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대안 사건>과 ‘조선의 페스탈로치’ 이만규

<조선교육사>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이만규 선생이 일제강점기 시절, 해직 당시 방대한 자료를 섭렵해 저술한 <조선교육사>(상, 하)는 해방 후 1947년과 1949년 출간된다. 오늘날 한국교육사를 다룬 어떠한 교육사서도 <조선교육사>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게 학계 정설이다. 이 책에서 이만규 선생은 일제강점기 교육을 <교육의 암흑기>로 규정하며 친일교육자들을 단죄하고 있다. 해방 공간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조선교육사>를 심성보 교수가 1988년 거름출판사에 이어 2010년 살림터 출판사에서 재차 읽기 쉽게 펴냈다.
<조선교육사>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이만규 선생이 일제강점기 시절, 해직 당시 방대한 자료를 섭렵해 저술한 <조선교육사>(상, 하)는 해방 후 1947년과 1949년 출간된다. 오늘날 한국교육사를 다룬 어떠한 교육사서도 <조선교육사>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게 학계 정설이다. 이 책에서 이만규 선생은 일제강점기 교육을 <교육의 암흑기>로 규정하며 친일교육자들을 단죄하고 있다. 해방 공간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조선교육사>를 심성보 교수가 1988년 거름출판사에 이어 2010년 살림터 출판사에서 재차 읽기 쉽게 펴냈다.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 3인은 백남운, 이극로, 이만규 선생이다. 세 분 모두 코뮤니스트가 아님에도 월북 인사라 대중에겐 잊힌 인물이다. 세 분 가운데 이만규 선생이 해방 공간 펴낸 『조선 교육사』(상, 하)는 한국 교육사의 정초를 닦은 교육사학계 기념비적 역작이다. 한국 교육사 관련 어떠한 책도 『조선 교육사』(상, 하)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게 학계 중론이다.

1929년 배화여고보 교무주임 시절 이만규 선생(사진 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이만규 선생은 백색테러가 횡행하던 해방 공간에서 한국 전쟁 이전임에도 남북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던 분이다. 가수 서유석 씨가 이만규의 외손자이다. 이만규 선생은 여운형과 정치노선을 같이 한 절친으로 여운형과 사돈 간이자 큰며느리는 심훈의 조카로 심훈과도 사돈 간이다. 선생은 언어독립투쟁인 조선어학회(1942-1943) 사건 당시 일제의 극심한 고문으로 한쪽 귀가 심하게 훼손당했다.
1929년 배화여고보 교무주임 시절 이만규 선생(사진 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이만규 선생은 백색테러가 횡행하던 해방 공간에서 한국 전쟁 이전임에도 남북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던 분이다. 가수 서유석 씨가 이만규의 외손자이다. 이만규 선생은 여운형과 정치노선을 같이 한 절친으로 여운형과 사돈 간이자 큰며느리는 심훈의 조카로 심훈과도 사돈 간이다. 선생은 언어독립투쟁인 조선어학회(1942-1943) 사건 당시 일제의 극심한 고문으로 한쪽 귀가 심하게 훼손당했다.

1946년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 사건에 맞서 「국대안 반대」 투쟁을 맨 앞에서 이끌었던 인물 또한 이만규 선생이다. 이만규 선생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교육 분야 전문연구위원으로 해방 공간 공표된 진보 진영 교육정책을 주도했던 실제 당사자다. 그는 일제강점기 항일교육자로서 분투했다. 그러나 해방 공간 백색테러가 횡행하는 와중에 한국전쟁 이전임에도 황급히 북행길에 올랐다. 전쟁 이전임에도 이철경(금란여고 교장), 이미경(한글 서예가) 딸 둘을 남쪽에 남겨둔 채, 남북으로 이산가족이 되어 살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가수 서유석이 이철경의 아들이기에 이만규는 서유석의 외할아버지다. 이만규가 북쪽으로 아내와 네 명의 자녀를 데리고 쫓기다시피 월북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몇 가지 시대 배경 내지 정치 상황이 작용했다.

