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은 광복 57년 만인 2002년에 대표적인 친일인사 708명의 명단과 친일행각을 공표했습니다. 이 명단에는 조선일보(방응모), 동아일보(김성수)가 포함되었는데 해당 신문사는 친일인사명단을 싣기보다 오히려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출처 : <한겨레21> 2002년 3월 6일 정영무 기자)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은 광복 57년 만인 2002년에 대표적인 친일인사 708명의 명단과 친일행각을 공표했습니다. 이 명단에는 조선일보(방응모), 동아일보(김성수)가 포함되었는데 해당 신문사는 친일인사명단을 싣기보다 오히려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출처 : <한겨레21> 2002년 3월 6일 정영무 기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세 신문은 모두 친일파들과 관련된 신문입니다. 적어도 세 신문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김성수, 방응모, 홍진기)이 세우거나 관련된 신문사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습니다.

2019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5주년을 맞아 동아일보 사옥에서 조선일보사가 있는 코리아나호텔까지 두 신문의 반성·사과와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삼보일배 행진 장면(출처 : 글과 사진 한겨레신문 김봉규 선임기자)
2019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5주년을 맞아 동아일보 사옥에서 조선일보사가 있는 코리아나호텔까지 두 신문의 반성·사과와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삼보일배 행진 장면(출처 : 글과 사진 한겨레신문 김봉규 선임기자)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이 자행되던 1970년대 중반 <언론자유수호투위> 사건 당시 200명 가까이 양심적인 기자들(대부분 『동아일보』 기자들)을 해고했던 신문입니다.

공덕동 한겨레 신문 사옥(출처 : 김명진 한겨레신문 기자)
공덕동 한겨레 신문 사옥(출처 : 김명진 한겨레신문 기자)

그 해직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87년 6월 항쟁 이후, 7만여 국민을 주주로 받들어 만든 신문이 바로 ‘진보 언론‘ 『한겨레』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한겨레 신문사 사옥 <청암홀> 입구 공간에 있는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선언문>(출처 : 하성환)
한겨레 신문사 사옥 <청암홀> 입구 공간에 있는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선언문>(출처 : 하성환)

해마다 3, 4월이 오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창간을 자축하면서 ‘민족정론지’임을 자처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두 신문 모두 1920년에 창간되었으니 올해로 103주년이네요. 따라서 『조선일보』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신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문입니다.

더구나 한국사 교과서엔 일제 치하 1930년대 독립운동사를 서술하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 신문이 30년대 민족운동(문맹퇴치, 브나로드)을 주도하여 독립운동을 도모한 민족 언론인 것처럼 서술한 것이지요.

그러나 두 신문은 민족지로서 항일의식을 고취해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했다기보다는 일제 식민 통치 현실을 인정하는 타협적이고 개량적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종국엔 항일의지를 거세시키려는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에 포획돼 민족분열정책에 일조한 측면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학계 일부에선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1929)이나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1931)을 독립운동의 반열에 올리기를 상당히 꺼리는 분위기입니다.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조선일보 <문맹퇴치운동>과 동아일보 <브나로드 운동>(출처 : 하성환)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조선일보 <문맹퇴치운동>과 동아일보 <브나로드 운동>(출처 : 하성환)

왜냐하면 30년을 전후해 총독부의 허가로 시작된 운동이자 둘 다 30년대 중반에 조선총독부의 금지 조치로 중단된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신문 사주의 처지에선 당시 90%가 넘는 높은 문맹률을 해소함으로써 신문 구독자수를 늘릴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30년대 초 문맹퇴치운동과 브나로드 운동은 이윤 추구라는 자본의 논리가 깔린 운동이었습니다.

