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정판사 사건은 좌파 몰락의 신호탄

해방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혔다. 식민지 조선에서 살던 일본인들은 재산과 목숨을 잘 보존해 귀국하는 게 최대의 관심사였다. 숫자는 미미하지만 실제로 해방 직후 조선 사람들에게 맞아 죽은 일본인도 있었다.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식민지 조선에서 약탈한 문화재와 보물을 배에 가득 싣고 자기 부인을 그 배에 태웠다. 8월 17일 해방 이틀 후 몰래 출항한 그 배는 선적 과부하로 일본 구마모토현 앞바다에 있는 섬, 마키시마(牧島) 해상에서 멈춰버렸다. 결국 선적한 것의 절반을 바다에 빠트릴 수밖에 없었다. 귀중한 문화재 일부도 해상에 던져버렸다.

조선총독부는 해방 직후 8월 25일부터 9월 7일까지 2주 동안 화폐를 미친 듯이 찍어냈다. 며칠 사이 발행한 액수만 131억 원에 달했다. 발행한 돈 가운데 40억 원은 돈을 찍어낸 즉시 일본인들 귀국 자금으로 사용했다. 해방 직후 물가 폭등의 주된 요인이었다.

바로 그 돈을 찍어낸 공간이 조선정판사다. 조선정판사는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이 친일파 신용욱의 자금줄을 이용해 매입한 건물이다. 신용욱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친일파 김연수(동아일보 사장 김성수의 동생)와 함께 조선 항공회사를 설립해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처벌받지 않았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조선정판사는 해방 당시 5층 건물인데 눈에 띄는 고층 건물에 속했다.

우파를 상징하는 백범 김구 또한 환국 당시, 친일파 최창학의 경교장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최창학은 금광 산업으로 거부가 돼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그는 자신의 별장인 경교장을 김구에게 기증했다. 당대 친일파들 스스로 생존본능에서 나온 행위였다. 좌우를 가리지 않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붙어야 계속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교장은 백범이 환국한 뒤 임시정부 집무실과 회의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46년 신탁통치 파동 당시엔 반탁운동의 중심지였다. 좌파의 조선정판사 건물에는 조선공산당 본부(2층)와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사(3층)가 있었다. 탁치 파동 당시, 신탁운동의 구심체였음은 물론이다.

해방 공간 좌우를 대표한 지도자들 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출처 : 하성환)
해방 공간 좌우를 대표한 지도자들 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출처 : 하성환)

해방 직후엔 좌파가 영향력이 매우 컸다. 특히 중도좌파인 몽양 여운형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몽양은 8·15 해방 며칠 전부터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정권 이양 협상을 통해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해방과 동시에 출범시킨 인물이다. 그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았을 뿐 아니라 국제 정치 감각 또한 매우 뛰어났던 인물이다.

건준은 미군이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서 들어올 때까지 거의 20일 넘게 한반도 전체를 통치했던 준정부 통치 기구로 현대정치사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지방 단위 건준 지부에선 비록 일부이지만 지역 유지 등 우파 세력들이 인민위원장과 치안대를 맡기도 했다.

아무튼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은 좌파 박헌영보다 훨씬 인기가 높았다. 박헌영은 1939년 대구형무소 출소 후, 광주시 백운동 소재 벽돌공장 노동자로 은거해 있었다. 광주엔 이관술의 여동생 이순금이 박헌영과 경성 콤그룹 연락을 맡았다. 그녀는 동덕여고보 출신으로 30년대 경성고무공장 노동운동과 1939년 경성콤그룹 활동을 했던 항일 독립운동가다.

