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산수(傘壽,팔순)를 맞이하신 전종실 주주를 꼭 뵙고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다행히 해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단풍도 고운 자태를 잃어가고, 갑작스러운 추위가 밀어닥쳐 따뜻한 남도의 온화함을 을씨년스럽게 만든 11월 하순 전남 보성군 벌교로 향했습니다.
생각보다 늦게 벌교 버스터미널에 내리자 이미 어둠은 내리고 한적한 정류장에서 전종실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전종실 주주통신원께서 <한겨레:온>에 처음 쓰신 글이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 장군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편집하였기에 글로 대화를 나눈 지 만 3년이 되었습니다.
1545년에 태어난 전방삭 장군은 1575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건공장군에 올랐습니다. 이순신과 함께 무예를 연마한 친구이자, 이순신 막하에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하옥되자... 전방삭 장군은 뜻한 바 있어, 보성군 벌교읍 영등에 진지를 마련하여 주로 보성과 벌교 열혈 청장년 의병 300명을 모집하여 훈련시켰다.”
약 5백여 년이 지나 전방삭 장군의 후손 전종실 선생님과 그 역사의 현장 보성군 벌교읍에 저도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벌교읍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된 계획도시라고 합니다. 주변 여수, 순천, 고흥, 해남 등지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다양한 농수산물이 모이는 곳이었답니다.
1960년대만 해도 인구 4만 5천을 품었던 영화를 뒤로 하고 현재는 1만 5천 정도로 젊은이가 사라진 한적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벌교 꼬막과 더불어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안줏거리로 널리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지요. 전종실 선생님의 전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도 항일의 의기가 그 어느 곳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안규홍이란 사람이 말을 타고 조선인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일본 헌병을 잡아채 한 주먹 먹였는데 그만 죽어버렸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광주 서중을 졸업한 명석한 두뇌의 김향수란 사람이 주먹으로 호남에서 이름을 날리면서 생겼다는 설과 함께, 벌교읍에 최초로 권투도장이 들어오면서 벌교 주먹은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어모장군 전방삭 28편을 연재하셨던 전종실 선생님의 조부 전명옥 님은 전방삭 장군의 12대손입니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3남 1녀를 먼저 보내고 막내아들에게서 전종실 맏손자를 보았으니 얼마나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셨겠습니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과 공덕으로 자란 전종실 선생님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약관 19세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교육자로 많은 제자를 길렀습니다.
지금은 당시 제자들이 환갑을 넘겨 70이 되어간다고 합니다. 지금도 옛 스승님을 찾는 제자들이 있어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벌교의 지명이 된 홍교를 찾았습니다. 벌(筏)은 뗏목이란 뜻으로 벌교(筏橋)는 뗏목을 이어 만든 다리란 보통명사인데, 고유명사가 되어 지명이 된 유일한 곳이 아닌가 합니다.
벌교는 만조가 되면 바닷물이 밀려들어 민물과 교차하던 지역에 놓인 뗏목다리였습니다. 조선시대 두 선승이 이곳에 아치형 무지개 석교를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지개 홍(虹)자를 써서 홍교(虹橋)라고 부릅니다.
홍교 건너편에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에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김범우의 집이 있고, 홍교를 건너는 김범우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래쪽에는 무당의 딸로 태어나 좌익 청년을 사랑하여 임신하고 온갖 고문을 겪으면서도 아이를 출산하는 애틋한 소화의 이름을 딴 소화교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조선시대 만들어져 실제로 주민이 거주하는 유일한 읍성인 낙안읍성을 찾았습니다.
매년 초가지붕을 새로 올려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군데군데 낡은 지붕은 무너져 내리는 듯 무상한 세월의 흔적을 보이고 있고요.
군수가 업무를 보는 동헌에 들렀습니다. 사무당(使無堂)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이곳에선 수령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보던 곳입니다. 송사를 처리하다 보니 권력을 남용하거나 백성을 억압하지 말라는 의미로 당호를 정한 듯합니다.
공자의 필야사무송(必也使無訟)에서 따왔겠지요. '좋은 지도자는 송사를 공정하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반드시 송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교훈입니다.
요사이는 없는 송사도 만들어내고, 송사가 만사이고 권력이라는 법 기술자들이 왕이 되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송사는 마땅히 멀리해야 자기 명을 온전케 할 수 있습니다. 공자를 존경하지 않아도 오늘 저의 글이 송사로 생명을 갉아먹지 않도록 생각해보는 시간이길 빕니다.
태백산맥의 산실인 벌교에서 민족의 비극적 서사를 좀 더 음미하고자 조정래 문학관을 찾았지만 마침 월요일 휴관이라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습니다.
부족한 필설로 전종실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을 다 표하지 못합니다. 항상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축원합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