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 십계명」을 써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공유한 참교육자

30년이 넘는 교직 생활 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학생들과 <관계맺기>를 시도했던 <행복한 선생님의 귀감>이자 <시대의 사표>가 된 박영신 선생님(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30년이 넘는 교직 생활 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학생들과 <관계맺기>를 시도했던 <행복한 선생님의 귀감>이자 <시대의 사표>가 된 박영신 선생님(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글쓴이가 박영신 선생을 만난 것은 용산고등학교 시절(1998-2001)이다. 첫인상이 시인 김수영을 연상하게 했다. 가치 판단을 할 때 눈을 크게 뜨며 단호한 모습이 영판 그러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친화력이 높았던 것과 달리, 학교 비리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다. 용산고 – 서울대 출신 교사와 과학고에서 전근해 온 서울대 출신 교사들로 구성된 '용산 마피아'와 맞서며 재임 기간 내내 학교 권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백범기념관>에서 제자들과 함께한 박영신 선생님(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백범기념관>에서 제자들과 함께한 박영신 선생님(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20년이 지난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고 예나 지금이나 '모럴리스트 시인 김수영'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교직생활은 의식적이면서도 매우 도덕적이었다.

박영신 선생은 글쓴이보다 나이가 세 살 많았음에도 그 연배와 다르게 컴퓨터 다루는 기술이 능숙했다. 컴맹인 글쓴이가 "컴퓨터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라고 언젠가 지나가는 말투로 푸념 아닌 푸념을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박영신 선생은 "전교조 분회장을 하면 잘할 수 있다"고 언질을 주었다. 순진하게도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컴퓨터를 잘하고 싶은 욕망이 컸으리라! 학교운영위원도 하고 분회장 같은 총무도 열심히 했다. 한참 뒤에 깨달은 일이지만 교육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과 컴맹을 탈출하는 것은 전혀 별개 문제였다.

<교실 밖 국어여행>(사계절, 1991)은 강혜원 선생님, 박영신 선생님 두 분이 썼다. 개정판은 세 분이 썼는데 스테디셀러로 10대-30대를 넘어서서 <교양 있는 시민>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출처 : 사계절 제공)
<교실 밖 국어여행>(사계절, 1991)은 강혜원 선생님, 박영신 선생님 두 분이 썼다. 개정판은 세 분이 썼는데 스테디셀러로 10대-30대를 넘어서서 <교양 있는 시민>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출처 : 사계절 제공)

박영신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모둠별 수업’을 앞장서 실천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문학 수업을 재미있고 의미 있게 와닿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결과였다. 이른바 '삶을 위한 문학 교육'을 오래전부터 실천했던 교육자이다. 그 결과물이 해직 당시 강혜원 선생님과 함께 썼던 『교실 밖 국어 여행』(사계절, 1991)이다.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스테디셀러다. 그 이외에도 우리 정신 문화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즐거운 독서 여행』과 『근현대 명논설』을 함께 썼다. 나아가 복직 이후 전교조가 펴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백서'『참교육 한길로』를 공동으로 편찬하고 감수했다.

박영신 선생은 고난 속에서도 힘든 일을 도맡았다. 전교조 자양고 분회장, 전교조 서울지부 중서부지회장, 전국대의원 등 본인 스스로 언급했듯이 그 시절 <신들린듯이> 활동했다. 그는 2022년 5월에 발간된 <전교조 해직교사 백서> 개인열전에서 “돌이켜보면 나의 일생에서 가장 현명하고도 자랑스러운 선택은 전교조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박영신 선생은 고난 속에서도 힘든 일을 도맡았다. 전교조 자양고 분회장, 전교조 서울지부 중서부지회장, 전국대의원 등 본인 스스로 언급했듯이 그 시절 <신들린듯이> 활동했다. 그는 2022년 5월에 발간된 <전교조 해직교사 백서> 개인열전에서 “돌이켜보면 나의 일생에서 가장 현명하고도 자랑스러운 선택은 전교조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박영신 선생은 교사노동조합인 전교조 창립 당시 자양고등학교 분회장을 맡아 '신들린 듯이' 활동했다. 군사정권의 탄압이 들어오자 자양고 전교생이 항의 농성을 감행하며 선생님을 지키기 위해 거세게 항거했다. 가슴에 '선생님을 사랑해요', '선생님, 힘내세요!'리본을 패용하고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박영신 선생님을 지지했다. 전교조 교사들을 지키기 위한 그 시절 학생들의 눈물겨운 항거와 투쟁은 당시 서울 지역을 넘어서서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당대 고등학생운동은 '전교조 교사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참교육을 받고 싶다는 '참교육 요구 투쟁'으로 승화돼 나갔다.

