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전교조 해직교사 사태는 공권력이 자행한 <국가폭력>이자 <인권침해>였음을 규정한 <진실과 화해위> 결정 권고문을 환영하는 전교조와 참교육동지회, 교육민주화동지회 기자회견 장면(출처 : 전교조 홍보국 제공) 교육민주화동지회장 황진도 선생님이 발언하고 있다. 황진도 선생님 오른쪽이 이부영 선생님(참교육동지회장), 앞줄 황진도 선생님 왼쪽으로 한 사람 건너 선 여성이 전희영 전교조 위원장이다.
1989년 전교조 해직교사 사태는 공권력이 자행한 <국가폭력>이자 <인권침해>였음을 규정한 <진실과 화해위> 결정 권고문을 환영하는 전교조와 참교육동지회, 교육민주화동지회 기자회견 장면(출처 : 전교조 홍보국 제공) 교육민주화동지회장 황진도 선생님이 발언하고 있다. 황진도 선생님 오른쪽이 이부영 선생님(참교육동지회장), 앞줄 황진도 선생님 왼쪽으로 한 사람 건너 선 여성이 전희영 전교조 위원장이다.

2022년 12월 8일 제2기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약칭 「진실과 화해위」)는 1989년 전교조 사태를 ‘국가폭력’으로 규정했다. 교사가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1,527명 교사를 강제 해직시킨 사건이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라고 결정했다.

1989년 당시 노태우 군부정권은 교사가 노동조합을 건설한다는 이유로 일부 교사를 ‘빨갱이 교사’로 낙인찍었다. 1989년 3월 충북 제천 제원고(현 제천디지털전자고)로 초임 발령을 받고 일본어를 가르치던 강성호 선생이 대표 사례다.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창립일을 4일 앞두고 발생했다. 당시 강성호 선생은 28살이었다.

그는 교실 수업 도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제천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에게 강제 연행당했다. 비슷한 일들이 서울에서 일어났다. 이일권 선생(당산중)과 조태훈 선생(인덕공고)이 북한 찬양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모두 전교조 결성대회일(1989. 5. 28.)을 며칠 앞두고 노태우 공안 정권이 벌인 조작이다.

<빨갱이 교사> 집단이란 누명을 썼던 당시 전교조에 대해 <진실과 화해위>는 적어도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경우 <인권침해>의 당사자이자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규정했다.(출처 : 전교조 홍보국 제공)
<빨갱이 교사> 집단이란 누명을 썼던 당시 전교조에 대해 <진실과 화해위>는 적어도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경우 <인권침해>의 당사자이자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규정했다.(출처 : 전교조 홍보국 제공)

‘빨갱이 교사’로 낙인된 강성호 선생은 1,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2019년 재심을 신청했다. 한 세대가 지난 재심 재판 당시인 2019년에도 정치검찰은 변함없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2021년 9월 2일 재심 재판에서 강성호 선생(당시 59세, 청주 상당고)은 결국 무죄를 선고 받았다. ‘빨갱이 교사’로 낙인된 지 32년 만이다. 국가공동체 내 정치 사회 민주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 사건이다.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 장면(출처 : 하성환)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 장면(출처 : 하성환)

마찬가지로 1989년 노태우 군부정권에 희생된 1,527명 전교조 해직 교사들 역시 33년 만에 공권력이 자행한 ‘국가폭력’이자 ‘인권침해’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해직 교사 원상회복을 위한 특별법」은 여전히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다만 조금 반가운 소식은 지난 2월 27일 국회에서「진실과 화해위」 관련 일부 개정법률안이 통과된 사실이다.

내용인즉 「진실과 화해위」가 진실 규명을 결정하여 국가기관에 사과와 피해배상, 그리고 명예 회복을 권고했을 때 정부가 이를 이행하도록 법적 의무를 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권고 사항 이행관리기관장을 행안부 장관으로 특기했다. 그리고 「진실과 화해위」 권고를 받은 해당 국가기관장은 권고를 받은 지 3개월 이내에 이행계획과 조치 결과를 행안부 장관에게 제출하도록 명기했다.

