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주기 어머니를 그리며

나는 큰아들이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다. 기대 또한 컸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틈날 때마다 큰아들에 대한 기대를 피력하곤 하셨다. 낡은 유교 폐습 때문인지 큰아들에 대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그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 부모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학교 공부를 곧잘 했다. 달마다 치는 일제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었고 전체 운동장 조회가 열리는 날 앞으로 나가 상장을 받았다. 그날 오후 상장을 보여드리면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머릴 2cm 이하로 빡빡 밀어야 했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여전히 6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과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생활하는 게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나마 학교 마치면 운동장에서 마음껏 공을 찰 수 있었다. 그렇지만 중학교 시절엔 오로지 학교와 집을 오갔을 뿐이다. 해질녘 어스름할 때까지 공을 차며 놀던 자유를 누리질 못했다. 더구나 함께 공 차고 토·일요일이면 부산고등학교 위쪽 선화여상에 올라가서 야구를 했던 즐거움도 사라졌다. 한 마디로 초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 모임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야구를 하다가 풀밭에 누워 하얀 뭉게구름을 보던 경이로운 즐거움도 당연히 누릴 수 없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심연을 깨닫게 한 하얀 뭉게구름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었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은 7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이다. 나에게 어두운 기억을 아로새긴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은 그냥 수용소 같았다. 솔직히 어두운 기억밖에 없다. 그런 감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께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시며 그윽한 눈길을 보냈을 뿐, 이렇다 저렇다 딱히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70년대 유신 정권 시절엔 학급회장(당시엔 일제식 용어로 ‘반장’이라 불렀음)이 임명제였다. 담임 교사가 지명하면 해야 했다. 글쓴이는 조용히 공부만 하고 싶었는데 언제나 매 학년 학급회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기억 한 자락은 이미 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시작하였다. 여러 학급 친구들 앞에서 담임 교사에게 뺨을 얻어맞은 사건이다. 기름칠한 복도 마루에서 같이 뒹굴고 씨름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손을 대지 않았다. 담임 교사는 회장인 나를 끌고 와 때렸다. 그것도 자신이 신던 슬리퍼를 벗어서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론 키 작은 어린 초등생 뺨을 움켜쥔 채, 자신의 키만큼 힘껏 잡아 끌어올린 뒤 슬리퍼로 갈겼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까진 방과 후 함께 공을 차고 야구를 했던 친구들이 있어서 그나마 그런 슬픔과 어두운 기억을 이겨냈다. 그조차 없었다면 아마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엔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 대표 야구선수로 활동할 때였는데 야구코치는 항상 술에 취한 듯한 얼굴로 우리에게 성추행을 일삼았다. 동아대학교 운동장에서 동성초등학교 야구부와 경기를 치렀을 때 콜드게임으로 패하자 바로 운동장에 엎드려뻗쳐를 시킨 채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저만치서 대학생들이 보고 있었는데 어린 마음이지만 창피했다. 야구부를 탈퇴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학교 공부 마치고 야구부 코치 눈길을 피해 바로 도망갈 궁리만 했던 시절, 어머니가 나서서 깔끔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때 어머니는 내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아셨는지 나를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셨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엔 그렇질 못했다. 체육 시간 운동장에 학우들을 늦게 집합시켰다고 전체 앞에서 모멸스러운 꾸중을 들어야 했다. 고교 시절엔 아침마다 복장 검사에 걸려 운동장을 돌거나 오리걸음을 강요받았다. 뺨 맞는 것은 일상이었다. 엎드려 뻗친 상태에서 마대 걸레 자루로 풀 스윙하며 맞았던 아픈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다. 학생부 교무실 옆을 지나치면 몽둥이로 때리는 소리와 ‘억’하는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그 시절 학교는 어둠 그 자체였다. 그리고 거친 경상도 부산 말씨가 몹시도 귀에 거슬렸다.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어떻게 그 시절을 이겨냈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내가 다닌 학교는 재단이 소유한 사립학교였는데 산기슭에 초등학교, 산 중턱에 중학교, 산꼭대기에 고등학교가 있었다.

아침마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산꼭대기에 위치한 교문을 향해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바짝 긴장한 채 교문을 통과하던 그 순간은 군대 위병소 정문을 통과하는 것만큼 긴장되고 힘들었다. 군인 출신 교련 교사들과 체육 교사들이 험악한 인상을 쓰고 범죄자 검문하듯이 위아래를 훑어보았으니까! 만일에 재수 없이 “너 이리 나와!”하며 손가락 총이라도 맞는 날이면 그날 아침은 침울한 하루로 시작했다.

