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물 좋기로 소문난 옹달샘에 사람 열 명이 물을 마시고 물맛에 대해 한 마디씩 말했다고 가정을 하지요. 그러면 물맛에 대한 사람들의 표현이 조금씩 다르겠지요. 그 중 한 사람이 물맛을 ‘담백하고 상큼하다’고 말했다면 그것이 진짜 그 물맛일까요? 아니지요. 물을 먹고 난 후의 그 사람의 입맛을 말한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물맛은 한 가지인데 물맛을 본 사람들이 물맛이라고 쏟아낸 말은 모두 다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마시고 나서 말한 그 물맛은 ‘참 물맛’이 아닌 것이지요. 물만이 알고 있겠지요.

이렇게 물맛에 대해 말(언어문자)로 표현하면 진짜 물맛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그 진짜 물맛은 하나인데 물맛을 본 사람들의 입맛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렇듯이 우주 삼라만상의 속성과 실체와 참된 이치(진리)는 언어문자로는 완전히 나타낼 수 없는 것이 되지요. 노자 81장 전체를 대표하는 1장에서는 언어문자의 한계성에 대해 대못질을 해 놓았네요. 진리(道)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지요.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도를 가히 도라고 말하면, 항상 하는 도가 아니다.
이름을 가히 이름이라고 부르면, 항상 하는 이름이 아니다. <道德經 1장에서>

1.

道①可②道③ 非④常⑤道⑥

道①⑥ - 도(眞理)를 ‘물맛’에 비유하지요. 道③ - 말할 도. 이를 도.

道① ‘물맛’을(도)
可② 가히
道③ ‘담백하고 상큼하다’고 말하면(도라고 말하면)
非④ 아니다.
常⑤ 항상 하는(변하지 않는)
道⑥ ‘물맛’이(도)

다시 번역해 보면
‘물맛’①을 가히 ‘담백하고 상큼하다’고 말하면③ 항상하는 ‘물맛’⑥이 아니다.

2.

名①可②名③ 非④常⑤名⑥

①⑥名을 ‘꽃’에 비유하지요. ③이름 부를 명

名① ‘꽃’을(이름)
可② 가히
名③ ‘꽃이라고 이름 부르면’
非④ 아니다.
常⑤ 항상 하는(변하지 않는)
名⑥ ‘꽃’이(이름)

다시 번역을 해 보면,
‘꽃’①을 가히 ‘꽃이라고 이름 부르면’③ 항상하는 ‘꽃’⑥이 아니다.

‘꽃’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서로 약속을 한 언어에 불과한 것이지요. 진짜로는 ‘꽃’이 아닌 것이지요. 사람들이 꽃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꽃에게 물어 보면 무엇이라 할까요? 아무 대답이 없겠지요. 그래서 우주 삼라만상들의 이름은 사람들이 소통을 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름일 뿐이지 그 사물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임시로 이르고 있는 ‘이름名’인 것이지요. 또한 사람들의 호칭을 ‘이름’이라고 하지요. 그 이름이 나를 대신하고 임시로 부르는 것이지 나의 실체는 아니지요. 이름은 ‘나’가 아니지요. 결국 ‘나’라는 말조차도 이름에 불과한 것이지요.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사진출처 : : 2018년 7월 9일자 한겨레21)

3.

불교철학에서는 이것을 일러 입만 열면 착오가 생긴다고(開口卽錯) 하지요. 언어문자로는 그 실상(實相)을 세울 수 없다(不立文字)고 하지요. 모든 가르침은 문자 이외(敎外別傳)의 마음에서 마음으로(以心傳心)만 전달된다고 하지요. 그래서 굳이 말로 하자면 ‘모른다(不識)’이고, ‘침묵(沈黙)’을 하는 것이라지요.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제자 가섭에게 법(眞理)를 전할 때,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고 그것을 가섭이 미소(拈華示衆의 微笑)로 대답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지요.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마음 길이 사라진 자리(心行處滅), 언어문자가 끊어진 자리(言語道斷)로 들어가는 화두 간화선(참선) 수행을 한다고 하지요. 이미 주역(周易)에서는 ‘글로는 말을 다 할 수가 없고(書不盡言), 말로는 마음 뜻을 다 할 수 없다(言不盡意)’고 하여 진리를 언어문자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설파했네요.(계사상 12).

이상에서 볼 때 우리는 언어문자로 인해 오해가 발생하는 일들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체험하고 있지요. 편지글이나 카톡, 메시지문자로 발생하는 오해들, 사람의 본심을 말이나 글로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경우이지요. 오해를 풀려고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오해가 쌓이는 경우도 많지요. 그래서 말조심에 관한 속담이 가장 많은 이유를 헤아릴 수가 있지요.

따라서 어릴 때부터 다양한 독서와 문화체험을 통해서 말하는 기본 소양을 쌓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왜? 아니오!’라는 문제의식과 대화 토론, 논쟁을 하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바로 ‘철학적 마인드’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무조건 ‘말조심 하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식의 훈계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요. 사회 풍토와 문화 배경이 따라 주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겠지요. 결코 가볍고 쉬운 일이 아니네요.

<참고 자료> 道德經 1장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정상의 도(道)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고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정상의 이름(名)이 아니다.

無名 天地之始(무명 천지지시),
有名 萬物之母(유명 만물지모)

이름 없는 것, 즉 무명(無名)은 천지의 처음이고,
이름 있는 것, 즉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故 常無 欲以觀其妙(고 상무 욕이관기묘)
常有 欲以觀其徼(상유 욕이관기요)

그런 까닭에 상무(常無)에서 그 지극히 미묘한 것을 보고자하고,
상유(常有)에서 그 결과를 보고자한다.

此兩者 同出(차량자 동출) 而異名(이이명)

이 유와 무 두 가지는 같은 것에서 나왔으나 이름이 서로 다를 뿐이다.

同謂之玄(동위지현)

그 같은 것을 유현(幽玄)이라고 한다.

玄之又玄(현지우현)
衆妙之門(중묘지문)

유현하고 또 유현하여
모든 미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참고 자료>

1.노자. 이민수. 혜원출판
2.노자. 노태준. 홍신신서
3.노자와 장자. 이강수. 길
4.노자와 21세기. 김용옥. 통나무
5.주역으로 보는 도덕경. 김석진. 대학서림
6.왕필의 노자. 임채무 번역. 예문서원
7.도와 로고스. 짱롱시. 정진배 번역. 강
8.노자 강의. 야오간밍. 손성하 번역. 김영사
9.네이버 자료

[편집자 주] 한겨레 주주인 김상학 선생님은 현재 대학 교육원에서 주역, 노자, 장자, 역학 등을 강의하고 있고, 한민족의 3대경서를 연구하고 있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상학 주주통신원  saram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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