우리는 이 법이 「더불어 민주당」 김교흥 의원과 윤영찬 의원이 각각 발의한 자신들의 법안을 철회하고 상임위 위원장(「국민의 힘」)이 발의한 (대안)법안으로 회부된 점에 주목한다. (대안)법안은 상임위와 본회의 통과 후, 정부로 이송돼 윤석열 정부에서 공포했다. 개정법률안은 공포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 발효된다. 글쓴이는 윤석열 정권에 일말의 기대도 없다. 다만 입만 벙긋하면 ‘법과 원칙에 따라’를 떠벌리며 ‘법치’를 강조했던 그 말에 책임을 묻고 싶다.

이미 이승을 떠난 해직 교사들이 100명에 버금갈 정도로 많다. 대부분이 70을 전후한 나이로 건강도 좋지 않다. 그나마 글쓴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해직 교사 가운데 거의 막내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전교조 해직 교사들은 ‘개돼지’가 아니다. 눈속임이나 사탕발림으로 「진실과 화해위」 권고 결정을 무질러버려선 안 된다. 여전히 우리들 가슴엔 젊은이들 못지않게 끓는 피로 가득하다. 불의한 현실에 눈감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공식 사과와 피해 회복 없이 역사 정의는 없다. 역사 정의가 없는 곳엔 사회 정의 또한 바로 세울 수 없다. 윤석열 정권이 새겨들을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역시 아주 조금은 희망의 빛이 보인다. 이번 개정법률안대로 국무총리 산하 보상심의위에서 적극 행정을 펼쳐야 한다. 현재 공식적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이 지극히 일부이지만 2005년 출범한 제1기 「진실과 화해위」 활동을 통해 조금 드러난 적이 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인 만큼 학살당한 분들과 남은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명예 회복과 국가 차원의 피해배상을 시행해야 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미군, 유엔군, 국군, 인민군, 우익청년단, 경찰에 의해서 자행된 만행임이 이미 수많은 증언과 적잖은 학술연구로 드러났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여전히 미흡하기 그지없는 실정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 장면(출처 : 하성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 장면(출처 : 하성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은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오랜 기간 은폐돼 있다가 4‧19혁명 직후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왔다. 각 지역별로 민간인 학살 진상을 촉구하는 유족회가 속속 결성되고 전국 단위 유족회도 결성되었다.

그러자 4월 혁명이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인 1960년 5월 23일 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위」를 출범시켰다. 출범한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위」는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 그리고 제주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민간인 학살 진상조사는 군홧발에 짓밟혔고 유족회 관련된 분들은 반국가 반역 행위로 체포돼 혁명재판에 넘겨졌다. 군사쿠데타로 반역을 저지른 반국가행위자들이 거꾸로 애국자 행세를 하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피해 가족들을 ‘빨갱이’로 범죄시했다.

심지어 박정희 군사독재권력은 국가공권력을 앞세워 피해 가족들이 세운 피학살자 위령비와 학살당한 피해자 비석을 무참히 파괴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덤마저 파헤쳐 학살 피해자 시신을 끄집어내 불태우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 세월은 그런 세월이었다. 징글징글할 정도로 잔혹했고 뒤집힌 시절이었다.

그러다 정확히 45년 만인 2005년 노무현 참여정부 제1기 「진실과 화해위」에서 공식적인 진상조사가 재개됐다. 이미 김대중 국민의 정부 당시, 1999년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특별법」이, 그리고 2000년엔 「제주 4‧3 사건 특별법」이 통과돼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에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가 나서서 민간인 학살사건 접수를 받고 공식적인 진상조사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2005년에 출범한 역사적인 제1기 「진실과 화해위」 활동은 결실을 맺기도 전에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결국 제1기 「진실과 화해위」는 4년 정도 열정적으로 활동했으나 지속되질 못했고 이명박 정권에 의해 봉쇄됐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50만 명 ~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학살당했음에도 1/10 정도밖에 다루질 못했다. 이명박 정권이 자행한 의도적인 방해 탓이다. 국가기관의 공식적인 활동에 예산을 배정하지 않는 방식은 활동을 방해하는 흔한 방식이면서도 가장 저열한 방식이다.