대표 사례로 두 신문은 1932년 1월 히로히토 일왕을 겨냥한 투탄 의거에 대해 이봉창 의사를 범인이라고 썼습니다. 게다가 일왕의 무사함이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기사화했습니다. 『동아일보』가 먼저 그렇게 썼고 『조선일보』는 이튿날 『동아일보』 보도기사 내용을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베껴 썼습니다.** 항일민족지의 면모는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은 전두환 5공 시절인 1985년에 서로 자사 발행 신문이 진정한 ‘민족정론지’였다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논쟁 과정에서 서로 헐뜯는 일이 벌어졌고요. 그 결과 상대 신문이 ‘친일 신문’이라고 공격하는 추태를 벌이다 진흙탕 싸움임을 깨닫고 중단한 적도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에 창간하고 『조선일보』는 그보다 앞서 1920년 3월에 창간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동아일보』가 구독자 수에서 압도적으로 많았고 『조선일보』보다 조선 민중에게 인기도 훨씬 높았습니다. 실제로 『조선일보』가 신문시장 1위를 점하는 것은 권력과 가장 밀착된 시절인 1980년 이후 전두환 군부정권부터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전까진 『동아일보』가 항상 신문시장 1위였습니다.

1920년대 당시 신문 지면을 보면 논조에서 『조선일보』가 더 비판적인 기사를 실었음에도 항상 『동아일보』에 밀렸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창간 당시 신문사 논조를 규정하는 사시(社是)에도 있었겠지만 ‘창간 주체’에서 확연히 갈린 탓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조선일보』 창간 주체는 뼛속 깊이 친일 단체인 「대정친목회」였기 때문입니다.

「대정친목회」는 1910년대를 통틀어 국내 유일하게 존재한 결사체였습니다. 1916년 11월 29일 내선융화를 기치로 명월관에서 친일 인사 50여 명이 참석하여 설립된 국내 유일한 단체였습니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극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총독부 기관지 이외에는 신문이 허용되지 않았고 조선인은 단체를 만드는 등 결사와 집회의 자유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좌우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가 1927년 창립된 이후에는 『조선일보』의 항일 논조는 대단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를 ‘신간회 기관지’라고 명명할 정도로 일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민세 안재홍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의 탄압과 함께 신간회 운동이 쇠락한 1931년 이후, 『조선일보』는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되고 결국 1933년 현재 조선일보 사장(방상훈)의 증조부인 방응모에게 넘어갑니다. 방응모는 일제 강점기 광산업으로 부자가 된 친일파인데 방응모 인수 이후, 『조선일보』는 가장 친일적인 신문으로 치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3·1 민족해방운동>을 계기로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탈바꿈한 것은 조선 민중의 저항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제 식민당국이 취한 고도의 통치술에서 비롯합니다. 왜냐하면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1919년까지 이렇다 할 조선 민중의 저항은 거의 없었는데 <3·1 민족해방운동>은 일제 식민통치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 초반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실체가 드러난 「신민회」 사건 이후, 「대한광복회」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지하결사체로서는 유일한 항일단체였습니다. 김원일의 대하소설 『늘 푸른 소나무』에 박상진의 「광복회」 실체가 언급됩니다. 총사령 박상진은 일제에 피검돼 처형당하고 우리가 잘 아는 김좌진 장군이 대한광복회 부사령이자 만주지부 책임자였습니다.

1920년 3월 5일 먼저 창간된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는 친일 상공인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조진태·예종석·민영기 등이었다. 동아일보는 조선일보보다 한달 늦은 4월1일 총독부 기관지 편집국장 출신 이상협을 발행인으로, 이른바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박영효를 사장으로, 그리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20대의 지식인 김성수(1891~1955)를 주주대표로 하여 창간됐다.(출처 : 글과 사진 한겨레 2005년 12월 1일 이승경 기자)
1920년 3월 5일 먼저 창간된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는 친일 상공인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조진태·예종석·민영기 등이었다. 동아일보는 조선일보보다 한달 늦은 4월1일 총독부 기관지 편집국장 출신 이상협을 발행인으로, 이른바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박영효를 사장으로, 그리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20대의 지식인 김성수(1891~1955)를 주주대표로 하여 창간됐다.(출처 : 글과 사진 한겨레 2005년 12월 1일 이승경 기자)

