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머니스트 사민주의 대중정치인 노회찬

올해 6월에 출간된 노회찬 평전 책 표지(사회평론, 2023). 언론노조연맹 출신이자 진보정당 활동을 했던 이광호 작가가 4년에 걸친 자료수집과 노회찬 관련 인물 221명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평전기획위원회 논의 결과, 올해 6월 출간하였다.(출처 : 하성환)
올해 6월에 출간된 노회찬 평전 책 표지(사회평론, 2023). 언론노조연맹 출신이자 진보정당 활동을 했던 이광호 작가가 4년에 걸친 자료수집과 노회찬 관련 인물 221명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평전기획위원회 논의 결과, 올해 6월 출간하였다.(출처 : 하성환)

노회찬은 2018년 7/18일~7/22일 기간, 여야 원내대표단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출국 전 드루킹 특검 별건 수사로 드루킹 김동원이 노회찬에게 돈을 건넸다는 진술을 검찰이 확보했고 언론에 크게 보도된 상황이었다. 노회찬은 정의당 대표 이정미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했다. 출국 전 아내 김지선은 남편 노회찬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 내 계좌는 수십 년 전 것부터 다 뒤져도 걸릴 게 하나도 없잖아, 우리 그동안 쓰는 것도 버는 것도 별로 없이 살아왔잖아” 그러자 노회찬도 “나도 그렇지 뭐”라고 얘기하자 아내 김지선은 “내 의견인데 특검 수사받을 바에야 차라리 우리가 먼저 기자회견을 하자. 있는 사실 그대로 국민들에게 말씀드리자. 우리가 그 돈을 착복한 것도 아니고 나는 양심에 찔리는 거 하나도 없어. 법적으로 잘못된 거 있으면 책임을 져야지. 나도 필요하면 그 자리에 함께 갈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자. 그게 노회찬이잖아.” 그러자 노회찬은 “그것도 방법이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긴 침묵이 흐르고 다시 노회찬이 말했다.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도 있지.”  - 이광호(2023), <노회찬 평전>, 538-539쪽

노회찬은 7월 22일 5시 귀국 후 인천공항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병원에 들러 어머니를 뵙고 이튿날 <썰전> 녹화 준비도 하고 집엔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자 아내 김지선이 그러면 “오늘 저녁 같이 못 먹겠네.”라고 말했다.

7월 22일 노회찬은 입원 중인 어머니를 병원에서 뵙고 어머니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리고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 들러 1시간 정도 머물면서 유서 세 통을 썼다. 방미 4박 5일 동안 머릿속엔 계속 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노회찬은 고민 끝에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을 결심했다.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유서를 쓰고 노회찬은 저녁 8시쯤 남산으로 향했다. 그는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안에서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8분 동안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강서구 방화동 집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 같이 못 먹겠네.”라고 말한 아내 김지선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듯하다.

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시절 지하 노동운동을 하다 만난 아내였다. 언젠가 노회찬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아내 김지선을 만난 일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투신 전날 7월 22일 늦은 저녁 시간인 9시 10분쯤 노회찬은 방화동 집에 도착했다. 아내는 남편 없이 혼자 밥을 먹다가 남편이 들어오자 다시 밥상을 차렸다. 그는 평소 잘 말하지 않던 아내 건강을 걱정하며 평상시와 다르게 맥주 한 병을 느릿느릿 천천히 마셨다.

이튿날 노회찬은 아침 8시에 방화동 집을 나섰다. 7/23일은 당 대표 이정미와 만나 드루킹 문제를 협의해 대책을 세우고 정의당 상무집행위 회의에도 참석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상무집행위 모두 발언 내용을 비서실장에게 전하고 15분 정도 차 안에 있다가 곧장 어제 갔다가 되돌아온 남산으로 갔다. 남산아파트로 가는 도중에 차 안에서 수행비서관에게 “고생했다”고 말했다. 평소 그런 말을 잘하지 않던 그였다. 9시 33분 남산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5분 뒤 투신했다.

노회찬은 7/22일 귀국 직후 유서를 쓰고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한 방에 해결’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날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아내의 “오늘 저녁 같이 못 먹겠네.”라는 그 말이 마음에 내내 걸렸던 것같다. 그래서 남산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8분 동안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생각을 하다 발길을 돌렸던 듯하다. 마지막 순간 아내 김지선을 생각하며 배려한 선택이었다.

정치인 노회찬! 그에게 진보정당 창당은 자신의 인생 목표 절반을 성취한 것이기에 어렵게 탄생시킨 진보정당을 목숨처럼 소중히 생각했다. 실제로 노회찬에게 진보정당은 <확장된 자아>였다. 진보정당은 곧 자기 자신이었고 진보정당에 대한 공격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희생시켜 진보정당을 살리고 싶었다. 더구나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분당의 아픔을 겪으며 고통스럽게 일궈낸 정의당이 아니었던가!

진보정당의 영원한 조직실장 오재영 묘소(출처 : 하성환). 그는 노회찬 의원이 국회의원(17대, 19대, 20대)이던 시절, 정무 보좌관으로 활동했다. 2017년  심근경색으로 49세  아까운 나이에 요절했다.
진보정당의 영원한 조직실장 오재영 묘소(출처 : 하성환). 그는 노회찬 의원이 국회의원(17대, 19대, 20대)이던 시절, 정무 보좌관으로 활동했다. 2017년  심근경색으로 49세  아까운 나이에 요절했다.

