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우세력의 준동을 경계한다

국군의 뿌리는 후기 의병 전쟁(1907-1915) 당시, 일제에 맞선 항일 의병들이다. 후기 의병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한다. 망명한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일본군과 교전했던 항일 빨치산 독립군들이다. 항일 의병장, 홍범도가 여기에 속한다.

그는 망명 전에 함경도 삼수, 갑산, 혜산 지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의병 전쟁을 치른 항일의병장이다. 망명 후 게릴라식 유격전으로 일제 경찰주재소와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고 친일파를 응징했다. 1910년 8월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창설된 항일 독립운동단체 「성명회」에 가입했다. 오직 대한 독립과 광복을 죽기로 맹세해 성취하려는 일념이었다.

이후 홍범도는 1911년 연해주에서 항일지사 최재형, 이상설과 함께 조국 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권업회」를 출범시켰다. 1912년엔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한 「노동회」를 설립해 군자금을 비축했다. 홍범도 스스로 여러 해 동안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해 부두 노동자, 금광 광부, 농부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다.

2019년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제4차 학술세미나 포스터(출처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러시아령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던 독립지사들 가운데 최운산 장군으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지 않은 인물은 드물다. 홍범도, 김좌진 역시 총기와 탄약, 연병장, 그리고 군수품 일체를 최운산 장군으로부터 아낌없이 지원받았음이 최근 학술세미나에서 밝혀졌다.
2019년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제4차 학술세미나 포스터(출처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러시아령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던 독립지사들 가운데 최운산 장군으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지 않은 인물은 드물다. 홍범도, 김좌진 역시 총기와 탄약, 연병장, 그리고 군수품 일체를 최운산 장군으로부터 아낌없이 지원받았음이 최근 학술세미나에서 밝혀졌다.

그렇게 마련한 군자금으로 조금씩 총과 탄약으로 무장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1920년 5월, 최운산 장군의 물질적 후원에 힘입어 홍범도 부대는 소총 200여 정과 권총 30정으로 무장한 3개 중대 규모의 300명이 넘는 독립군 부대로 발전했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 당시,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 제2연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10월 청산리 전투 당시 유격 전술에 능숙한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에겐 가장 피하고 싶은 두려운 부대로 인식돼 있었다.

청산리 전투 당시, 게릴라 전술에 능했던 홍범도 부대의 활약상은 실로 놀라웠다. 청산리 대첩 어랑촌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김좌진 부대를 구해준 것도 홍범도 부대였다.(홍성덕,  「봉오동 전승 98주년에 즈음하여 : 철기 이범석의 <우둥불>과 <김일성 회고록>의 오류」『순국』 2018년 6월호, 34쪽) 실제로 그동안 청산리 전투 전모가 북로군정서 출신 이범석에 의해 크게 왜곡, 은폐돼 온 탓에 홍범도 장군의 활약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 결과 같은 북로군정서 김좌진이 청산리 전투 영웅으로 각인된 반면,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의 활약상은 은폐되거나 왜곡된 측면이 컸다. 이 부분은 32년 전 『역사비평』에서 이미 논증된 사실이다.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의 조카인 송우혜 작가가 밝혀낸 사실이다.( 송우혜, 「유명인사 회고록 왜곡 심하다 : 이범석의 <우둥불>」『역사비평』 1991년 봄호,  396쪽)

그와 동시에 70년대 남북 체제경쟁 속에서 코뮤니스트 청년에게 피살된 김좌진은 체제 선전용으로 크게 부각하기엔 제격이었다.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된 청산리 전투 영웅 김좌진 장군’은 그 자체로 최적의 ‘(반공)이념교육 교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 교과서엔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으로 구성돼 있다. 두 영웅을 사진으로, 그리고 교과서 본문에서 서술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봉오동 전투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부대>가 아니라 <봉오동 전투 = 최진동, 최운산의 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연합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로 기술하는 게 역사 사실에 부합한다.  <청산리 전투> 역시 게릴라전에 뛰어난 홍범도 부대의 활약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범석이 쓴 <우둥불>은 홍범도를 비겁하게 도망친 부대로 묘사해 놓고 있다.  김좌진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 <한족총연합회> 주석으로 1930년 코뮤니스트 청년에게 피살된다.
오늘날 한국사 교과서엔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으로 구성돼 있다. 두 영웅을 사진으로, 그리고 교과서 본문에서 서술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봉오동 전투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부대>가 아니라 <봉오동 전투 = 최진동, 최운산의 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연합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로 기술하는 게 역사 사실에 부합한다.  <청산리 전투> 역시 게릴라전에 뛰어난 홍범도 부대의 활약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범석이 쓴 <우둥불>은 홍범도를 비겁하게 도망친 부대로 묘사해 놓고 있다.  김좌진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 <한족총연합회> 주석으로 1930년 코뮤니스트 청년에게 피살된다.

