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삶과 투쟁

2010년 - 2014년 대통령 재직 시절 무히카는 운전기사 없이 28년된 자동차를 직접 운전했다(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2010년 - 2014년 대통령 재직 시절 무히카는 운전기사 없이 28년된 자동차를 직접 운전했다(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영국 공영방송 BBC는 2012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를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 불렀다. 그러나 무히카 대통령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가난한 자란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으로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기에 자신은 결코 가난한 대통령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오히려 “자신은 마음이 절대로 가난하지 않다”며 “삶에는 가격이 없다”고 역설했다.

호세 무히카! 그는 젊은 시절 아나키스트로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고 공산청년동맹에서도 활동했다. 국민당 집권 시절 파시스트들이 활개 치며 여성을 납치해 면도날로 나치 십자가 문양을 새기는 야만이 횡행했다. 청년 무히카는 그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경찰의 과잉 진압과 학생운동 탄압, 대학 사찰, 거기다 경제 침체 속에서 우루과이 민중들이 겪는 최악의 삶을 목격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히카는 1960년대 초 결성된 <투파마로스> 민족해방운동(MLN) 게릴라 전사가 되었다.

<투파마로스> 게릴라들은 우루과이에 파견된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이자 CIA 위원을 납치, 살해했다. 나아가 정부의 나팔수가 돼 거짓 보도를 일삼는 라디오 방송국이나 언론사를 공격했다. 무히카 역시 <투파마로스> 대원으로서 금융회사나 섬유회사를 습격해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던 인물이다.

체포된 뒤 두 번 탈옥을 시도했다. 1972년 두 번째 탈옥에 성공했을 때 비록 몇 개월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게릴라 동지이자 평생 반려자를 만났다. 정치적 동지이자 서로에게 정신적 은신처가 되어 주었던 루시아 토플란스키를 만나 지하활동 당시 결혼한다.

당시 무히카는 사회 불의에 항거하던 서른일곱 살 열혈 청년이었다. 불행하게도 무히카와 루시아는 결혼한 지 몇 개월도 안 된 1972년 그해 말 동시에 체포된다. 무히카는 군 병영 교도소에 수감되고 아내 루시아는 일반 교도소에 갇힌다.

무기수로 13년간 1인 독방 생활 끝에 1985년 국제사면위원회(AI)의 도움으로 석방된 호세 무히카. 석방 당시 무히카는 50세였다.(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무기수로 13년간 1인 독방 생활 끝에 1985년 국제사면위원회(AI)의 도움으로 석방된 호세 무히카. 석방 당시 무히카는 50세였다.(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1973년 군부 쿠데타 이후, 1985년 군사독재가 붕괴하고 민주 체제가 회복될 때까지 무려 13년 동안 무히카는 감옥생활을 감당해야 했다. 상상하기 힘든 고문을 받았고 절대 고독의 1인 독방에 갇혀 지냈다. 어떤 땐 작게 판 구덩이에 갇혀 인권을 유린당한 채 짐승처럼 지냈다. 그렇게 무기수로 13년을 생활하다 1985년 국제앰네스티(AI)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그는 석방 후 노회찬 의원처럼 합법적인 활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1994년 <투파마로스> 게릴라들이 중심이 된 좌파 운동단체 「민중참여운동」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한다. 그리고 1999년에도 「민중참여운동」 소속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2004년에 상원의원으로 재선돼 진보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2009년 대선 유세 당시 아내 루시아, 그리고 유세장 어린이들과 함께 걷는 무히카( 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2009년 대선 유세 당시 아내 루시아, 그리고 유세장 어린이들과 함께 걷는 무히카( 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로 사회민주당 출신 좌파 대통령이 등장한 2005년에 무히카는 좌파 정부에서 농축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2009년 대선에서 무히카는 52% 득표로 우루과이 제4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는 2010년 대통령 취임 이후 2015년 3월 대통령 임기를 마칠 때까지 수많은 사회개혁을 시도했고 좌절했다. 절대빈곤층과 경제 취약계층을 위한 공공주택정책과 청년 일자리 정책을 추진했다. 8시간 노동을 확립했고 치안 활동에 중점을 두어 범죄 발생을 크게 줄였다. 노인과 어린이 돌봄 정책도 추진했고 여성 인권을 위해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세계에서 열세 번째이자 라틴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사회 약자, 소수자를 위한 정책 마련에 분투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마리화나를 합법화하여 정부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민간 마약 업자와 전쟁을 벌였고 중독된 사람들을 국가가 나서서 찾아내 치료했다.