그러나 ‘촛불 시민혁명’의 힘으로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국회에서 「진실과 화해위」 개정법률안이 통과되었다. 역사적인 2기 「진실과 화해위」 활동이 재개된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자 극우 인사가 2기 「진실과 화해위」 2대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결코 앞날이 밝지 않다.

1999년 「거창 민간인 학살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0년 「제주 4‧3 특별법」이 통과된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제주 4‧3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다. 이 모든 일련의 현상들은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를 관통한 ‘정치 사회 민주화’의 흐름과 관련이 깊다.

2005년 본격적으로 국가가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식 조사에 나선 제1기 「진실과 화해위」 탄생, 그리고 문재인 정부 제2기 「진실과 화해위」 활동 재개 역시 그런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적어도 형식적이나마 민주 정권이 들어섰을 때 우리 역사는 한 걸음씩 전진해왔다.

<민주유공자법>제정을 촉구하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부모님이 1인 시위하는 장면(출처 : 하성환)
<민주유공자법>제정을 촉구하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부모님이 1인 시위하는 장면(출처 : 하성환)

오늘도 국회 정문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된 피해 가족들이 피켓 시위 중이다. “언제까지 유가족의 눈물을 외면할 것인가”를 절규하며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펼치고 있다.

전태일 열사와 박종철 열사, 그리고 이한열 열사가 아직도 ‘민주화 운동가’가 아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일 뿐이다. 참으로 한심한 표현이다. ‘민주화 운동가’이면 ‘민주화 운동가’이지 ‘민주화운동 관련자’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일제강점기 이육사를 ‘항일혁명 시인’으로 표현하지 ‘항일혁명 관련 시인’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치안유지법으로 생체실험을 당해 원통하게 옥사한 윤동주를 ‘독립운동가’로 표현하고 ‘독립유공자법’으로 예우하지 ‘독립운동 관련자’로 표현하지 않는다. 유관순을 ‘독립운동가’로 표현하지 ‘독립운동 관련자’로 표현하지 않듯이!

마찬가지 논리로 전태일 열사,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를 ‘민주화 운동가’로 표현하고 ‘민주유공자법’으로 예우해야 마땅하다.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듯이 민주화 운동가들을 하루빨리 ‘민주유공자’로 예우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국가보훈 정책과 국가보훈 행정의 기본이다.

국회 정문 옆에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부모님이 <민주유공자법>제정을 촉구하며 1인 시위하는 장면(출처 : 하성환)
국회 정문 옆에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부모님이 <민주유공자법>제정을 촉구하며 1인 시위하는 장면(출처 : 하성환)

<국민의 힘>은 더 이상 <더불어 민주당>이 발의한 「민주유공자법」을 왜곡하지 말고 하루빨리 입법화해야 한다. 586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이 많은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운동권 신분 세습법”이니 “운동권 셀프 특혜법”이니 비아냥거리며 당면한 국가 과제를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그리고 <기본소득당>과 무소속 의원 175명이 발의한 「민주유공자법」은 <국민의 힘>이 표현한 대로 ‘운동권 특혜법’이 아니다. 기존 「국가유공자법」에 준하는 내용일 뿐이다.

더구나 우원식 의원이 대표 발의한 「민주유공자법」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국가공권력으로 고문당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인 자, 그리고 중상해를 입은 피해 부상자를 ‘민주유공자’로 인정한다. 따라서 현재 운동권 출신 21대 국회의원 가운데 해당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입법 발의 당시 <국민의 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표현한 대로 “운동권 출신과 자녀들은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원받도록 해주겠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자 왜곡이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것은 공동체 지속을 위해서도, 나아가 공동체 미래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이만큼의 자유와 이만큼의 평등, 그리고 법과 정책들은 모두 앞선 세대의 피와 눈물과 땀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렇게 한 걸음씩 순결한 젊은이들의 희생을 딛고 전진해 왔다. 그분들 목숨값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자유를 누리며 오늘날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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