그런 시대 배경을 안고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이라는 왜곡된 역사 인식이 대중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9종 『한국사』 교과서 또한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서술돼 있다. 영웅 사관을 바탕으로 ‘봉오동 전투의 영웅 = 홍범도, 청산리 전투의 영웅 = 김좌진’으로 기술돼왔다.

학교에선 김좌진 장군이 아나키스트였음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 목대잡이(‘지도자’의 순우리말)였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 사회 제도권 교육에선 아나키스트로서 죽어간 신채호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단재 선생의 마지막 사상적 종착점은 아나키즘이었다. 그런데도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신채호를 언급할 뿐이다.

백야 김좌진과 사촌 동생 시야 김종진 둘 다 아나키스트 항일 독립운동가였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저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된 김좌진 장군으로, 그리고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떠올리게 할 뿐이다.

나아가 항일 독립운동 노선 투쟁에서 극렬히 대립한 코뮤니스트와 아나키스트 간 끔찍한 살육전과 독립운동사 비극 역시, 제도권 학교 교육에선 아예 언급한 적도 없었다. 김좌진 장군을 죽인 코뮤니스트 청년 박상실 역시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 소속 독립군으로 일본군과 교전 끝에 전사했음도 마찬가지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역사교육은 정치권력에 포획된 채, 철두철미 이데올로기로 편향된 역사교육이었다. 상고사와 고대사만큼이나 우리 근현대사는 크게 왜곡된 채, 정규 교육과정을 일그러뜨려 왔다. 그리고 수능 『한국사』 절대평가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으로 왜곡된 역사교육을 강화한 채, 재생산해 왔다.

2022년 6월에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 장면(출처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2022년 6월에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 장면(출처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봉오동 전투 = 홍범도’ 가 아니라 ‘봉오동 전투 =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의 「대한군무도독부」가 중심’이었음이 여덟 차례 학술대회를 통해 이미 입증되었다. 윤석열 정권 들어서 정권 초기부터 극우세력들이 준동하는 걸 목격한다. 최근엔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을 자초하더니 공산당 가입 운위하며 육사 교정에서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발표했다. 윤석열 정권 스스로 극우 본색을 여실히 드러낸 패륜이다.

국군 장교를 길러내는 육사의 정신적 뿌리는 신흥무관학교와 봉오동사관학교에 있다. 그 두 곳 군관학교에서 양성한 독립군들만 4,200명에 이른다. 두 곳 군관학교에서 길러낸 독립군들이 주축이 되어 승리한 전투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 사실이다.

겉으론 소련공산당 전력을 들먹이지만 실은 뉴라이트 극우세력의 주장을 정설로 만들기 위한 시도이다. 바로 ‘이승만 = 건국 대통령’, ‘건국절 = 1948년 8월 15일’을 국민 대중에 퍼뜨리고 주입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다. 건국 연도를 1948년으로 조작하면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은 테러 수준의 무의미한 행위로 전락한다. 나아가 간도특설대 출신 반민족 친일군인 백선엽을 영웅으로 띄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2022년 3월에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근처에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전경(출처 : 하성환) 벽 전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대한민국, 여기서 시작하다>라는 커다란 문구가 인상에 남는다.
2022년 3월에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근처에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전경(출처 : 하성환) 벽 전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대한민국, 여기서 시작하다>라는 커다란 문구가 인상에 남는다.

그러나 어쩌랴! 대한민국 시작인 건국일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최초로 탄핵당해 쫓겨난 인물이다. 그것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과 쿠바 애니깽 농장, 그리고 멕시코 초촐라 농장에서 폭염과 가시에 찔리는 혹독한 노동 끝에 한 푼 두 푼 모은 독립운동자금을 횡령한 혐의다. 이승만 기념관을 세울 일이 아니다.