해직 이후 대학원 진학을 통해 국문학도로서 자신을 단련시켰다.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교과에 대해 <깊넓은 실력을 지닌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나아가 박영신 선생은 군부 독재정권 시절 중첩된 학교 모순 속에서 교사로서 올곧게 서기 위해 십계명을 만들었다. 이른바 「교사 십계명」이다. 해직 당시 1989년 10월 20일 자 『한겨레』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유명한 경구이다. 박영신 선생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고 또 성찰한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그 아름다운 정신이 담긴 「교사 십계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보석같이 빛나는 경구임에 틀림없다.

 

<교사 십계명>

1. 하루에 몇 번이든 학생들과 인사하라.

한 마디의 인사가 스승과 제자 사이를 탁 트이게 한다.

 

2. 학생들에게 미소를 지으라.

밝고 다정한 선생으로 호감을 줄 것이다

 

3.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라.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누구에게나 가장 감미로운 음악이다.

 

4. 친절하고 돕는 교사가 되라.

학생들과 우호적 관계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친절하라.

 

5. 학생들을 성의껏 대하라.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즐거이 말하고 행동하되 다만 신중할 것을 잊지 말라.

 

6.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라.

내가 노력한다면 거의 누구든지 좋아할 수 있다.

 

7. 칭찬을 아끼지 말라.

그리고 가능한 한 비판을 삼가라.

 

8. 항상 내 앞의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라.

서로 입장이 다를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세 편이 있음을 기억하라. 그것은 ‘나의 입장’,

‘학생의 입장’ 그리고 ‘올바른 입장’이다.

 

9. 봉사를 머뭇거리지 말라.

교사의 삶에서 가장 가치로운 것은 학생을 위해 사는 것이다.

 

10. 이상의 것에 깊넓은 실력과 멋있는 유모어와 인내, 약간의 겸손을 더하라.

그러면 교사가 하루를 후회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변호사를 초대해 학생들에게 자신의 꿈을 멋지게 펼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박영신 선생님(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변호사를 초대해 학생들에게 자신의 꿈을 멋지게 펼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박영신 선생님(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교사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것이 '학생을 위해 사는 삶'"이라는 아홉 번째 계명은 30년도 더 지난 퇴직 교사들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한다. 이를 일상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그는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몇 번이고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라"고 단언한다. 몇 번 몇 번, 번호가 아니라 학생들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줄 때 그것은 그대로 '감미로운 음악이 된다'고 확신했다. 학생을 대상화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만난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모습으로 학생의 자존감을 높여주기에 안성맞춤이다. 참으로 학생들에 대한 사랑 없이는 깨닫기 어려운 놀라운 성찰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아이들은 선생님이 자신을 기억하며 이름을 불러줄 때 밝게 웃으며 마주한다. 글쓴이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실천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며 교감하는 순간, 교사와 학생은 행복한 학교생활을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급 당 학생 수를 20명 이하로 계속 줄여 나가야 한다. 학급 당 학생 수 감축과 교사 증원은 물리적으로 ‘관계 맺기’가 가능해 행복한 학교로 나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이런 깨달음으로 1994년 복직 이후, 매 학년 초 삼백 명 이상 되는 아이들 이름을 외우려고 여간 애를 쓴 게 아니었다. 학생 이름을 불러주면 학생과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고 '관계 맺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유추해 보면 박영신 선생은 아마도 청년 시절부터 일찌감치 그런 사실을 깨닫고 성찰한 교사였음에 틀림없다. 나아가 전국의 모든 교사들과 이를 공유하고자 「교사 십계명」을 만들어 널리 퍼뜨렸으리라!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사진작품이다. 박영신 선생은 페북 사진 옆에 이런 글을 남겼다. <2022년 3월 5일 · 아슬아슬 위태롭다. 오랜 세월 줄기차게 독재와 싸워 이룬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를 누가 감히 모욕하는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자가 감히 어찌 ‘국민’, ‘국민’하며 세상을 우롱하는가. #보자보자하니기가막히는구나 #나는분노한다>  0.7% 표 차이로 끝난 정말 아슬아슬한 20대 대선을 며칠 앞두고 쓴 글 같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사진작품이다. 박영신 선생은 페북 사진 옆에 이런 글을 남겼다. <2022년 3월 5일 · 아슬아슬 위태롭다. 오랜 세월 줄기차게 독재와 싸워 이룬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를 누가 감히 모욕하는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자가 감히 어찌 ‘국민’, ‘국민’하며 세상을 우롱하는가. #보자보자하니기가막히는구나 #나는분노한다>  0.7% 표 차이로 끝난 정말 아슬아슬한 20대 대선을 며칠 앞두고 쓴 글 같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불행하게도 박영신 선생은 2000년대 중반 위암 수술을 받고 투병했다. 다시 재발해 생사를 넘나든 순간도 있었지만 처서인 그제 건강함을 눈으로 확인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위암 발병 이후 사진작가로서 변신했다.