항일독립투사 이순금, 그녀는 이관술의 이복동생으로 박헌영의 연락책이었다. 그렇지만 50년대 초 남로당 숙청 당시, 재판정에서 박헌영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항일독립투사 이순금, 그녀는 이관술의 이복동생으로 박헌영의 연락책이었다. 그렇지만 50년대 초 남로당 숙청 당시, 재판정에서 박헌영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동덕여고보 출신 가운데엔 유독 코뮤니스트들이 많았다. 그런 배경엔 동덕여고보에서 역사를 가르쳤던 이관술의 영향이 지대했다. 동덕여고보 출신 이순금, 이효정(이육사 친척), 이종희, 박진홍 등이 그들이다. 이효정은 자신의 종고모이자 육사 친척인 이병희를 통해 종연방직에 취직해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당대 식민지 조선의 공장은 죽음과도 같은 감옥이었다. 산재사고가 끊이질 않았고 아침 6시까지 출근해서 저녁 9시까지 노동을 강요당했다. 하루 일당이 전차비에 해당할 정도로 살인적인 저임금이었다. 따라서 여성 노동자들은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공장 근처 초막이나 판잣집에 여러 명이 세 들어 살았다. 30년대 공장 주변부부터 토막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미군정이 발표한 조선정판사 사건은 탁치 파동 정국에서 좌파의 몰락을 초래했다. 무엇보다 해방 직후 최우선 과제였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 문제인 <민족 대 반민족> 대결 정국을 <찬탁 대 반탁>이라는 이념 구도로 환치시켜 버렸다. 친일 반민족 세력들에겐 부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 셈이다.

결국 친일 반민족 세력들은 ‘반탁=반공=애국’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퍼뜨리며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그리고 미군정 통치 기간, 해방 공간 지배 세력으로 또다시 부상했다. 따라서 해방은 엄밀한 의미에서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지배 세력의 교체일 뿐, 한국 사회 지배 세력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위가 격상됐다. 일제강점기 통치자 마름 노릇을 하던 친일 세력들이 직접 통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왜곡된 탁치 정국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신문이 동아일보이다.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7일 자 보도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원했으나 소련이 신탁통치를 고집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역사의 진실은 정반대였다. 동아일보가 자행한 명백한 왜곡 보도였다.

동아일보 왜곡 보도 직후 ‘반탁=반소=반공’ 운동으로 비화했고 한국인들 다수는 소련을 적대시했다. 반탁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백범은 미군정청 한국인 관료들의 총파업을 선동할 정도로 격앙돼 있었다. 결국 반탁에 대해 신중론을 내세운 우파 거물 송진우가 12월 29일 경교장 회의에 참가한 후, 이튿날 아침 6시에 암살되는 비극을 맞았다. 미군정은 송진우 암살 배후로 백범 김구를 의심했다.

미영소 외무장관이 합의한 모스크바 삼상회의(1945. 12) 결정문 주요내용(출처 : 하성환)
미영소 외무장관이 합의한 모스크바 삼상회의(1945. 12) 결정문 주요내용(출처 : 하성환)

그렇다면 과연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실체 내지 진실은 무엇일까?

1945년 12월 미영소 강대국 외상들이 합의한 모스크바 3상 회의의 핵심은 1항에서 “해방된 한국 사회에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열린 장면(출처 : 하성환)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열린 장면(출처 : 하성환)

그리고 2항에서 ‘임시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원조할 목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를 명문화하고 있다. 신탁통치 관련 내용은 뒷부분 3항에 언급돼 나온다. 한국 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쳐 최고 5년 기한 4개국 신탁통치를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모스크바 3상 회의 요체는 신탁통치에 있다기보다 한반도에 ‘통일된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는 데 방점이 찍힌 강대국 회의였다. 문제는 “해방된 한국 사회에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을 머리기사로 보도한 신문은 좌파 계열 『조선인민보』가 유일했다는 사실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성수의 동아일보를 단죄하지 못한 비극이었다.

