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

때 : 2017년 11월29일 09:10 ~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 의병정신 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 의병 유적지 19개소

문화원에서 회합을 마치고, 차를 타고 나서서 불과 5분도 안 되어서 차를 멈추고 해설을 해주시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지금 여기에서 저 위쪽으로 약간 우묵한 곳에 6현사가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일본이 여기에 신사를 지으려고 하자 우리 조상들 중 몇 사람이 이곳은 유명한 조상님들을 모신 곳이므로 신사 설치가 절대 안 된다고 반대를 하고 작은 6현사를 지어서 막았다고 하는데 현존 건물은 없습니다.” 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보니 바로 이웃에 내가 3년 동안이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학교 공원화의 시범학교를 만드니라고 애를 썼던 보성남국민학교가 있었다.

▲ 장계 쓰는 충무공상. "해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편입하라"는 어명에 이곳에서 장문의 장계를 써 올리고 해군을 재조직하여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六賢祀

○ 1807년(순조 7) 건립하여 六賢을 享祀하는 사당이었으나,

1871년(고종 8) 書院 철폐령에 의해

龍山書院․ 大溪書院과 합계 毁撤

○ 위치 추정 : 보성읍 동윤 2동 가곡리 육현사골

(지금의 望美峰 산하) 남쪽 분지에 있었던 것으로 口傳

○ 六賢 : 朴春長․金銑․崔繼憲․任喜․李懋臣․鄭佶

그동안 변하고 주변의 건물들이 새로 지어져서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되고 보니 이렇게 내가 살던 집터인데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나 보다.

마침 우리가 차를 내린 곳에는 공사가 한창 진행이 되고 있었다. 충무공께서 선조임금의 명을 받아서 그에 대한 답신 <장계>를 써서 보냈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바로 그 장계를 작성하시는 모습을 표현하여 만든 동상이었다. 여기에서 충무공은 선조 임금님의 명령인 “해군을 버리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어기고, “소인에게는 아직도 열 두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고 장계(이는 어명을 어긴 불충이요, 잘못하면 역모로 몰릴 수도 있는 큰 죄가 되는 일임)를 올리고, 나아가서 [명량대첩]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 공사중인 동상 인근

이런 일로 하여 선조의 미움을 사서 전쟁이 끝나고 나면 상을 받기는커녕 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충무공은 결국 노량해전에서 자살이나 마찬가지의 '갑옷을 입지 않은 채 적군의 총포가 겨냥하고 있는 뱃머리에 섰다가 총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장계 쓰는 충무공 상'을 두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에 심한 언쟁이 벌어졌다. “난중일기에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하여서 보성에 오셔서 8박 9일을 묵으셨다.”라는 얘기에 “왜 8박 9일인가? 9박 10일일세.” 하고 언쟁이 벌어졌다.

결국 그런 우김질이 나온 것은 구미영에서 하룻밤을 잤는데, 그 구미영이 일기상에는 장흥 땅으로 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보성군 회천면이니까 9박 10일이라는 것을 서로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니까 분명 그것은 9박 10일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작은 것에도 서로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기도 하고 언쟁이 벌어지곤 하였지만, 이 모두가 좀 더 정확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같은 생각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들이었다.

우리가 이런 공사 모습을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듣고 공사를 하던 인부 중에 감독인 듯한 한 사람이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명령을 받는 모습이었다.

우리들은 이 동상이 과연 여기에 서야 하느냐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었기에 별로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뒷면의 약간 높은 토지를 깨뜨려 만든 돌들을 철사망에 담아서 넣는 방식으로 우선 조치를 한 다음에 약간 높게 대를 만들어서 충무공이 고개를 숙이고 장계를 쓰고 계신 모습을 만든 것이다.

‘이 모습이 과연 옳은가?’

‘한산도가가 여기에서 작성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닌가?’

충무공을 숭모하고 동상을 만든 것은 좋겠지만, 자기 고장만의 자랑으로 여기는 일은 조금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 장계쓰는 모습. 이렇게 장계를 써 올리고 [한사도가]를 읊으셨다는 주장이 있다.

충무공은 보성과 상당히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분임에는 틀림없다.

부인 방 씨가 잠시나마 아버지(2년간)를 따라 보성에 와서 살았고, 백의종군하여 승주를 떠나서 보성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장군에게 희망이 생기고 새로운 준비를 하게 되었다. 맨 먼저 조양창의 양곡을 확보하여 군량미로 삼았고, 보성읍성에 들어서서 며칠을 묵으면서, 읍성의 무기와 이 마을 사람들을 모집하여 군사로 삼았고, 구미영에서 배설이 가져다 둔 판옥선 12척을 얻었으니, 이제 노를 저을 어부들을 모집하고 어선들을 동원하여 33척의 선단까지 꾸렸으니 사실상 명량해전의 병력은 모두 보성에서 갖추었던 것이다.

이런 인연이 있다는 것을 나는 영화 <명량해전>이 인기리에 상영이 되던 시절에 카페와 블로그 등을 동원하여 알리곤 하였다.

하지만 장계를 쓰는 모습의 동상과 한산도가의 보성 작성 등을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뚜렷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 공연히 근거 없는 이야기로 지방의 명예만 더럽히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이었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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