박영신 선생님이 2021년 10월 1일 페북에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은 문인다운 풍모를 드러낸 글이다. “꽃을 심든 메밀을 심든 감자를 심든 이곳은 꽃밭도 메밀밭도 감자밭도 아닌 보롬왓 즉, 바람밭. <한라산의 여신>이 저기 어디쯤 바람을 심어두었을 텐데 웬일로 오늘은 바람도 없이 그저 평화롭구나. #보롬왓 #보롬왓은바람밭이라는뜻” (글과 사진 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박영신 선생님이 2021년 10월 1일 페북에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은 문인다운 풍모를 드러낸 글이다. “꽃을 심든 메밀을 심든 감자를 심든 이곳은 꽃밭도 메밀밭도 감자밭도 아닌 보롬왓 즉, 바람밭. <한라산의 여신>이 저기 어디쯤 바람을 심어두었을 텐데 웬일로 오늘은 바람도 없이 그저 평화롭구나. #보롬왓 #보롬왓은바람밭이라는뜻” (글과 사진 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삶과 자연을 사진 속에 담아 예술성으로 구워내고 철학을 품은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곱고 아름다운 제자를 작품으로 남긴 사진(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언젠가 페북에 글쓴이가 처음엔 제자인 줄도 모르고 모델들 사진을 보고 이런 글을 남겼다. “아니! 박영신 샘은 도대체 어디서 보석 같은 모델들을 섭외하시나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이렇게 왔다.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가만가만 생각하면 <교사 십계명>을 실천한 결실이다.
곱고 아름다운 제자를 작품으로 남긴 사진(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언젠가 페북에 글쓴이가 처음엔 제자인 줄도 모르고 모델들 사진을 보고 이런 글을 남겼다. “아니! 박영신 샘은 도대체 어디서 보석 같은 모델들을 섭외하시나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이렇게 왔다.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가만가만 생각하면 <교사 십계명>을 실천한 결실이다.

그는 특히 여학생 제자가 많다. 매번 부러움을 넘어 시새울 정도이다. 졸업하고도 10년도 더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제 간 협력해 예술성 짙은 사진 작품을 남기고 있다.

