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삭 공적 증거 자료를 찾아서 (5) -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 김동수 교감역주 호남절의록

호남절의록은 정조 23년 (1799년) 최초 발간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후일 학자나 광주향교, 전라남도가 재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중 김동수 교수의 ⌜호남절의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동수 교수는 책머리 일러두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호남절의록⌟은 조선 정조 때 편간된 것으로 현재 16종의 판본이 전하고 있는데, 이 판본들에 따라 내용이 약간씩 다른 점이 있다.  따라서 교감·역주 작업을 하기 위해 이들 중 어느 것을 저본으로 삼을 것인지 먼저 결정할 필요가 있다. 이에 서지학전공 연구자인 전남대학교의 노기춘(盧基春) 선생께 판본의 대조 작업을 의뢰 하였고, 그 결과 〈국립중앙도서관본〉 (한古56-나170)을 비롯한 15종은 같은 판각이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491)소장본은 이와 달리 후대에 교정 보각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중앙도서관본과 내용상 차이가 없으며 이용하기에 편한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효안oc2h1gh211r)을 지본으로 하고 장서각소장본을 대조 비교 하였다.”라고 기록 하였다.

 이 호남 절의록 p245에서 p258에 걸쳐 임진왜란에 공적이 많은 57명의 기록이 있는데 27번째로 전방삭 장군의 기록이 있다.

▲ 호남절의록의 전방삭 장군기록

위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면

전방삭(全方朔)
자(字)는 일진(日), 본관은 천안(天安), 판관(判官) 수완(壽完)의 현손이고 진사 청(淸)의 손자이다. 효우가 투터웠고 무예가 있어 특별하게 천거되어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제수 받았다. 임진란 때 이충무공을 따라 최대성(崔大晟) · 송대립(宋大立)등과 함께 군무를 도왔다. 왜교(倭橋) · 첨산(尖山)등의 싸움에서 연승을 거두었으며 무수한 적을 참획하였으나 탄환에 맞아 죽었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세주 : 아들 판관(判官) 홍례(弘禮)는 병자란(1636년)때 강화도에서 순절 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입전(入傳) 되었다.] [낙안(樂安)]
⋇낙안이 아니고 보성(寶城)이다

다음 서적은 정조 23년(1799년) 당시 사림(士林)에서 간행된 것인데 도내에 원본 두질이 남아 있던 것을 목차와 인명록을 보완하여 5책5권을 1책으로 1990년 12월 10일 전라남도 임란사료 편집위원회가 자료를 편성하여 전라남도에서 발행한 서적이다.  

▲ 호남지방 임진왜란사료집(호남절의록)

 

▲ 호남절의록에 기록된 전방삭 장군 내용

위의 내용을 해석하면

충무 이공 순신 동순 제공 사실
전방삭 자는 일진이요 천안인 판관 수완 현손이며, 진사 청의 손자이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웁고, 무예에 특출하여 훈련원정이 되었으며 임진란 시 이충무공 막하에서 최대성, 송대립등과 함께 군무를 돕고 왜교, 첨산 전투에서 왜적을 무수히 베었으나 총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이에 선무원종공신록에 등재 되었다. 아들 훈련원 판관은 임금을 강도로 모시다 순절하니 우산 안방준이 부자를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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