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이후 겨우 유지해가던 사업을 접고 삼성 휴대폰 소프트웨어개발 업체에서 일할 때였다. 회사서 금오산 등반을 갔는데 숨이 턱밑까지 차 동료들을 따라잡기도 힘들었다. 저질체력으로 세상 살아가기 힘들 것 같아 주말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용지봉을 찾기 시작했다. 어느 봄날 산을 내려오다 잠시 나무 밑에 앉아 쉰 적이 있다. 앉아있다 그대로 뒤로 누웠다. 옆에서 향기가 나 고개를 돌리니 하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용지봉에서 누워  본  그 꽃
용지봉에서 누워  본  그 꽃

넓은 잎아래 너무나 귀여운 작은 꽃들이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누워야 보이는 꽃들도 있구나 하며 한참을 보다 가벼운 발길로 산을 내려왔다.

용지봉 하얀꽃
용지봉 하얀꽃

그로부터 며칠 후 난을 좋아하는 한 친구가 KBS방송국에서 하는 야생화 전시회를 보러가자고 했다. 흔쾌히 따라나섰는데 아주 볼 만 했다. 마지막 코너를 도는데 얼마 전 용지봉에 만난 그 하얀 꽃이 전시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 꽃은 눕지 않아도 잘 보였다. 이름까지도 예뻤다. 은방울꽃!. 꽃에 딱 맞는 이름이었다. 내가 처음 알게 된 야생화 이름이다.

2007년 대구 KBS방송국  야생화 전시회 '은방울꽃'
2007년 대구 KBS방송국  야생화 전시회 '은방울꽃'

그때부터 산에 가면 꽃들이 눈에 들어 왔다. 사진을 찍어 내려와 인터넷을 뒤지면 이름이 나왔다. 비슷한 시기에 산을 오른 그 꽃 이름을 아는 다른 이가 사진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이름을 알아갔다. 그 무렵 친구들과 용지봉을 오르다 어떤 바위 위에서 쉬는데 그 주위에 하얀 꽃들이 수북히 떨어져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한 나무에 하얀꽃이 많이도 매달려 있었다. 내려와 찾아보니 때죽나무였다. 이렇게 또 하나 꽃이름을 알았다.

2007년 용지봉 때죽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 친구.
2007년 용지봉 때죽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 친구.
때죽나무 꽃
때죽나무 꽃

그러다 또 다른 친구들과 설악산을 간 적이 있다. 때죽나무 꽃들이 보였다. 난 친구들에게 이게 때죽나무라고 아는 척을 하는데 옆에 있던 산객이 이건 때죽나무가 아니고 쪽동백입니다했다. 꽃은 정말 닮았는데 잎이 둥글고, 꽃이 매달린 형태가 달랐다. 이렇게 또 하나 배우게 되었다.

쪽동백나무 꽃
쪽동백나무 꽃

대구서는 용지봉, 서울에서는 관악산을 주로 다니다 보니 꽤 많은 꽃 이름을 알게 되았다. 얼마 전 제주도에 여행 간 친구가 어느 화단에 핀 꽃을 몇장 찍어 보내 나에게 이름을 물어왔다. 그 친구에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용지봉, 관악산, 검무산에 피는 꽃 이름만 아니더. 첨보는 사람 이름을 모르 듯 첨보는 제주 꽃 이름은 모르니더. 꽃도 사람과 같아여. 첨 만나면 눈인사만 하고, 또 보면 이름 알고, 자꾸 만나 부르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름 익히는거니더.’라고.

요즘 산을 자주 못 가 이름을 하나씩 잊어버리고 산다. 지난주 대구서 오랜만에 친구 둘과 술 한잔했다. 경북대 생물학과 교수인 친구가 머지않아 DNA를 분석해 바로 식물이름을 알려주는 휴대용 기계가 나올 거라고 했다. 볼 때마다 헷갈리는 꽃들, 알 듯 말 듯 이름이 바로 생각나지 않는 꽃들을 만나면 새로운 디지털 기기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난 아직은 아나로그 감성이 좋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박효삼 편집위원  psalm60@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