글쓴이는 30년 전 복직 당시 영등포여고였다. 그러나 여학생 제자가 찾아오질 않는다. 연락도 없다. 그런데 박영신 선생은 지금도 꾸준히 사제 간 정을 나누고 있으니 부러울 뿐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2010년 고교선택제 이후 교사들은 남자학교를 기피하고 여학교를 선호한다. 박영신 선생은 운 좋게도 영등포여고를 거쳐 수도여고에서 정년을 맞았다.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여학교를 간다는 것은 큰 복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여의도고등학교에 있다가 2017년 남녀공학인 상암고등학교로 왔을 때 출근길이 행복했다. 더욱이 여학생반 담임이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2016년 학교 가는 길이 천근만근 무겁다가 전근 첫해 2017년은 날아갈 듯이 행복했다. 하루에 담배를 한 갑 이상 피는 여학생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전 남자고등학교 고3 담임보단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옛 일본대사관 앞 <일본군 위안부> 수요시위 당시 여의도고등학교 NGO동아리 학생들이 피켓 시위하는 모습(출처 : 하성환) 맨 왼쪽 학생 윤건호 군은 매우 배려심이 깊고 인품이 뛰어났으며 후덕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 박정우 군 역시 배려심과 높은 정치사회의식을 간직한 훌륭한 제자였다.
옛 일본대사관 앞 <일본군 위안부> 수요시위 당시 여의도고등학교 NGO동아리 학생들이 피켓 시위하는 모습(출처 : 하성환) 맨 왼쪽 학생 윤건호 군은 매우 배려심이 깊고 인품이 뛰어났으며 후덕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 박정우 군 역시 배려심과 높은 정치사회의식을 간직한 훌륭한 제자였다.

여학교에선 청소 당번인 학생들이 도망가지도 않고 모두 자기 할 일은 하고 간다. 물론 남자고등학교에서도 천사 같은 남학생들이 존재한다. 교사인 글쓴이보다 인격이 높고 덕을 쌓은 남학생들도 적잖이 만났다. 그렇지만 전체를 보면 남학교보다 여학교가 훨씬 손이 덜 갔고 솔직히 정신적으로 덜 힘들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순하면서도 화사하다. 사진이 곧 예술이란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청순하면서도 화사하다. 사진이 곧 예술이란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박영신 선생은 퇴직 이후에도 여학생 제자들이 꾸준히 찾아온다. 사진 모델로도 참여한다. 부럽다 못해 정말 시새울 정도이다. 아마도 「교사 십계명」을 교직 생활 내내 그대로 실천한 결실이지 않을까 싶다.

아름답게 웃음을 띤 제자를 둔 박영신 선생이 부럽다 못해 시새울 정도이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아름답게 웃음을 띤 제자를 둔 박영신 선생이 부럽다 못해 시새울 정도이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제자들이 찾아오면 박영신 선생은 자신의 생각을 담아 사진 작품으로 만들어 낸다. 학생들이 고민하고 방황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퇴직 전이든 퇴직 후든 작품으로 여럿 남겼다. 교사로서 자신이 지나온 삶의 흔적 그대로다.

민중가수 <백자>가 박영신 선생님 제자였는데 2020년 5월 15일 박영신 선생님 페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 스승의 날을 맞아 고교시절 담임 선생님이셨고 전교조 결성 당시 해직되셨던, 지금은 페친이신 박영신 선생님께 끝없는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찾아뵙지도 못하고 늘 죄송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 선생님의 제자라서 참 행복합니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민중가수 <백자>가 박영신 선생님 제자였는데 2020년 5월 15일 박영신 선생님 페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 스승의 날을 맞아 고교시절 담임 선생님이셨고 전교조 결성 당시 해직되셨던, 지금은 페친이신 박영신 선생님께 끝없는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찾아뵙지도 못하고 늘 죄송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 선생님의 제자라서 참 행복합니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감히 글쓴이가 박영신 선생을 따라갈 수 없는 대목이다. 천성이 타고난 교육자이자 시대의 사표(師表)가 아닐 수 없다. 반듯한 민중가수 ‘백자’를 길러낸 담임교사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한참을 바라보며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한참을 바라보며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그는 사진작가로서 능력도 출중해 갤러리에서 전시회도 여러 번 했다. 『한겨레』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작가대회에서 우수상과 최우수상을 수상해 작가로서 능력도 출중하다.

석모도에서 찍은 작품이다. 황홀하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석모도에서 찍은 작품이다. 황홀하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작품 하나하나가 박영신 선생의 혼이 담긴 느낌이라 어떨 땐 소장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지내며 사진작가로서 아름다운 꿈을 이루길 고대한다. 그리고 26년째 이어온 '수요회'교사 모임 또한 계속 이어가고 싶다. 그와의 인연이 소중한 이유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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