어떤 사람은 노회찬 옆에 진보 정치의 영원한 조직가 오재영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자신의 <확장된 자아>로서 진보정당을 건설한 노회찬을 염두에 둔다면 현실성 없는 얘기일 것 같다. 정치인 노회찬의 인생 절반의 꿈이 진보정당 창당이었다면 나머지 인생 절반의 꿈은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갈 길 잃은 정의당을 보노라면 그저 노회찬의 죽음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너무도 허망하고 또 허망하다.

인간 노회찬!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투명 인간처럼 살아가는 새벽 4시 6411번 버스 승객들을 우리 정치의 한 가운데로 끌고 들어온 장본인이다. 진보정당을 창당하고 진보 정치인을 자처한 그 자신이지만 그분들에게 진보정당이 여전히 투명 정당으로 비친 한국 정치 현실에 마음 깊이 부끄러워했다. 그가 해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국회 청소노동자 여성들에게 장미꽃 송이를 전하며 축하했던 것도 정치인으로서 자신을 성찰하는 모습이자 진보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의지를 다지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노회찬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것이 국회 환경미화원인 청소노동자와 점심을 함께하는 일로 공식 행사를 시작했다. 자신이 왜 정치인이 되었는지, 왜 세상을 바꾸려고 여의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항상 칼날 위에 서는 마음으로 처신했다. 그가 투신 1시간 전에 남긴 정의당 상무집행위 회의 <모두 발언>도 삼성전자 백혈병 환자들의 투쟁과 KTX 여승무원들이 10년 넘게 투쟁 끝에 쟁취한 승리를 축하하는 내용 모두 같은 맥락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언제나 정치사회 약자들이었다.

죽산 조봉암을 잇는 사민주의 대중정치인 노회찬! 그는 경기고 1학년 때 박정희 유신 정권에 반대하는 ‘불온 문서’를 남겼던 인물이다. 고교 시절에 이미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휴머니스트 혁명가였다. 대학 시절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참당암에서 한 달을 기거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의를 다졌던 혁명가였다. 그리고 실제 용접 기술을 배워 80년대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87년 지하 혁명 조직 「인민노련」(「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 약칭)을 황광우, 정광필, 임영탁, 김호규와 함께 만들고 분투한 것도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천박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투쟁의 일환이었다. 고통받는 노동대중이 인간다운 삶을 꿈꾸며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현실 세계에서 연출하고자 애쓴 휴머니즘 가득한 혁명가였다. 소외된 노동자에 대한 연민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동대중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2000년 진보정당을 창당하고 노회찬은 인생의 절반인 꿈을 이뤘다고 고백했다. 90년을 전후해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비합법 전위 정당(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이 현실성이 없음을 깨달았다. 구속기간이었던 이즈음 노회찬은 노동운동을 통한 지하 혁명가에서 사민주의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정체성을 보다 뚜렷이 했다. 그리고 합법 정당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진보 정당 추진위원회」(약칭 진정추)(1993) -「국민승리 21」(1997) -「민주노동당」(2000)으로 이어지는 90년대 진보 정치세력의 성장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을 이야기할 때 노회찬이 거목처럼 그 중심에 우뚝 서 있음을 알게 된다.

2004년 기대하지 않았지만 비례대표 8번으로 국회에 진출했을 때 노회찬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지배 계급을 대표하는 선수들과 사생결단의 격전을 치르는 전투장"으로 ‘국회’를 규정했다. 국회의원으로서 특권을 누리기는커녕 “지배 계급을 대표하는 선수들”과 전투를 치르는 마음으로 의정활동을 실천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때 아내 김지선은 <참 무서운 사람과 결혼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기성정치를 ‘50년 묵은 시꺼메진 불판’에 비유하며 ‘불판을 갈아치워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호주제 폐지,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 삼성 X 파일과 떡값 검사 명단 폭로, 친일 재산환수법 통과, 한글날 국경일 제정, 품격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인 등 정치인 노회찬은 거대권력과 공룡 자본에 맞서 최전선에서 싸웠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자본주의의 냉혈성>에 몸서리치며 그는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다만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80년대 지하 혁명노선에서 90년대 초 비합법 전위 정당 노선으로, 그리고 다시 합법 진보정당 건설로 꾸준히 변신을 거듭했다. 결국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약칭 사민주의) 노선을 택한 것이다.

그가 꿈꾼 세상은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사회이자 북유럽에선 이미 실현된 모습이다.

“대학 서열과 학력 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 지방에서 태어나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취직하고 결혼하여 아이 낳고 기르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는 나라,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나라, 인터넷 접속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는 나라,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토마스 모어가 꿈꾼 6시간 노동하는 나라가 유토피아나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된 나라”가 휴머니스트 정치인 노회찬이 건설하고 싶어 한 공동체였다. - 이광호(2023), <노회찬 평전>, 295쪽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는 노회찬 묘소(출처 : 하성환) 7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적막이 가득한 묘소 옆 벤치에 가방을 놓아둔 채, 노란 모자를 쓴 젊은 여성이 열심히 묘소 주변 풀을 뜯으며 정리하고 있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는 노회찬 묘소(출처 : 하성환) 7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적막이 가득한 묘소 옆 벤치에 가방을 놓아둔 채, 노란 모자를 쓴 젊은 여성이 열심히 묘소 주변 풀을 뜯으며 정리하고 있다.

정치가 실종된 오늘날, 노회찬을 다시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이유는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그가 자신의 영혼마저 모두 소진하며 분투했기 때문이다. 노회찬은 인간에 연민을 느끼며 인간을 사랑한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특히 소외된 이들을 위해 매번 70% 긴장감을 유지하며 전투에 임했던 직업정치인 노회찬이었다. 휴머니스트 정치인 노회찬! 우리가 오늘날 노회찬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까닭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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