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21일 중국 길림성에서 <대한독립선언>이, 28일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31일 서울에서 <기미독립선언>이 선포되었다. 독립선언은 들풀처럼 일어나 온 나라의 민중을 깨웠다. 국내를 넘어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여러 지역에서 거족적으로 독립선언이 선포되었다. 이렇게 고취된 독립정신으로 연해주와 중국, 서울에서 임시정부가 결성되었고, 이후 세 지역의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19194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자주독립의 열망이 고조되던 1919년 당시 북간도 봉오동에는 정식 군사훈련을 받고 신형무기로 완전무장하고 정규군 편제를 갖춘 독립군부대 <도독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1912년 창설한 사병부대가 자연스럽게 무장독립군부대<도독부>로 전환되었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독립군이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봉오동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최운산 장군을 만나 정예 독립군으로 양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운산 장군은 자신이 운영하던  독립군부대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했다.  이때부터 최운산 장군 혼자가 아니라 형제들이 모두 항일 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첫째 최진동이 사령관을, 둘째 최운산이 참모장을, 셋째 최치흥은 작전 참모를 맡아 지휘부를 구성했다. 나이 어린 넷째 명철은 군자금 심부름 등으로 뒤에서 도왔다.

대한민국 수립 2년차인 1920년, 임시정부는 독립전쟁 원년의 해를 선포하고 대한민국2년 1월 국무원포고1를 공표했다. 전국의 애국 청년들에게 '독립군에 지원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 산재한 '제 독립군부대의 통합을 요청'한 것이다.

1919년 후반 서일 총재와 함께 자신의 소유지 서대파에 북로군정서를 세운 최운산 장군은 이런 임시정부의 계획과 요구에 발맞추어 북간도 무장독립운동단체 통합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서둘러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대규모로 매각하는 등 군자금 마련에 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기미년 독립선언 이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목숨을 바쳐 독립군이 되겠다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들어왔다. 깨어난 민족정신으로 무장투쟁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급증한 지원자들을 정예 독립군으로 양성하려면 제대로 된 군사훈련이 필요했다.

최운산 장군은 통합에 참여하는 각 부대의 주둔지로 내어주고  무기와 식량, 군복을 제공했다. 부인 김성녀 여사는 8대의  재봉틀을 구입해 봉오동의 부녀자들과  함께 군복을 쉬지  않고 만들었다. 1920년이 되자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 십리평에 단기 사괸한교를 지어 6개월 코스의 군사훈련기관 <사관연성소>(소장 김좌진)를 설립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기 공급이었다. 독립군의 숫자가 늘어난 만큼 더 많은 무기가 필요했다. 최운산 장군은 19201월 석현지역의 대규모 토지를 매각한 대금 5만원으로 체코구단으로부터 신형무기를 구입했다. 당시 일제보고서에 소총 500정 구입. 탄환 5만발, 권총 430, 권총탄환 5천발, 기관총 2문 구입(319일 보고)”, “소총 700정 구입(45일 보고)“ 등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무기구매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319일과 45, 두 번의 보고서에 적힌 소총의 숫자만 합해도 1200정이다. 주로 지휘관들이 사용하는 권총 430정과 소총탄환 5만 발과 권총탄환 오천 발, 그리고 두 대의 신형 기관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대규모 구매 기록 외에 일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무기구입도 있었을 것이다.

대한북로독군부(사령관 최진동) 독립군이 연해주에서 신형무기를 구입해 봉오동으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적힌 1920년 4월 5일 일제 보고서
대한북로독군부(사령관 최진동) 독립군이 연해주에서 신형무기를 구입해 봉오동으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적힌 1920년 4월 5일 일제 보고서

이 문서에서 보듯이 일본군은 봉오동에 모인 독립군의 규모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새로 구입한 무기의 규모만으로도 봉오동에 모였던 독립군의 숫자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는 1919년 기록에서 <대한군무도독부>670명의 무장한 독립군이라고 표현했다.

이미 완전무장한 <대한군무도독부><북로군정서>를 비롯해 통합에 참여한 <광복단>, <의군단>, <신민단>, <국민회>, 그리고 <맹호단>을 비롯한 북간도의 독립군 제 단체들, 훈련 중인 사관연성소의 훈련병, 그리고 활발하게 교류하던 연해주의 독립군들이 봉오동으로 합류해 수천 명의 독립군이 봉오동 부근에 모였다

명실 공히 대군단이 결성된 것이다. 최운산 장군의 결단과 재력으로 독립군에게 꼭 필요한 무기가 공급되었다. 봉오동의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는 수천 정의 소총과 수십 정의 기관총, 대포 10여 문과 권총 수백 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북간도의 독립군들이 대한민국2년(1920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통합논의에 들어가 5월 11일 6개 단체가 18개항의 재 북간도 각 기관 협의회 서약서를 발표했고, 대한민국2년 5월19일 <대한군무도독부><국민회>가 영구통합에 서명함으로 <대한북로독군부>가 창설되었다.

본격적인 전쟁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군을 봉오동 깊숙이 끌어들이는 매복작전을 선택하고 일본군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마다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했다. 봉오동 상촌의 연병장을 둘러싼 각 산위에 연대별로 전투부대가 배치되었다. 실전 경험이 많은 <대한군무도독부>가 통합군단의 중심에서 전투훈련을 이끌었다.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는 일본군의 습격에 대비하는 한편 수시로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벌였다봉오동에서 10년 이상 훈련 양성된 실전 경험이 많은 정예군 <대한군무도독부>가 대부분의 작전을 수행했다.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된 대한민국2년 1월부터 6월까지 봉오동 독립군에 의해 시도된 60~70 차례의 국내진공작전의 대부분이 <대한군무도독부>가 결행한 것이다.

이렇게 수천 독립군이 봉오동에 모여 세력을 확장하고 국내진공작전을 거듭하며 헌병대와 국경수비대를 급습하자 두만강변 국경 경비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 토벌계획을 세우고 두만강을 건너와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대한북로독군부>는 일본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모든 전쟁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당시 아시아 최강 군대 중 하나인 일본군과의 정규전에서 우리 독립군이 승리한다는 것은 요행이나 애국심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최운산 장군은 오랜 기간 독립군을 모집해 군사력을 갖추었고, 무기를 구입했다. 청년시절부터 맺어온 중국군과의 신뢰관계와 대러시아군 무역업으로 다져진 첩보력으로 주변국의 정치상황과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형제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독립군의 전력을 충분히 보충하며 전쟁에 대비했던 것이다. 

봉오동 독립전쟁 당시 (대한민국2년) 독립군이 사용한 태극기
봉오동 독립전쟁 당시 (대한민국2년) 독립군이 사용한 태극기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는 봉오동을 독립군기지로 만들고 10년 이상 독립군을 양성한 최운산 장군의 집념과 준비, 그리고 3.1 독립선언 이후 높아진 독립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독립군이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우기로 결심했던 수많은 애국청년들의 도전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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