재단 이사장은 여러 개 학교를 소유했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마한 인물이다. 50년 가까이 지난 옛날 일이지만 이름자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학교 부조리가 얼마나 심했던지 학생들 눈에 비칠 정도였으니까! 교사들이 뺨을 때리거나 구타하는 게 일상인 학교였다. 여름방학 강제 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은 날은 그 이튿날 어김없이 기다란 마대 걸레 자루로 풀 스윙을 당했다. 그 어두운 시절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분이 어머니였다.

어느 날은 머리가 3cm로 길다며 학생부로 끌려갔다. 그 교사는 가로세로 고속도로를 내며 빈정대는 투로 근엄하게 꾸짖었다. “공부만 잘한다고 훌륭한 학생은 아니야! 교칙을 잘 지켜야지! 그게 학생다운 품성을 간직한 모습이잖아!” 하면서 내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주곤 했다. 그런 날은 버스를 타고 갈 순 없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누가 볼 새라 골목 사이사이로 학교가 있는 남구 문현동에서 동구 초량동 집까지 2시간 가까이 걸어 다녀야 했다. 일명 바리캉으로 머리를 짧게 깎인 날,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탔다가 버스 뒤쪽 여학생들이 킥킥대며 웃는 모습이 무척 싫었기 때문이다.

고1 땐 매주 국영수 주초 고사 시험을 쳤다. 그리고 교무실로 불려가 40대씩 맞았다. 그러다 보니 월요병이 절로 생겼다. 고등학교 때도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힘들어하셨다. 어지간하면 그냥 다니라는 말씀과 함께... 나는 내면으로 삭혔고 그냥 웃음기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 70년대 중후반 그 시절엔 4·19혁명 기념일이 다가와도 4·19혁명을 이야기해주는 교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교사들이 주춤거리며 두려워하던 모습이 학생들 눈에 느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각반 차고 목총 메고 분열과 사열을 할 때 오와 열을 맞추지 못했다고 어디선가 느닷없이 달려와 싸대기를 후려치던 교사들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어느 날은 구덕운동장으로 총기 시범 대회에 참가한다고 교련 복장으로 참여했다. 1분 이내에 카빈소총을 분해했다가 다시 결합하는 대회였다. 능숙한 친구들은 1분 이내에 충분히 해냈다. 가만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70년대 유신 시절이나 일제강점기 시절이나 학교 교육은 파시즘 교육 그 자체였다. 학교가 병영화되어 분열과 사열을 강요했고 당시, 학급회장은 소대장, 학년장은 대대장, 학생장은 연대장, 그리고 교장은 단장이라 칭했다.

그런 고교 시절에도 기다려지는 시간이 있었다. 바로 점심시간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우들은 도시락(일본식 벤또)을 열고 허겁지겁 먹는다. 대부분 밥에다 김치를 반찬으로 갖고 오는데 동명목재 전무이사 아들인 그 친구는 소시지를 반찬으로 담아왔다. 모두 한 점씩 먹어보고 싶어 하던 그 눈빛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러면 그 친구는 가끔 자기 반찬을 먹어보라며 건네기도 했다. 어쩌다 달걀 프라이를 밥에 얹어오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모두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가끔 달걀 프라이에다 솔김치, 그리고 멸치볶음과 이것저것 반찬들을 정성껏 담아주셨다. 항상 도시락은 두 개씩 싸 왔다.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강제로 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까.

대학 시절 큰아들인 글쓴이는 부모님 기대대로 고시를 준비하다 그만두었다. 시대 상황이 고시 공부를 하도록 마냥 허락하지 않았다. 고시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어떤 땐 부끄러웠다. 특히 80년 오월 광주 학살은 청년 대학생들 가슴을 마구 뛰게 했다. 야학 친구가 해남 고향에 갖다가 광주를 들러 가져온 유인물, ‘전두환 광주 살육 작전’이란 제목의 글은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조선대 학생 민주주의 투쟁위원회’ 이름으로 나온 유인물이었는데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다.