첫째로 이만규는 몽양 여운형의 절친이다. 몽양은 자신의 절친으로 ‘국내에는 이만규, 해외에는 안창호’라고 꼽을 만큼 친분이 두터웠다. 그만큼 이만규와 여운형은 친했고 사돈 간이었으며 해방 공간 건국준비위원회(1945.8), 조선인민공화국 보건부장(1945.9), 조선인민당 서기장(1945-1946),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1946), 좌우합작운동(1946-1947), 근로인민당 조직국장(1947)을 비롯해 정치노선도 늘 함께 했다. 1947년 7월 19일 백색테러가 자행되면서 여운형이 피살되자 야자 이만규 선생도 두려움을 느꼈다. 이것이 북행길을 선택한 강력한 시대 배경으로 작용했다.

둘째로 이만규는 자신의 큰아들 이정구가 남로당 당원이었다. 이정구는 일제강점기 도쿄대 생물학과를 나온 지식인으로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조카사위다. 이정구는 월북 후 김일성대학 생물학부장을 역임한다. 이만규의 며느리가 바로 심훈의 조카 심명혜로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북행길을 선택하기 직전 이만규의 아들 이정구는 일시 경찰에 체포, 구속되기도 했다. 공산주의 혐의였다. 북행길을 서두른 직접적 동기였다고 생각한다.

셋째로 이만규는 오늘 소개할 「국대안」 반대 투쟁 당시 실질적인 목대잡이(지도자의 순우리말)였다. 「국대안」 반대 투쟁을 가장 앞장서서 이끌었던 단체가 바로 「조선교육자협회」다. 「조선교육자협회」는 1946년 2월 창립 시엔 회원이 280명 정도였으나 미소공위 참가를 신청할 당시엔 9,210명으로 급격히 늘어난 전국교사단체였다. 당시 남북 전체 교원 수가 3만 명 정도였으니 1/3이 가입한 최대 교원단체였다. 이만규는 「조선교육자협회」 지도자였기에 「국대안」 반대 투쟁이 좌절되는 1947년 11월, 그 시점에서 매우 불안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교육자협회」 지도자였던 신기범 교수(경성사범학교)가 1947년 11월 극우 청년에게 피살된다. 이 또한 북행길을 선택하는 직접적인 동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국대안」은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의 약칭으로 미군정청 문교 차장 오천석 박사가 강행한 종합대학교 설립안이다. 명분은 종합대학교 설립안이지만 실제는 대학교수회를 부정하고 대학 자치와 학원 자치를 억압하며 ‘교육의 자주성’을 말살한 정책이다. 미군정은 친일 교육 관료를 다시 기용하고 「국대안」을 강행함으로써 민족교육과 민주교육을 실질적으로 억압했다.

게다가 「국대안」 사건은 반공 일색으로 학교 현장을 도배함으로써 우리 교육을 출발부터 왜곡시켰다. 「국대안」 사건 당시 친일 교육을 청산하고 민족교육과 민주교육을 열망했던 교육자와 학생들은 대부분 학교 밖으로 쫓겨났다. 그 빈 공간을 서북청년회가 대거 편입해 들어갔다. 「국대안」 반대 투쟁 당시 미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유길준의 아들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의 학력 증명과 서북청년회장 선우기성의 확인증만 있으면 서울지역 중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 편입이 가능했다. 실제로 1947년 2월 중순부터 한 달 사이에 3,600명이 서울대를 비롯해 중고등학교에 대거 편입했다.

