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향심님께 올리는 손녀의 글

* 이 글은 제 딸이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나름대로 적어 본 것이다.

고향집 고개를 넘어가면 대문 앞 의자에 앉아 할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해진 뒤 할머니는 그 의자를 방 안에 두고, 당신을 평생 지켜보며,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속마음을 바다에 털어놓는 것만 같았다.

2021년 9월 전남 완도 고향집에서 할머니(왼쪽부터), 필자와 아들, 여동생 아들이 함께했다. 왼쪽 구석에 할머니의 의자가 보인다.
2021년 9월 전남 완도 고향집에서 할머니(왼쪽부터), 필자와 아들, 여동생 아들이 함께했다. 왼쪽 구석에 할머니의 의자가 보인다.

할머니 김향심은 1924년 완도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 땅에서 살다 지난 4월 완도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잠드셨다. 그새 시간이 흘러 할머니 49재도 지냈다.

하지만 지금도 할머니가 그 방 그 의자에 앉아 당신이 가장 예뻐하던 손녀를 두 팔을 벌려 반겨줄 것만 같다. 방문을 열면 24시간 켜져 있는 티브이 앞에 주무시는 할머니가 계실 것만 같다.

입관식에서 마주한 할머니는 분홍빛 입술을 한 너무도 곱고 편안한 모습이었고 내가 ‘함마니~~나 왔어라’ 하면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았다. 장례지도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할머니 얼굴을 만져보았다. 생전 고았던 피부 그대로 너무도 부드러웠고 차가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묘소에 다녀왔지만 아직도 할머니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할머니가 잠든 그곳에는 어버이날 엄마가 심어 놓은, 가물어 잎이 말라버린 카네이션이 있었다.

가뭄으로 죽어가는 카네이션
가뭄으로 죽어가는 카네이션

50년 넘도록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 온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친딸보다 더 슬퍼했고 힘들어했다. 할머니는 올 초 집 앞에서 넘어지면서 거동이 불편해지셨고 엄마가 잠시 나갔다 오는 사이 이불에 배변을 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스스로 집 근처 요양원에 들어가시기로 했다. 더는 며느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며느리도 허리가 좋지 않은, 손주를 둔 할머니란 사실을 할머니는 너무도 잘 알았다. 입버릇처럼 항상 ‘며느리 미안해서라도 빨리 죽어야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할머니가 식사를 잘못하신다고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단다. 팔순이 넘는 아빠와 곧 팔순이 되는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1층에 진료실이 있는 병원을 찾아 인근 도시까지 헤맸다고 했다. 두 분은 할머니를 업고 가서 기어이 수액을 맞게 하셨다고, 너희들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고, 훗날 얘기했다. 

친정엄마를 먼저 떠나보낸 엄마는 할머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듯 요양원에서 모셔오겠다며 할머니 방에 빠짝 말려 뽀송뽀송한 이불을 펴 놓고 다음 날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선잠이 들었다.

깊은 잠이 들기도 전에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고, 5분 거리를 엄마가 뛰어가 보기도 전에 할머니는 그렇게 주무시는 듯 길고 길었던 백세의 고단함을 내려 놓았다.(호적과 차이가 있음)

주인을 잃어버린 그 이부자리를 다시 정리할 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평생을 모시다 그 잠깐을 못 참고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냈다며 엄마는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상을 치르고 손녀들이 다 떠난 다음 날도 엄마는 홀로 할머니에게 다녀왔다고 했다. 할머니가 생전에 하루 3잔을 마실 만큼 좋아했던 믹스커피를 타서 올리고 왔다고 했다.

할머니가 잠든 곳에서 보이는 바다
할머니가 잠든 곳에서 보이는 바다

나에게 할머니는 더울 때는 그늘을 주고 눈비가 오면 비를 피할 수있게 해주는‘처마’같은 존재였다.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이후 30년 넘게 할머니의 ‘처마’는 울 엄마가 아니었을까 싶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빠는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깊이의 그립고 미안한 마음이겠지.

2004년 7월 고향 완도에서 가까운 해남타워로 할머니(앞줄 오른쪽)를 모시고 가족 나들이 갔을 때 /할머니, 아빠 ,나, 조카가 이제 26세다
2004년 7월 고향 완도에서 가까운 해남타워로 할머니(앞줄 오른쪽)를 모시고 가족 나들이 갔을 때 /할머니, 아빠 ,나, 조카가 이제 26세다

나는 유난히도 할머니를 따르고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등에 업히는 시간이 좀 많은 편이었다. 자라서 독립한 뒤 어쩌다 집에 다니러 와서도 엄마보다 먼저 할머니와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주 길었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던지 엄마가 시샘할 정도였다, 둘이 찰싹 붙어 앉아서 오랜 시간 수다를 나눴다.

그런 할머니가 이젠 내 곁에 없다. 코로나19 거리두기라는 핑계로 자주 못 뵌 것이 후회가 되어 자꾸 질책을 한다.

우리 집에서 완도까지 6시간 넘게 걸리지만, 부모님에게는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해본다. 고양 손녀 / 마은아

원고료를 드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 위 기사는 지난 6월 27일 <한겨레>에 실린 글입니다.
* 원문보기 :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48628.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장 

마광남 주주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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