나아가 쿠바 관타나모에 수용돼 인권을 유린당한 포로들을 난민으로 받아들였다. 콜롬비아 무장 혁명단체와 콜롬비아 정부 간 중재에도 적극 나섰다. 모두 대통령 재직 시절 이룬 성과였다. 특히 무히카 대통령 재직 기간, 우루과이는 라 플라타 지역(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우루과이)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그러함에도 무히카 대통령 재직 기간 내내 각 부문 노동조합과 극심히 대립했다. 무히카 대통령은 노조 파업에 격렬히 맞서며 노조 파업에 굴복하지 않았다. 좌파 게릴라 출신 대통령에 공산당, 사회당 출신 장관들로 구성된 정부였지만 노동조합의 파업 투쟁에 대해 재직 기간 내내 극심한 대립과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무히카는 젊은 시절 쿠바와 중국, 그리고 소련을 체험할 기회가 있었다. 무히카는 상해 임시정부 조소앙 선생처럼 소련 사회 무지막지한 관료주의의 횡포에 극심한 혐오를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그 자신 좌파 게릴라 출신이지만 자신이 꿈꾼 국가사회가 아니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했다.

1960년대 호세 무히카가 반정부 무장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에 가입해 활동한 것은 60년대 세계 변혁운동과 관련이 깊다. 60년대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을 펼쳤고 검소하게 살았던 호치민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무히카는 도시게릴라 관련 저서를 탐독하면서 익히 알고 있고 영향을 받았다. 양키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무히카의 민족해방운동은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출처 : 하성환)
1960년대 호세 무히카가 반정부 무장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에 가입해 활동한 것은 60년대 세계 변혁운동과 관련이 깊다. 60년대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을 펼쳤고 검소하게 살았던 호치민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무히카는 도시게릴라 관련 저서를 탐독하면서 익히 알고 있고 영향을 받았다. 양키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무히카의 민족해방운동은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출처 : 하성환)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와 무히카(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와 무히카(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70년대 초 3만 명에 이른 우루과이 거대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는 1972년 대대적인 군부 탄압으로 지하조직이 해체된다. 그러나 <투파마로스> 게릴라 활동은 이후 70년대 아르헨티나 노동자 혁명당 군사 조직과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으로, 그리고 80년대 엘살바도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에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무히카는 게릴라 활동 당시, ‘울피아누스’ 또는 ‘파쿤도’라는 가명을 썼다. 지하활동을 하면서도 점차 폭력 투쟁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무히카는 예기치 못한 동지들의 죽음을 적잖이 목격했다. 죽음을 달고 살아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무히카는 자신의 투쟁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지 묻고 또 되물었다.

실제로 무히카는 지하활동 도중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고 몬테비데오 하수도를 통해 목숨을 건진 그 순간에도 사색을 멈추질 않았다. 총격전으로 심각한 총상을 입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가난한 우루과이 농부의 죽음은 무히카로 하여금 폭력에 대해 깊게 성찰하게 만들었다.

사건은 이러했다. 우루과이 가난한 농부가 들판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투파마로스> 무장 조직 땅굴을 발견했다. 그러자 <투파마로스> 게릴라 조직은 조직 보안을 위해 죄 없는 농부를 살해했다. 순박한 농부를 살해한 이 사건에 무히카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숭고한 의지로 목숨 걸고 참여한 민족해방운동이었지만 자신들의 저항과 투쟁이 변질하는 모습을 보고 견딜 수 없었다.

무히카는 대통령 재직 시절에도 틈틈이 자신의 허름한 농장에 가서 직접 농사를 지었다.(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무히카는 대통령 재직 시절에도 틈틈이 자신의 허름한 농장에 가서 직접 농사를 지었다.(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실제로 무히카는 인간의 생명을 넘어서서 자연 생태계 생명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평생 농사를 지었고 꽃을 가꾸며 땅과 교감했던 인물이다. 청년 시절 문학과 역사, 생물학에 심취하며 자연과 생명을 경외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작게 소유했으며 그조차도 과분하다고 여겼다. 그저 텃밭을 일구고 꽃을 가꾸는 가난한 농부였다.

무히카의 소박하고 검소한 삶과 철학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자를 만났다”며 무척 기뻐했다. 무히카는 권력과 불평등, 착취 관계로 얼룩진 자본주의 경쟁시스템에서 인간 회복을 강조했다. 나아가 이 세상 가장 소중한 가치로 사랑과 우정, 그리고 모험과 연대, 가족을 강조했다. 뺏고 빼앗기는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가 한순간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삶의 소중한 가치라고 역설했다.

2015년 출간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책 표지(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2015년 출간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책 표지(출처 :  21세기 북스에서 2015년 출간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서 글쓴이가 찍었음))

전 생애를 통해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불평등을 없애고 싶었을 뿐, 결코 자신의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다는 대통령 무히카에 우리가 매료되는 이유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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