「국대안」 반대 투쟁을 가장 앞장서서 이끌었던 단체가 「조선교육자협회」이고 이만규 선생은 「조선교육자협회」 부회장으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으로 1947년 「국대안」 반대 투쟁이 좌절되고 「조선교육자협회」 간부들 58명이 피검되자 그해 11월 「조선교육자협회」는 지하화한다. 「조선교육자협회」가 지하화하는 바로 그 시점에 관변 교육자 단체 「조선교육연합회」(약칭 교련)가 설립된다. 당시 미군정청 문교부장 오천석 박사는 사공환(문교차장)에게 지시해 조동식(동덕고등여학교장, 친일파), 최규동(중동학교장, 친일인사)을 비롯해 친일 교육자들이 주도해 「교련」을 창립한다. 오천석 박사 스스로 1950년에 「교련」 회장으로 취임하고 1960년엔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다.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 기념 동상(출처 : 하성환)  백낙준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반민족행위자임에도 신촌 캠퍼스엔 그를 기리는 동상이 건립돼 있다. 백낙준은 박정희 정권 시절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전두환 정권 시절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런 뒤집힌 풍경은 낯설지 않다. 고려대(김성수), 인덕대(박인덕), 이화여대(김활란), 서울여대(고황경), 상명대(배상명)를 비롯해 여러 대학 캠퍼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막힌 풍경이다.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 기념 동상(출처 : 하성환)  백낙준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반민족행위자임에도 신촌 캠퍼스엔 그를 기리는 동상이 건립돼 있다. 백낙준은 박정희 정권 시절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전두환 정권 시절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런 뒤집힌 풍경은 낯설지 않다. 고려대(김성수), 인덕대(박인덕), 이화여대(김활란), 서울여대(고황경), 상명대(배상명)를 비롯해 여러 대학 캠퍼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막힌 풍경이다. 
미군정 통치 기간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김활란 기념 동상.(출처 : 하성환) 김활란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부역자로 반민족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화여대 본관 옆에 세워진 김활란 동상은 김활란의 친일 행적으로 철거를 주장하는 등 논란의 중심에 놓인 적이 있다.
미군정 통치 기간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김활란 기념 동상.(출처 : 하성환) 김활란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부역자로 반민족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화여대 본관 옆에 세워진 김활란 동상은 김활란의 친일 행적으로 철거를 주장하는 등 논란의 중심에 놓인 적이 있다.

오천석 박사는 듀이의 교육 사조와 민주주의 교육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반면에, 최규동, 백낙준, 김활란, 김성수, 유억겸 등 친일 교육자들과 일체가 되어 「국대안」 사건을 통해 일제 식민지 관료행정인 국가주의 교육행정을 학교 현장에 착근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오천석 박사가 문교부 장관 당시 비서가 정원식 교수다. 정원식 교수는 1989년 1,500명이 넘는 전교조 교사들을 국가폭력으로 강제 해직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오천석 박사를 흠모하며 「오천석 박사기념사업회장」을 맡아온 인물이다.

페스탈로치는 ‘스위스 교원노동조합’의 출발인 「스위스 교육자협회」를 창립한 인물이자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우리나라에서 페스탈로치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최고의 권위자는 고 김정환 교수(고려대 교육학과)다. 고 김정환 교수의 수제자가 1989년 전교조 창립 당시 서울 보성중에서 해직된 심성보 교수(부산 교대 명예교수)다. 심성보 교수가 군대에서 힘들어할 때 자신의 제자를 편지로 위로해 준 분이 바로 고 김정환 교수다. 고 김정환 교수는 90년대 저서인 『인간화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1995)와 『전인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1997)를 통해 페스탈로치가 ‘전투적 교사상’의 표본이었음을 역설했다.

페스탈로치를 보통 사람들은 ‘불쌍한 고아들을 거둔 성자’로 기억한다. 분단이 낳은 왜곡된 사실이다. 이는 마치 헬렌 켈러를 ‘삼중 사중의 장애를 극복한 의지의 화신’으로 상징화하거나 아인슈타인을 ‘순수과학자’로만 기억을 제한하는 것과 같다. 역사의 진실은 그것을 넘어선다. 헬렌 켈러는 중증 장애를 극복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정치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했던 전투적 사회운동가이자 미국 사회당 당원이었다. 아이슈타인 역시 근대과학 패러다임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하지만 핵무기 감축 운동을 비롯해 사회주의를 옹호했던 인물이다. 인생의 황혼기까지 공산주의 혐의로 의심받으며 미연방수사국(FBI)의 감시와 미행에 시달렸다.