결국 탁치 파동은 해방 공간 좌파가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5개월 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 5)은 조선공산당을 직접 탄압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조선정판사 사건 당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이던 이관술은 수배 중 7월에 체포된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다. 7월 3일 후퇴하던 군경에 의해 이관술은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대전시 동구 산내면 골령골에서 처형당한다. 모두 이승만의 지시였다.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동덕여고보 동맹휴학을 지지하고 학원 내 경찰 진입을 반대했던 민족주의 항일지사였다.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과정에서 민족 부르주아들이 보인 민족운동에 크게 실망했다. 이후 코뮤니스트가 되어 경성트로이카를 주도한 이재유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매진했다. 이재유가 일제에 피검되자 이관술은 이현상, 김삼룡, 정태식, 이순금, 박진홍, 이효정, 이병희 등과 1939년 경성 콤그룹을 결성해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그는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세 번 체포돼 고문을 받았지만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가 2명을 고문 살해한 고문 경찰의 대명사였다. 초등학교 2년 중퇴 학력으로 21살에 일본 제국주의 순사가 된 후, 부산상업학교 맹휴 사건과 신간회, 그리고 메이데이 사건 등에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은 결과,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경부보-경부-경시가 되어 해방 당시 평양경찰서장으로 해방을 맞았던 악질 친일파였다.

문제는 조선정판사 사건 당시 이관술을 비롯해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구속된 조선정판사 직원들 또한 고문의 극악함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을 변호한 변호인단은 물적 증거가 부족하고 고문에 의한 진술뿐임을 항변했다.

위조지폐를 찍어낸 혐의를 받는 피고인은 조선정판사 직원 김창선이었다. 조선정판사 변호인들은 피고인 김창선에 대해 반대 심문을 진행할 수 있도록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변호인 반대 심문을 거부했다. 김창선을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 등 다른 피고인과 분리한 채 재판을 진행했다. 형사소송법에 보장된 변호인 반대 심문권이 지켜지지 않은 심리였다.

김창선은 재판정에서 사실 심리 당시 자신의 흰 와이셔츠에 자신이 혈서로 쓴 ‘일제 잔재’, ‘악질 경관 고문’, ‘천무심’(天無心 하늘도 무심하다)을 보여주며 고문에 의한 진술이었음을 호소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검찰 구형대로 김창선,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상고심에선 한민당 간부였던 판사에 대해 변호인이 재판부 기피신청을 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7월 초 사흘 동안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 1,800명을 학살했다. 사진은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비밀해제된 사진을 발굴한 것이다.  골령골은 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이며 항일독립투사 이관술도 제주 4.3 항쟁 관련자, 여순항쟁 관련자와 함께 여기서 학살 당했다.(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이도영 박사 <죽음의 예비검속>)
한국 전쟁 발발 직후 7월 초 사흘 동안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 1,800명을 학살했다. 사진은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비밀해제된 사진을 발굴한 것이다. 골령골은 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이며 항일독립투사 이관술도 제주 4.3 항쟁 관련자, 여순항쟁 관련자와 함께 여기서 학살 당했다.(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이도영 박사 <죽음의 예비검속>)

친일 경찰들이 고문으로 조작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사회주의(좌파) 계열이 몰락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걸 반대한 미군정의 의도가 관철된 결과이자 무엇보다 해방=분단으로 고착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불굴의 항일 투사 이관술이 원통하게 학살당하는 출발점이 된 사건이다.

더 나아가 조선정판사 사건(1946)은 이관술, 박낙종의 변호를 맡은 법조인들 윤학기, 강중인, 이경용, 백석황 변호사가 이후 관제 빨갱이로 몰리면서 운명이 뒤바뀌는 사건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사상 검사 오제도가 관여한 적색 사법관 사건(1947)으로 법조계는 크게 위축돼 있었다.

사상 검사 오제도는 보도연맹(1949)을 창설한 주역으로도 활동했는데 그 외에 사상 검사로 선우종원, 정희택을 거론할 수 있다. 적색 사법관 사건(1947) 이후 국회프락치 사건(1949), 1, 2차 법조프락치 사건(1949)을 거치면서 그나마 양심을 지닌 법조인들마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시절이 도래하였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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