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되고 비극은 반복됩니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 역사를 모르면 도덕적인 삶이 어렵습니다. 누가 좋은 사람인지 누가 양의 탈을 쓴 늑대인지 분별하려면 그들의 과거, 바로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면 됩니다. 욕망하는 삶에 갇혀 지혜를 향한 열정이 식지 않도록, 그리고 지혜의 눈을 닫지 않도록 매 순간 성찰이 필요합니다.

왜 사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문학이 세인의 관심을 받을 이유는 충분합니다.

1933년 독일 시민들이 <히틀러>를 찍어주었듯이 ‘부자 되세요’가 인사말이 되던 그 시절, 우리 국민들은 <이명박>에 압도적 지지를 보냅니다. 그것도 모자라 2012년엔 다시 <박근혜>를 선택했고, 2022년엔 또다시 윤석열을 선택했습니다. 국민 절반에 해당하는 의식 자체에 집단적 성찰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히틀러는 박정희와 차원이 다릅니다. 1933년 집권하여 6년 만에 초고속 성장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1930년대 독일을 경제대국, 군사강국, 정치대국으로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스킨헤드 신나치주의자들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히틀러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독일은 역사 청산을 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지금도 나치에 협력했던 전과가 드러나면 94세 고령의 나이임에도 법정에 세우고 징역형을 때립니다. 인륜에 반하는 반인도주의 범죄에 대해 역사의 시효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우슈비츠 강제노동수용소 경비병 출신 라인홀트 한닝(당시 94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것이 2016년 독일의 현실입니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만든 유태인 강제노동수용소는 세계 시민들이 기억하는 악명 높은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될 때 경비병 한닝은 범죄가 저질러지는 현실을 방조했습니다. 뒤늦게 법정에 서서 불의를 외면한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고백했지만, 징역 5년이라는 형사처벌을 면할 순 없었습니다.

모리스 파퐁은 나치 침공 당시 프랑스 보르도시 행정책임자였습니다. 수많은 어린이와 유태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데 서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86세에 법정에 섰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사진 출처 : 한겨레 김순배 기자)
모리스 파퐁은 나치 침공 당시 프랑스 보르도시 행정책임자였습니다. 수많은 어린이와 유태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데 서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86세에 법정에 섰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사진 출처 : 한겨레 김순배 기자)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 4년간 고통을 받았던 프랑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친독 부역자들을 색출해 법정에 세우지요. 파리시 경찰국장과 국회의원 그리고 장관까지 지낸 모리스 파퐁(당시 86세)을 1997년 법의 심판대에 세웠습니다. 망명 정부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보수 우파 대통령 드골은 7천 명에 이르는 친독 부역자들을 총살형에 처했습니다.

『숙청의 역사』에서 로베르 아롱은 사사로이 즉결 처분된 반역자들까지 합하면 프랑스는 3만 명~4만 명을 처단합니다. 전체 인구 가운데 3%~5%를 반역자로 처벌한 셈이지요. 자그마치 50만 명을 법정에 세우고 15만 명을 구속하는 등 프랑스 정치인, 언론인들을 가장 먼저 단죄했습니다.

중국 역시 항일전쟁 시기, 친일 매국노 '한간'에 대해 단호하게 단죄했습니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는 국민당 출신 친일 분자 왕징웨이 등 정치인들을 처형합니다. 중국 공산당 마오쩌뚱도 백 수십 만'한간'들을 숙청합니다. 반면에 한국 사회는 반민족행위자들, 바로 친일파들에 대한 역사 청산이 없었습니다.

1949년 3월 28일 반민특위 특별재판소에 포승줄에 묶여 연행되는 노덕술(맨 앞쪽), 김연수, 최린, 이풍한(출처 : 하성환)
1949년 3월 28일 반민특위 특별재판소에 포승줄에 묶여 연행되는 노덕술(맨 앞쪽), 김연수, 최린, 이풍한(출처 : 하성환)

'반민족행위자 처리를 위한 특별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이승만 대통령이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친일 사찰계 출신 형사들을 동원해 반민특위 특별경찰대를 무력으로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5권에는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무참히 좌절되는 장면이 소상히 소개돼 나옵니다.

