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은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두만강이 가까워 강만 건너면 국내와 바로 연결이 되고, 마을 입구의 큰 길은 연길을 비롯한 중국 내륙과 이어지고, 반대쪽으로는 훈춘을 지나 연해주로 연결되는 곳이다. 그 입구에서 10km정도의 산길을 들어가면 독립군의 연병장이 있는 상촌에 도착할 수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봉오동은 아늑하고 넓은 분지형의 마을이다. 독립군들이 마음껏 소리치며 훈련하고 사격연습을 해도 아무도 방해할 사람이 없었다. 봉오동은 중국군의 간섭이 거의 없던 독립군의 자율 공간이었다.

▲ 산으로 둘러싸인 봉오동

역사학자 이강훈은 『무장독립운동사』란 책에서 봉오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왕청현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가량 떨어진 산간이다. 장백산의 지맥인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꾸불꾸불 갈 지(之)자형으로 장장 2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에 1백 수십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다. 이 부락에는 최명록 3형제가 있어서 그들의 지도 밑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써 재류동포의 생활과 기타 모든 면에서 잘 짜여져 있었다. 가옥구조도 한국식이어서 마치 국내의 한 지방 같았다. 중국인 가옥이 몇 집 끼어 있어서 며칠 있어서 며칠 만에 한번씩 중국 관헌이 순라를 돌 뿐 독립군의 자유무대였다.”

(중략)

“봉오동은 대부분이 새로 지은 번듯한 가옥인데다가 특히 상촌은 도로망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연적으로 일부당천 만부부당한 요새로 된 것을 인공을 가해서 어떠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꾸미자는 계획이었다. 마을 한쪽에는 새로 지은 목조 교사가 있었으며, 교사 앞에는 독립군의 연병장이 있었다.” 

▲ 독립군 출신 역사학자 이강훈의 무장독립운동사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봉오동을 모른다. 일본 정규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둔 자랑스러운 독립전쟁 ‘봉오동전투’는 알고 있지만, 그 전쟁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왜 ‘봉오동전투’라고 부르고 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다. 

1920년 당시 봉오동의 대한군무도독부군이 두만강 국경수비대를 자주 공격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고, 북간도 전역의 독립군이 단일 지휘체계로 통합하여 봉오동에 수천의 독립군이 결집하는 등 규모가 점점 커지자 일본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봉오동에서 독립군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버리겠다고 두만강을 건너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으로 쳐들어 왔다는 걸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공산화 되고,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오래도록 봉오동은 눈으로 가보고 확인할 수 없는 땅이 되었다. 해방 당시 봉오동전투에 참전했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대부분 돌아가셨고 100년 가까운 세월이 무심히 흘렀다. 그 사이 봉오동전투의 승리를 비롯한 북간도 무장독립운동사는 남쪽으로 내려온 독립군 출신 한 두 사람의 기록에 의존해 왜곡, 축소된 채로 상상의 세계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1970년대 후반 중국 정부가 봉오동의 계곡을 막아 대형 댐을 건설했다. 논농사로 수천 독립군의 식량을 해결할 수 있었던 봉오동의 맑은 강물은 도문시를 비롯한 인근의 지역민의 수자원이 되었다. 봉오동 상촌, 중촌, 하촌 세 마을 중 하촌은 댐에 잠겨버렸다. 댐 건설로 봉오동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야 했다. 근처 도문시나 댐 아래 마을 수남촌으로 옮긴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장춘, 광주, 북경 등 아주 먼 도시로 이주했다. 

▲ 봉오동댐

봉오동전투의 역사를 가족사로 품고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수자원보호구역이 되어버린 산골 봉오동은 지난 역사를 모두 잃어버렸다. 댐이 지어지고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사이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은 폐허가 되었고 숲으로 돌아갔다. 