그런 시대 상황에서 부모님도 더 이상 고시를 기대하진 않는 듯하셨다. 다만 야학 활동을 할 때 경찰서를 오갔던 사건 때문인지 방학 때 형사가 찾아오면 걱정 어린 말씀을 하셨을 뿐 언제나 큰아들을 믿어주셨다. 큰아들이 기대에 미치진 못했을지언정 어머니는 언제나 글쓴이를 자랑스러워하셨고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무엇보다 내 기억에 가장 깊숙이 남아 있는 어머니 사랑은 89년 전교조로 해직당하고 91년 어린 두 아들을 부산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였다.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1991년 부산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밝은 얼굴로 맞아주셨다. 2년 가까이 머무는 동안 어머니는 큰손자와 작은 손자를 안고 업고 애써 키워주셨다. (출처 : 하성환)
1991년 부산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밝은 얼굴로 맞아주셨다. 2년 가까이 머무는 동안 어머니는 큰손자와 작은 손자를 안고 업고 애써 키워주셨다. (출처 : 하성환)

서너 살 된 큰 손자와 한두 살 된 작은 손자를 업고 안고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잘 키워주셨다.

부산 영도구 동삼동 어머니 댁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두 아들 모습. 도롯가 찻길이라 위험했지만 부모님의 각별한 보살핌과 사랑으로 밝게 컸다.(출처 : 하성환)
부산 영도구 동삼동 어머니 댁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두 아들 모습. 도롯가 찻길이라 위험했지만 부모님의 각별한 보살핌과 사랑으로 밝게 컸다.(출처 : 하성환)

허리가 많이 아프셨을 텐데도 어린 큰 손자가 자다가 악몽을 꾸어 깨어나 울면 안방에서 선잠을 주무시던 어머니는 어떻게 아셨는지 바로 달려 나오셨다. 그리고 어머니 품 안에 안고 다시 잠들 때까지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셨다.

작은 고모 내외가 일하던 한의원에서 작은 고모부에게 안긴 큰 아들. 한의원 간호사들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았다.(출처 : 하성환)
작은 고모 내외가 일하던 한의원에서 작은 고모부에게 안긴 큰 아들. 한의원 간호사들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았다.(출처 : 하성환)

선친께선 매주 주일마다 큰손자를 베스타 승합차에 태우고 교회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리고 평일엔 승합차를 몰고 한의원을 다녀오셨다. 그때마다 큰손자를 데리고 다니셨다.

부산 영도구 태종대 놀이공원에서 어머니가 두 손자와 함께 한 모습(출처 : 하성환)
부산 영도구 태종대 놀이공원에서 어머니가 두 손자와 함께 한 모습(출처 : 하성환)
부산 부모님 댁 조그만 마당 안에서 더운 여름날 큰 물통에다 물을 가득 담아 어머니는 어린 손자들이 즐겁게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물놀이하던 손자들 모습을 보며 마냥 흐뭇해하셨다.(출처 : 하성환)
부산 부모님 댁 조그만 마당 안에서 더운 여름날 큰 물통에다 물을 가득 담아 어머니는 어린 손자들이 즐겁게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물놀이하던 손자들 모습을 보며 마냥 흐뭇해하셨다.(출처 : 하성환)

아마도  큰손자인 내 큰아들은 그 시절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누님이 영도여고 교사 시절, 부산 영도 부모님 댁으로 내려왔을 때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사촌누나들과 함께 글쓴이 큰아들이 기차놀이하는 모습. 큰아들이 사촌누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무척 따랐다.(출처 : 하성환)
누님이 영도여고 교사 시절, 부산 영도 부모님 댁으로 내려왔을 때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사촌누나들과 함께 글쓴이 큰아들이 기차놀이하는 모습. 큰아들이 사촌누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무척 따랐다.(출처 : 하성환)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리고 한의원에서도 사람들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밝게 자랐으니까.

어느 날 작은 손자가 커서 대학생이 되고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살갑게 마주했을 때 어머니는 옛날을 회상하며 웃음 짓곤 하셨다. 그러면 작은 손자는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어머니께 보여드렸다. 그러면 어머니는 무척 행복해하셨다. “잘 컸네! 언제 이렇게 컸냐!”며 대견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며 흐뭇해하셨다.

국가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70-80년대 그 어두운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따뜻한 사랑과 걱정 가득한 눈길을 받으며 그 어두운 시절을 견뎌냈던 것 같다. 이제 어머니가 하늘로 돌아가신 지 1주기가 다가온다. 부산엘 내려가면 언제나 환한 얼굴로 맞아주셨던 어머니가 오늘따라 더욱 그립고 그립다. 선잠을 주무시며 한없는 사랑과 걱정 속에 한평생을 보내셨던 어머니가 하늘에서나마 평화와 안식을 누리길 마음으로 빌고 추모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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