"반민특위 본부는 정사복 무장 경찰관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권총이나 카빈총을 제각기 든 경찰관들은 하나같이 살기에 찬 눈들을 번득이며 금방이라도 총을 쏴댈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살벌한 경계 속에서 출근하는 반민특위 관계자들은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무장해제를 당함과 동시에 수갑을 차게 되었다. (중략) 저항하는 사람은 개머리판에 맞아 이마가 터져 수갑을 차기도 했다. (중략) 어제까지도 친일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던 특수임무 수행자들이 무기를 다 빼앗기고 쇠고랑을 찬 신세로 겁에 질리거나 풀 죽은 모습들로 있었다.(중략)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가 무너지고 있는 현장의 모습이었다."- 『태백산맥』 5권 166-168쪽

제1공화국 장관들 가운데 친일 인사들이 적지 않게 들어간 이승만 정권에서 친일파, 즉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는 무참히 파괴됩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움직임은 해방 직후 민족 전체의 요구이자 당면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보수 우익을 대표하는 세력들은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습니다.

특히 친일 지주 출신들이 다수 참여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과 백범 김구조차 친일파 처단에 미온적이었습니다. 우남 이승만은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 항일전선에서 간난신고를 겪은 백범 김구조차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엄중한 실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 처단은 해방 직후 우리 민족이 당면한 제1의 민족 과업으로서 통일 독립 국가건설에 반드시 선행해야 할 숙제였기 때문입니다.

1945년 11월 환국 직후, 백범 김구 주석은 경교장에 머물게 됩니다. 문제는 경교장이 친일 부호 최창학이 제공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최창학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를 저질렀던 인물입니다. 차라리 범부가 제공하는 허름한 집인들 백범 김구 선생이 마다하지 않았을 것인데 매우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환국 후, 첫 단추를 잘못 꿰고 말았습니다.

결국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좌절되고 친일파 청산은 실패합니다. 이승만 정권은 이미 1948년 10월 여순항쟁 당시 김구 선생을 빨갱이, 바로 공산주의 배후 세력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1949년 6월 공세가 전면화하는 시점에서 1949년 6월 26일 친일파들의 흉탄에 피살됩니다. 통탄할 일이지만 민족 반역자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결과, 오히려 그들에 의해 역청산 당하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무엇보다 미군정 당국 스스로 친일파 처단을 원치 않았고 친일파 처단을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미군정 기간 통치의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이하 총독부 고위 관료들을 현직에 그대로 유임시켰습니다.* 심지어 미군정 당국은 총독부 관료들을 미군정 통치의 '행정 고문'으로 중용합니다.**

게다가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 어렵게 제정한 '민족반역자, 모리간상배 등 처벌에 관한 특별법'시행을 반대하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미군정 당국은 친일 인사들이 다수 참여해 만든 한국민주당 인사들과 밀착한 상태로 가까이 지냈습니다. 김성수, 김동원, 전용순, 이용설, 송진우, 장덕수 등 한민당 관계자들을 가장 신뢰할 만한 집단***으로 생각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 통치 기간 친일 세력의 재등장은 이후 한국 사회 가치를 밑으로부터 뿌리째 뒤흔들어 버린 결과를 자초했습니다. 민족정기는 온데간데없고 사회 정의는 실종돼 버렸습니다. 1950년대 기회주의가 횡행하고 한국 사회 전반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지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의 도덕적 타락상은 국가사회 전체의 도덕과 사회 기강을 허물어뜨렸습니다.

2014년 박근혜 정권 시절, 문창극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면서 발생한 문창극 사태는 특별하지 않다고 봅니다. “일제의 식민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목격되는 풍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해방 직후 한국교회 역시 친일 목회자들을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참배 거부의 관점에서 순교자를 모두 모아봐야 10여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존경받는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갇혀 고통받는 이야기가 따님 손동희 님이 쓴 책을 통해 전해질 뿐입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조직해 저항하다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던 참 신앙인 한상동 목사. 신사참배 문제는 이후 예수교장로교에서 고신파 분열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출처 : 하성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조직해 저항하다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던 참 신앙인 한상동 목사. 신사참배 문제는 이후 예수교장로교에서 고신파 분열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출처 : 하성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한상동 목사는 갈등 끝에 100년이 넘는 초량교회(부산 초량동 이바구길 옆에 있는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역시 초량동에 삼일교회를 세웁니다.