<3·1 민족해방운동>에 깜짝 놀란 조선총독부와 경기도 경찰부(당시 서울은 경기도 경찰부 관할이었음)가 조선 민중의 동태를 손쉽게 파악하고 첩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신문 창간을 제한적으로 허락하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선일보』를 창간한 자들이 <대정친목회>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대정친목회>는 총독부 관료를 하다가 임기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관료들 송환영회를 차려주던 친일 단체입니다. 유명한 친일 분자 예종석, 조중응, 이완용, 한상룡 등이 창간 멤버입니다. 이완용의 적수! 송병준도 곧이어 조선일보 경영에 참여합니다.

이완용이 총리대신 할 때 송병준이 농상공부 대신하던 놈인데 나중엔 서로 먼저 조선을 팔아먹겠다고 아웅다웅하며 악의의 경쟁자가 됩니다. 둘 다 일제 강점기 직후 일본 왕으로부터 큰돈을 거머쥐고 귀족의 작위를 받습니다.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자신의 며느리를 겁탈했던 놈인데 그 일로 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송병준은 헤이그 특사 사건 직후, 고종을 능멸하며 왕위에서 강제로 끌어내렸던 놈이기도 합니다. 결국 나라 팔아먹기 경쟁에서 선수를 친 이완용이 승리합니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잘 몰랐기에 자신의 비서이자 『혈의 누』의 저자 이인직을 야심한 밤에 통감부로 몰래 보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와 선을 댔기 때문이지요. 통감부 고위 관료 고마츠 미도리는 이인직이 관비유학생으로 동경정치학교에서 공부할 때 이인직을 가르친 스승이었습니다.

중추원 참의까지 했던 악질 친일파의 작품이 근대 신소설의 선구적 작품이라고 한때(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교과서에 실리고 시험에도 잘 나왔던 걸 생각하면 한국 사회가 제정신인가 생각이 듭니다. 그 시절 교육이 정말 교육이었을까요? ...

진실에서 비껴간 채, 지배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입된 파시즘에 가까운 정신교육은 아니었는지 의문이 들곤 합니다.

『조선일보』가 빛을 발한 시기는 1920년대 중후반 비타협 민족주의 계열(이상재, 안재홍, 신석우) 독립지사들이 신문사 사장을 하고 사회주의 계열 코뮤니스트(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홍남표, 양명, 김남수) 항일혁명가들이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할 때가 전부입니다.

현재 방 씨 일가의 할아버지인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1933년부터 1940년 자진 폐간할 때까지 정·폐간 등 일제로부터 탄압받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친일파 방응모가 인수한 1930년대 조선일보는 총독부 기관지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친일 논조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1989년 말 5공 청문회 당시,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이 TV 앞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폐간”을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린 대목은 역사를 모독한 행위였습니다. 오히려 적극적 친일 행위 탓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논조가 똑같았고 전시 물자 절약 차원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스스로 알아서 폐간한 것이지요.

고려대 안암캠퍼스에 있는 인촌 김성수 기념 동상(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고려대 안암캠퍼스에 있는 인촌 김성수 기념 동상(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동아일보』는 김성수가 창간했는데 그 역시 『조선일보』의 방응모와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입니다. 고려대 캠퍼스에 가면 이화여대의 김활란 동상처럼 아직도 김성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 조선의 청년들에게 학병을 권유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총알받이가 될 것을 여러 차례 강연과 신문을 통해 역설한 친일파입니다.

* 강동진(1980).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서울:한길사. 386쪽.

**김동민(1990). 「일제하 조선 동아일보는 민족지였나」.  『역사비평. 제11호. 200-205쪽.

***장신(2007).  「대정친목회와 내선융화운동」.  대동문화연구. 제60집. 364-366쪽.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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