험으로서의 시쓰기'가 아니었던가. 왜 모험인가. 신이, 가치가, 모럴이 사라진 시대는 대지가 온통 거짓들fakes로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하여 한용운이 '온갖 윤리, 도덕, 법륜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줄 알았('당신을 보았습니다')'던 것처럼, 꼭 그처럼 우리의 시인 김수영 또한 시의 본질은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라며 시작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시에 있어서의 모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건 과연 모험이다. 대체 그 어떤 미친 놈이 하루의 일상을 살아내기도 버거운데 시적 모험의 세계에 자신을 내던진단 말인가. 모험은 의지된 것이고 모험은 또한 결정된 것이다. 모험은 니체적이고 또한 하이데거적이다. 그리하여 그는 보호받지 못한 존재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는 보호받은 존재다. 왜냐하먼 그는 모험 속에서 오히려 중심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의지와 결단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모험의 중심에 서서 '시적 저울'로서의 그만의  눈금과 눈깔을 달고, 그만의 먹줄을 튕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삶의, 역사의, 존재의 본원에 닿아 있는 묘지 너머 웅웅거리는 벌떼들의 소리...

그리하여 여기, 김자현의 '묘지의 노래'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궁핍한 시대에 던지는 모험으로서의 시작이 아닐 수 없고, 또한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비범한 시인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먼저 마주치게 되는 '밤'이라는 시적 공간은 우리가 또한 마주하게 되는 (궁핍한) 시대의 어둠을 암유하지 않것는가. 대체 왜 그의 노래가 어둠이고, 밤이고, 묘지란 말인가. 왜 그의 노래는 저 단테처럼 다크하단 말인가. 그것은 그대로 궁핍한 시대는 모든 것이, 진실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궁핍한 시대의 노래는 자연 시적 모험으로서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모험을, 검은 별을 쫓는 예언의 나팔소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숲에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귀
오리라 홀로 기억하면서

그리하여 그가 이렇게 귀를, 소리를, 노래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예언의 목소리로 그늘진 성, 회한의 성, 어둠의 성곽으로 상징되고 있는 이 땅의 궁핍한 세계에서는 진실의 소리, 양심의 소리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대의 진실을, 아니 어둠을 노래하는 목관악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언젠가 나의 예언의 목소리를, 모든 것이 죽음뿐인 현실을 노래하고 있는 나의 노래를 기억할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죽음을, 어둠을 기피하는 것처럼 진실을 기피한다. 왜 그의 노래에는 청중이 없는가. 왜 그의 앞에는 짤랑거리는 동전 한 푼 떨어지지 않는가. 그것은 그의 시가 과연 어둠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가 묘지이고 어디가 지상인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 온 영혼이 
비석에 기대어 무언가 웅얼거렸지만
내 귀는 이미 떨어져 나간 뒤
영혼은 차츰
육탈해 가는 제 육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
흉측하게 산화된 제 얼굴을 외면하는 영혼이여!
나는 다가가 너를 안는다 
 

바로 여기, 모다덜 기피하는 영혼들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제 얼굴을... 그러나 나는 다가가 안는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시적 모험으로서 지금, 여기 이땅의 어둠을, 은폐된 진실을 노래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나는 안다 왜 나의 노래가 썩지 않는지...

궁핍한 시대는 고뇌와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본질의 비은폐성이 결여되어 있는 시대다. 그러나 여기, 김자현의 '묘지의 노래'는 하나의 개시disclose로서 이런 궁핍한 시대의 어둔 세계 현실 속에서도 썩지 않는 진실을, 육탈해 가고 있는 슬븐 영혼들을 노래하것다는 불후의 신념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 시인들은 성스러운 밤의 나라에서 나라로 여행하는 주신의 성스러운 사제들과 같다고 횔덜린이 노래한 것처럼, 꼭 그처럼 그 또한 신이 소리를 먹어버린 궁핍한 시대, 어둠의 성곽 같은 묘지에서 시적 모험으로서의 예언의 나팔을 불며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귀가 오리라 홀로 기약하는 이땅의 성스러운 여사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세계 '앞에' 서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사진 출처-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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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은 평자의 표기를 그대로 살린 것임.                         

 

편집 :  영성숙 편집위원

김승원 주주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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