악랄한 일제에 소극적 저항은커녕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서며 반민족행위에 앞장섰던 절대 다수 목회자들이 참회하지 않았고 그들이 해방 후 주기철 목사의 빈자리를 채워갔던 데에 한국교회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구한말 구미 선교사들의 선교 원칙인 ‘교회는 현안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네비어스 선교 원칙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5월 광주를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한경직 목사 등 한국개신교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영락교회는 월남한 한경직 목사가 교회 개척 초기에 월남자 중심으로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다가 영락교회는 70-80년대를 거치면서 월남자 중심 신도에서 중산층 중심 대형교회로 변모해갔습니다. 서북청년회는 해방공간 한경직 목사가 영락교회 내 월남한 청년들로 만든 조직입니다. 이들이 제주 4.3 학살 당시 잔혹한 만행을 자행합니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았음에도 독재정권에 적극 항거하지 않은 채, 역대 독재정권에서, 그리고 특히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조찬기도회에 참석해  광주항쟁을 진압한 지 석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감사하다>며 축복하는 설교를 남기는 등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습니다.(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영락교회는 월남한 한경직 목사가 교회 개척 초기에 월남자 중심으로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다가 영락교회는 70-80년대를 거치면서 월남자 중심 신도에서 중산층 중심 대형교회로 변모해갔습니다. 서북청년회는 해방공간 한경직 목사가 영락교회 내 월남한 청년들로 만든 조직입니다. 이들이 제주 4.3 학살 당시 잔혹한 만행을 자행합니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았음에도 독재정권에 적극 항거하지 않은 채, 역대 독재정권에서, 그리고 특히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조찬기도회에 참석해  광주항쟁을 진압한 지 석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감사하다>며 축복하는 설교를 남기는 등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습니다.(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놀랍게도 서북청년단을 만든 장본인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라서 드리는 말씀 또한 아닙니다. 역사 청산을 거부하며 성스러운 신앙공동체를 타락시킨 친일 종교인들이 해방 후에도 버젓이 교계의 지도자로 수십 년 동안이나 군림한 때문입니다.

주기철 목사 가족이 추운 겨울날 거리를 방황하도록 만들었던 그들 교회 권력자들을 정죄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그것은 해방 후 한국교회 교파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한국기독교 최대 교파인 예장에서만 100개가 넘는 교파로 분열되었다는 기록도 읽어보았습니다. 일당 2만 원이 아니라 신념에 찬 자발적인 태극기부대 가운데는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인이 적지 않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새벽 1시 이승만은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수원 천도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비서를 대동한 채 중절모를 쓴 모습으로 새벽 4시에 서울역에 나타납니다. 인민군이 남침했을 때 특별 열차 - 말이 특별 열차이지 유리창이 깨진 허접한 3등 열차 - 를 타고 서울시민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먼저 탈출합니다. 마치 이 장면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304명 승객을 내팽개친 채 가장 먼저 탈출한 팬티 차림의 세월호 선장 이준석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과 오버랩됩니다.