부산정치파동(1952), 사사오입개헌(1954)을 비롯해 대한민국 헌정질서와 의회민주주의를 말살했던 이승만! 그러나 국회의사당 로텐더홀 동상 표지석에는'의회정치 발전의 초석을 놓으시고 의회민주주의 발전의 귀감이 된 우남 이승만 박사'라는 글귀로 찬양, 미화돼 있다. 뒤집힌 역사의 한 장면이다. 생각 있는 국회의원이라면 시간을 내어 문제를 제기하는 게 마땅하다.(사진 출처 : 하성환)
부산정치파동(1952), 사사오입개헌(1954)을 비롯해 대한민국 헌정질서와 의회민주주의를 말살했던 이승만! 그러나 국회의사당 로텐더홀 동상 표지석에는'의회정치 발전의 초석을 놓으시고 의회민주주의 발전의 귀감이 된 우남 이승만 박사'라는 글귀로 찬양, 미화돼 있다. 뒤집힌 역사의 한 장면이다. 생각 있는 국회의원이라면 시간을 내어 문제를 제기하는 게 마땅하다.(사진 출처 : 하성환)

자유민주주의를 짓밟고 의회민주주의를 유린한 독재자를 후대가 기념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국회 내 이승만 기념 동상과 표지석을 철거하는 게 더 이상 역사 왜곡을 막고 의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태도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4월 혁명이 왜 일어났는가? 186명의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을 누가 죽였는가? 총상으로 수천 명에 이르는 불구자를 누가 만들었는가?

2013년에 제작해 2015년 개봉한 구자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툼>(Red Tomb) 포스터.(출처 : 하성환) <국민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학살 만행이다. 최소 23만 명에서 최대 45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말살당한 채, 국가폭력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구자환 감독의 열정과 헌신에 비춰볼 때 평점 9.7점은 당연하다. 실제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인데 안타깝게도 누적 관객수가 3,000명에도 이르지 못했다.
2013년에 제작해 2015년 개봉한 구자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툼>(Red Tomb) 포스터.(출처 : 하성환) <국민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학살 만행이다. 최소 23만 명에서 최대 45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말살당한 채, 국가폭력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구자환 감독의 열정과 헌신에 비춰볼 때 평점 9.7점은 당연하다. 실제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인데 안타깝게도 누적 관객수가 3,000명에도 이르지 못했다.

무엇보다 죄 없는 자국민들 수십 만명을 학살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핵심인 이승만을 국부로 찬양하는 게 정말 제정신인가?

홍범도는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인 항일 의병 출신이자 국군의 모체인 항일독립군 출신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그해 6월, 봉오동 전투에 참전하고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홍범도 장군이다. 어쩌면 김좌진을 능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청산리 전투 = 김좌진’이 아니라 ‘청산리 전투 = 홍범도’가 역사 사실에 더 가깝다. 이 부분에 역사학도들의 연구와 분발을 기대한다.

일제강점기 코뮤니즘, 아나키즘은 항일독립운동의 방편이었다. 한국인 여성 최초로 러시아 10월 혁명(1917)에 참여한 휴머니스트 혁명 여성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는 소련공산당 하바로프스크 시 당서기였다. 대한민국은 뒤늦게 2009년 이명박 정권 시절,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항일혁명시인 이육사 역시 코뮤니스트였다. 이육사는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절친 윤세주와 함께 1932년에 의열단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육사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 졸업식(1933)에서 졸업 작품으로 연극을 공연할 때 자신이 직접 쓴 대본에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는 공산 사회 만세’와 ‘일제 타도’를 외쳤다.

육사는 1940년대 초 경성 콤그룹 소속 여성 코뮤니스트 이병희와 함께 북경에서 모종의 항일 독립운동을 실천하다 1943년 일제에 피검돼 1944년 1월 고문 끝에 절명했다. 경성 콤 그룹은 일제의 탄압으로 1941년 국내조직이 해체되지만 혁명 시인 이육사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바로 경성 콤그룹과 관련이 있는 대목이다. 이 부분 역시 역사학도들의 지적 호기심과 연구를 기대한다.

대한민국은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인 1990년, 코뮤니스트 항일 혁명 시인 이육사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 좌우가 따로 없다. 좌우 모두를 포괄할 때, 우리 독립운동사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고 역사 속 진실에 더욱더 다가갈 수 있다.

홍범도가 스탈린이 통치하는 소련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59살 나이에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해방 이전 시기이다. 그것을 공격하는 짓은 매우 비열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자유시참변(1921)에서 사실이 아닌 가짜 뉴스를 퍼뜨리며 홍범도 논란의 포문을 맨 처음 열었던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역사의식은 한없이 천박하기 그지없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그들에게 역사 속 진실을 바로 보는 눈을 길러주는 게 절실하다. 그것은 건강한 역사의식을 대중화하는 첫걸음이자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책이라 생각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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