마찬가지로 페스탈로치 또한 스위스 시민혁명 당시, 고아들을 거두어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하지만 낡은 스위스 교육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교육자이다. 페스탈로치는 루소의 교육사상에 깊이 심취한 인물로 아이들 인격을 존중하고 잠재된 능력을 꽃피우기 위해 체벌과 권위주의 교육 질서 등 당대 낡은 교육 질서에 결연히 맞섰던 인물이다. 그러다 갈등을 빚고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실제로 페스탈로치는 교육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당대 낡은 질서와 맞서 싸웠던 ‘전투적 교사상’의 상징이다. 바로 그런 페스탈로치 같은 인물이 야자 이만규 선생이다. 이만규 선생은 일제강점기 외과 의사 신분을 벗어던지고 교육을 통해서 식민지 조선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개성 송도학교 과학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에 헌신했다. 3·1만세 시위 당시, 개성 시내 교사와 학생들의 3·1운동을 이끌었던 참교육자가 바로 이만규 선생이다. 그는 만세 시위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제국주의 일제와 맞서 민족교육을 강조했고 조선의 여성들에게 주체적인 삶을 강조했으며 봉건 질서의 낡은 멍에를 과감히 벗어던질 것을 촉구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페스탈로치’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이만규 선생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항일교육뿐만 아니라 봉건 질서에 맞서 여성의 주체성과 인권, 그리고 남녀평등 교육을 부르짖으며 온갖 폐습과 낡은 질서에 저항했다. 이만규 선생이 해방 공간 주도했던 「조선교육자협회」는 교육의 ‘자주성’을 생명으로 삼는 자주적인 교육자 단체로 「4·19 교원노조」(1960)가 그 정신을 계승했고 오늘날 「전교조」(1989)가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다시 말해 해방 후 교육 운동사가 「조선교육자협회」(1947) - 「4·19 교원노조」(1960) - 「전교조」(1989)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만큼, 「전교조」 운동의 뿌리는 단연코 「조선교육자협회」다.

2015년 3월 박근혜 정권 당시, 교육부와 교총은 <이달의 스승>으로 친일교육자 최규동을 선정해 <민족의 사표>,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극찬했다. 최규동은 교총 회장, 서울대 총장을 역임하였다.(출처 : 교육부 홈페이지, 한겨레 신문 이수범 기자)
2015년 3월 박근혜 정권 당시, 교육부와 교총은 <이달의 스승>으로 친일교육자 최규동을 선정해 <민족의 사표>,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극찬했다. 최규동은 교총 회장, 서울대 총장을 역임하였다.(출처 : 교육부 홈페이지, 한겨레 신문 이수범 기자)

다만 불행하게도 박근혜 정권 교육부는 2015년 3월에 「교총」(교련 후신)과 협력해 초대 「교련」 회장을 역임한 친일 교육자 최규동을 ‘이달의 스승’으로 선정하고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극찬했다. 그러나 최규동은 일제강점기 죽음으로써 황군(천황의 군대)에 복무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며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군대 입대를 강변했던 반민족행위자다. 그런 자를 ‘조선의 페스탈로치’ 운위하며 수만 장에 이르는 포스터를 만들어 초중고 각급학교와 주민센터에 배포한 게 박근혜 정권 교육부이자 교총의 작태였다.

<민주시민교육>을 좌파 편향교육으로 비판하는 국민의 힘 소속 국회의원들과 교총 인사들이 2022년 11월 21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 포스터(출처 : 김원태 선생님 제공)
<민주시민교육>을 좌파 편향교육으로 비판하는 국민의 힘 소속 국회의원들과 교총 인사들이 2022년 11월 21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 포스터(출처 : 김원태 선생님 제공)

박근혜 정권 시절 교총은 권력에 굴종해 『한국사』 교과서 국정제를 찬성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총은 윤석열 정권 권력과 일체가 되어 세계교육 개혁의 대세인 ‘민주시민교육’을 ‘종북 편향 이념교육’으로 맹비난하고 있다. 교육자의 껍질을 쓰고 권력에 밀착해 정치적 야망을 유감없이 드러낸 교사단체가 바로 교총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교사들 가운데 가장 많이 가입돼 있는 단체가 교총이라는 사실이다. 참으로 씁쓸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