대전을 거쳐 10시 대구에 이르렀을 때 대통령을 수행하던 비서 중 한 사람 - 황규면으로 추정됨 - 이 “각하, 너무 많이 오신 것 같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대구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되돌아옵니다. 평소 이승만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처럼 북진 통일을 외치면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큰소리쳤던 인물입니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서 장거리 전화를 이용해 KBS 서울방송국에다 “유엔이 참전하고 국군이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은 서울을 지킬 것이니 서울시민은 동요하지 말고 일상의 생업에 종사하십시오”라는 방송을 녹음합니다. 물론 권총을 들이 댄 상태에서 이뤄진 녹음이지요. 그리고 6월 27일 밤 3차례에 걸쳐 KBS 서울방송국에서 틀어댑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안내방송 “객실이 안전하니 이동하지 마시고 안전한 객실에 대기하라”는 그 방송 대목과 너무나 비슷해 전율을 느낍니다. 이승만은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도강파의 일원으로서 잔류파인 서울시민에게 머리 조아리고 사죄하지 않았습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지사이자 해방 후 박헌영과 결별한 뒤 사민주의 대중정치를 지향했던 참된 정치인이자 애국지사였습니다. 죽산 선생은 서울을 가장 먼저 탈출한 대통령 이승만과 달리, 6월 26일과 6월 27일 국회와 정부 청사를 오가며 기밀문서를 챙기느라 자신의 가족을 돌보질 못했고 죽산 자신도 서울 함락 직전에 가까스로 서울을 탈출했습니다. 이승만에 의해 원통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2007년 재심 신청 끝에 2011년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사진은 자신의 비서이자 딸 조호정 여사 결혼식 피로연 당시 함께한 모습입니다. 따님 옆에 계신 분이 죽산 선생입니다.(사진 출처 : 죽산 조봉암 선생 유족 제공, 한겨레신문 2022년 10월 26일자 이승욱 기자)
죽산 조봉암 선생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지사이자 해방 후 박헌영과 결별한 뒤 사민주의 대중정치를 지향했던 참된 정치인이자 애국지사였습니다. 죽산 선생은 서울을 가장 먼저 탈출한 대통령 이승만과 달리, 6월 26일과 6월 27일 국회와 정부 청사를 오가며 기밀문서를 챙기느라 자신의 가족을 돌보질 못했고 죽산 자신도 서울 함락 직전에 가까스로 서울을 탈출했습니다. 이승만에 의해 원통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2007년 재심 신청 끝에 2011년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사진은 자신의 비서이자 딸 조호정 여사 결혼식 피로연 당시 함께한 모습입니다. 따님 옆에 계신 분이 죽산 선생입니다.(사진 출처 : 죽산 조봉암 선생 유족 제공, 한겨레신문 2022년 10월 26일자 이승욱 기자)

국회의장 신익희와 국회부의장 조봉암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비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의 말만 믿고 서울에 남아 인공치하에서 생고생했던 서울시민들에게 `부역자` 딱지를 붙이고 처단하기 시작합니다. 부역자 처벌을 위한 군·검·경 합동대책위 우두머리를 자신의 최측근 김창룡을 임명하면서 말이지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고 이은주(영신 역)가 연기한 <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처형되는 장면이 바로 그렇습니다. 부역자 처단에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미처 남하하지 못한 채 잔류파가 되어 인공치하에서 석 달 동안 숨어 살았던 사상 검사 정희택은 부역자 처벌에 노발대발하지만, 김창룡의 학살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오히려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 데 핏발을 세운 <인간 백정 김창룡>을 부역자 처벌 두목으로 임명했습니다. 김창룡은 일제강점기 시절 영하 40-50도를 오르내리는 소만 국경 지역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색출, 검거하기 위해 잠복근무를 자청했던 놈입니다. 오직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한국전쟁 전후 수십 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학살한 장본인’ - 박정희 조카사위로 한국전쟁 발발 당시 육본 정보국에 근무한 김종필의 증언 - 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희대의 살인마입니다.

그놈은 여성이 빨간 옷만 입어도 관제 빨갱이로 몰았던 흉악한 놈이었습니다. 그런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을 앞세워 대통령 이승만은 부역자 처벌에 망나니처럼 공안의 칼날을 휘두릅니다. 앞줄 사형, 뒷줄 무기징역! 당시 양심적인 판사 유병진은 『재판관의 고민』이라는 회고록에서 재판이 폭력적으로 진행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1959년 7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했습니다. 3대 대통령 선거(1956)에서 개표할 때 이승만은 부정개표를 자행했습니다. 100장 단위 묶음에서 앞면과 뒷면 겉 투표용지로 쓸 이승만 표 두 장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조봉암에 대한 지지열기는 압도적으로 매우 높았습니다. 실제로 죽산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며 탄식했습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갈 당시, 죽산은 처형장 앞 미루나무를 붙들고 다시는 자신과 같은 원통한 정치범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출처 : 하성환)
죽산 조봉암 선생은 1959년 7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했습니다. 3대 대통령 선거(1956)에서 개표할 때 이승만은 부정개표를 자행했습니다. 100장 단위 묶음에서 앞면과 뒷면 겉 투표용지로 쓸 이승만 표 두 장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조봉암에 대한 지지열기는 압도적으로 매우 높았습니다. 실제로 죽산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며 탄식했습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갈 당시, 죽산은 처형장 앞 미루나무를 붙들고 다시는 자신과 같은 원통한 정치범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출처 : 하성환)

유병진 판사는 잘 알다시피 이승만이 정적 제거를 위해 조작한 진보당 사건(1958) 당시 조봉암 선생에게 간첩죄 무죄를 선고했던 용기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애국자 조봉암 선생을 195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했습니다. 당시 처형공문에 서명한 법무부 장관이 친일파 홍진기(삼성 이건희의 장인)입니다.