1992년 대한민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은 후 한국의 역사학자들과 답사단이 '봉오동전투'의 흔적을 더듬어 봉오동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장을 다녀온 모든 사람들이 봉오저수지가 전투현장이라고 오해하기 시작했다. 답사단들은 댐 위에 올라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리며 독립운동의 횃불을 밝혔던 '봉오동전투'의 현장은 모두 이 물 속에 잠겨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전적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오랜 세월 봉오동전투 현장을 기록한 답사문이나 학술서도, 방송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도 모두 댐에 가득찬 물을 바라보며 이 곳이 현장이었다고 강조했고, 그것이 우리가 아는 봉오동전투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실제 봉오동전투의 현장은 전적비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다. 그곳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산자락에 위치한 전투의 현장을 가본 안내자가 없었던 탓에 수많은 답사단에게 왜곡된 정보가 제공되었던 것이다. 누가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는지 모르지만 진실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역사의 현장에서 '봉오동전투'에 대한 왜곡과 축소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2016년 최운산 장군의 후손들과 함께 봉오동전투 현장을 답사하고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매복했던 참호에 발을 담궜던 소수의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봉오동전투의 현장이 물속에 잠겨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댐 위에 서서 저 물 아래 갇힌 작은 계곡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생각했을 답사단은 수천 독립군이 함께 동서남북의 산위에서 일본군을 포위하고 싸웠던 대규모 독립전쟁 '봉오동전투'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왜곡된 채 수십 년 굳어진 역사를 바로잡으려면 앞으로 수십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봉오동전투 현장을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하면서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심지어 오늘날 군대에 대한 지식으로 100년 전 독립군부대를 설명하면서 기존의 연구를 고집스럽게 주장하기도 한다. 수십 년 고착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는 부분이다.

지금 봉오동에 가면 조선족 마을 수남촌이 유일하게 남아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봉오동이 시작되는 입구에 남아있는 이 마을에 해방 당시 최운산 장군의 가족이 살던 집이 있었다. 당시 마을에서 유일하게 펌프가 있었던, 수남촌에서 제일 큰집이었다. 그 집은 해방 후 공산당에게 빼앗겨 마을회관으로, 유치원으로, 구락부로 사용되다가 마지막엔 동네 사람들이 모여 담뱃잎을 말리는 작업장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에 허물었다고 한다.

봉오동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수남촌에 살고 있는 최진동 장군의 외손자 부부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며 세월 속에 사라져간 작은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집이 겪은 변화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의 손자들이 최운산 장군의 집터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왼쪽부터 최치흥의 손녀 최정옥, 최운산의 손녀 최성주, 봉오동에 살고 있는 최진동의 외손자 부부, 최운산의 손자 최흥주

2015년 첫 방문에서 봉오동에서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는 6촌 오빠를 만나고, 그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의 독립운동과 봉오동의 역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정말 놀랍고 감사했다. 

생전 처음 만난 친척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릴 때 할머니와 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우리 가족사와 봉오동전투의 내용을 똑같이 알고 있었다. 그들과 가족사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큰 위로와 감동으로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많은 이야기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 모든 역사를 잃어버린 지난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렸다. 

우리 5남매는 평양에서 태어난 큰오빠를 제외하고 모두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산 사투리를 쓰지만 실향민의 자식으로, 명절이면 시골을 다녀오는 이웃들을 부러워하며 평생 고향을 그리워 했다. 그런데 만주땅, 북간도 독립군기지 봉오동에 가니 거기에 고향이 있었다.

대한민국 독립전쟁의 역사를 확인하러 찾아간 봉오동에서 증조할아버지 연변도태 최우삼의 산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세 좋은 봉오동 골짜기마다 할아버지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삶이 살아있었고, 봉오동 독립군의 어머니였던 할머니 김성녀 여사의 손길이 남아있었다!

방학이면 마을 입구를 훤하게 만들었다는 아버지 최봉우의 학창시절이 남아있는 봉오동은 그대로 내 고향이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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