수년 전 2심 판결을 뒤집고 '쌍용차 정리해고는 정당하다'고 회사 측 손을 들어준 박근혜 정권 대법관들! 1, 2심을 승소한 KTX 여승무원들과 전교조 법외노조 건 당시,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시도한 대법원장 양승태 이하 대법관들과는 차원이 다른 법관이었습니다. 진정 판사의 길을 걸었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해 임정에 관여했던 신채호, 이동휘, 안창호 선생은 이승만을 모두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신채호 :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이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는 제2의 매국노이다"

이동휘 : '대가리가 썩은 놈이다'

안창호 : '정신병자이다'

실제 이승만은 상해 임정 당시 대통령이면서도 상해에 머문 시기는 6개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상해 임정 의정원에서 대통령직을 탄핵당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대목은 학교 도서관에 있는 <아리랑> 12권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제주 4.3 학살은 명백히 제노사이드(genocide)입니다. 그것도 자국민을 향해 자행한 잔혹한 국가폭력이었습니다.2차 대전 종전 후, 전 세계에서 자행된 대량학살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을 살육했습니다. 그것도 자국민을 상대로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습니다.(출처 : 하성환)
제주 4.3 학살은 명백히 제노사이드(genocide)입니다. 그것도 자국민을 향해 자행한 잔혹한 국가폭력이었습니다.2차 대전 종전 후, 전 세계에서 자행된 대량학살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을 살육했습니다. 그것도 자국민을 상대로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습니다.(출처 : 하성환)

학벌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학벌 좋은 대통령!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그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최악의 대통령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자국민을 가장 많이 학살한 권력자를 한쪽에선 ‘건국의 아버지’로 숭앙하려는 기이한 나라입니다. 국가폭력을 자행하며 제노사이드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인권을 무참히 유린한 대통령이 이승만입니다.

국회의사당 본관에 설치된 이승만 기념  동상 옆 표지석(출처 : 하성환)  의회민주주의를 철저히 짓밟은 이승만을 거꾸로 <의회 정치 발전에 초석을 놓으신> 인물로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이라면 동상 표지석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바로 잡아야 마땅합니다. 
국회의사당 본관에 설치된 이승만 기념  동상 옆 표지석(출처 : 하성환)  의회민주주의를 철저히 짓밟은 이승만을 거꾸로 <의회 정치 발전에 초석을 놓으신> 인물로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이라면 동상 표지석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바로 잡아야 마땅합니다. 

게다가 발췌개헌(1952), 사사오입 개헌(1954), 3,15부정 선거(1960)로 의회민주주의를 철저히 짓밟은 인물이 대통령 이승만입니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권 들어서서 노골적으로 이승만 기념관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나라입니다.

희대의 권력욕의 화신! 이승만을 두고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 환생했다”고 떠들었던 인물이 노산 이은상이라면 믿으시겠는지요? 조선어학회 투쟁 33인 가운데 한 명인 이은상은 한술 더 떠 박정희를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합체한 인물>이라고 극찬까지 합니다. ‘성북동 비둘기’ 시인 김광섭이나 ‘국화 옆에서’ 서정주 그 이상입니다. 그 대목의 글을 읽을 때면 정신이 어질어질해서 구토 증세를 느낍니다.  

3·15부정 선거(1960) 당시, 마산 학생들 시위를 맹비난하고 박정희 유신체제를 적극 지지한 자가 노산입니다. 1980년 정치군인 전두환이 들어설 때 그를 찬양 미화한 작태를 생각하면 마산 소재 <노산문학관>을 <마산문학관>으로 명칭을 바꾼 게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됩니다.

안진(1987). 미군정기 국가기구의 형성과 성격. 해방전후사의 인식 3. 서울 : 한길사. 198.

**진덕규(1979). 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서울 : 한길사. 49.

***전상숙(2005). 사상 통제정책의 역사성 : 반공과 전향. 한국 정치외교사 논총27집 제1. 90.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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