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샘의 『네거리의 예술가들』을 읽고

한국근현대문학사 서술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념’으로 재단하는 것이다. 분단 상황에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학문, 생활 영역 모든 면에서 이데올로기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해 왔다. 오늘날 학문의 왜곡은 말할 것도 없고 보훈의 원리나 적용에서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위력적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큰 현상금이 나붙었던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에 대해 남과 북 모두에서 차갑게 외면당하는 현실이 그러하다. 남쪽에선 북한 정권에 참여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북에선 장제스 스파이로 내몰려 숙청당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약산 선생은 일제가 가장 잡고 싶어 했던 항일투사였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200억이 넘는 거액의 현상금이 나붙었던 조선 최고의 항일투사였다.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남북을 통틀어 최고의 문학작품은 이기영의 장편소설 『고향』이다. 당시 국내외 평가이자 당대 문인들 모두 인정한 사실이다. 그러나 김현, 김윤식이 함께 쓴 『한국문학사』(1973)에는 단 한 줄 언급돼 있지 않다. 오히려 농촌계몽소설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는 있어도 카프(KAPF)에 속했던 이기영의 작품 『고향』은 없다.

게다가 30년대 전반기 카프(KAPF)의 수장 임화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노동소설을 대표하는 작품 강경애의 『인간문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두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돼 서술된 탓이다. 이를 두고 문예비평가 늘샘은 최근에 펴낸 역작 『네거리의 예술가들』(사실과 가치, 2020)에서 『한국문학사』 서술이 좁직하다 못해 ‘국뽕’ 수준이라고 매섭게 질타했다.

<네거리의 예술가들> : 한국문학사 서술의 문제점을 작가 중심으로 새롭게 비평한 책 표지.(출처 : 사실과 가치)2020년 12월 31일 발간된 이 책에서 글쓴이 늘샘 김상천은 기존 <한국문학사>가 반공주의 시각에 갇혀 ‘국뽕’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준열히 비판했다.
<네거리의 예술가들> : 한국문학사 서술의 문제점을 작가 중심으로 새롭게 비평한 책 표지.(출처 : 사실과 가치)2020년 12월 31일 발간된 이 책에서 글쓴이 늘샘 김상천은 기존 <한국문학사>가 반공주의 시각에 갇혀 ‘국뽕’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준열히 비판했다.

제국주의 말기로 치달을수록 문인들 절대 다수가 친일행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에 김동리는 이은상처럼 일제 말기 친일의 흔적이 없었다. 그런 김동리조차 해방 후 ‘반공’문학의 제일선에서 활약했다. 이데올로기는 문학 이전에 문인들 생존의 기반으로 작용한 탓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데올로기에 기생해 문인으로 성장하고 문단권력화한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도 않고 당대 지식인으로서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가 중심이 돼 만든 ‘조선청년문학가협회’(1946. 4. 4)는 좌파 중심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섰기 때문이다. 김동리가 중심이 돼 만든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순수문학을 표방하며 이를 주창했다. 그렇지만 창립대회 당시 친일세력을 비호한 이승만과 러취 미군정장관이 참석해 화려하게 축사를 남긴 정치색 짙은 우익 문인대회였다. 모두 탁치파동 정국에서 발생한 현상들이다.

해방 직후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는 반민족(친일)세력을 청산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대 시대정신이자 문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좌파 중심의 ‘조선문학가동맹’은 그 점을 숙지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문학가동맹’에는 일제강점기 카프(KAPF) 계열 작가들만 가입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파 작가로 분류되는 문인들도 적지 않았다. 박종화, 이병기, 정지용, 김광섭, 김광균, 이양하, 조윤제, 이희승, 변영로 등이 가입돼 있었던 것은 그를 반증한다. 그러나 탁치 정국은 한순간에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민족세력 대 친일(반민족)세력의 대결 구도를 좌우 이념대결구도로 일거에 국면을 전환시켜버렸다.

두 차례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남쪽 사회에 조성된 정세는 ‘신탁통치 찬성=매국, 신탁통치 반대=애국’으로 인식돼 있었다. 반민족(친일)세력들은 새롭게 조성된 좌우 이데올로기 구도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을 세탁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았다. 그들은 ‘반공’을 앞세우며 ‘애국자’인 양 행세했다.

탁치 정국이 빚은 좌우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동리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우파, 친일문인들이 중심이 돼 만든 ‘전조선문필가협회’(1946. 3. 13)와 함께 남쪽 문단의 주류로 자리 매김돼 갔다. 그것은 미군정이 남로당을 비롯해 좌파진영에 대해 노골적으로 탄압을 가시화하면서 백색테러가 횡행한 탓이다. 좌파 문인들은 문예활동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둘 북을 선택해 월북했다. ‘조선문학가동맹’ 활동의 중심이었던 임화, 이태준, 이기영 등도 1946년~1947년 그 시기 월북했다.

‘조선문학가동맹’이 해산되고 좌파 문인들이 사라진 공간에 우파 내지 친일문인들은 더욱 이념의 색깔을 높이 치켜세우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1948년에 개최된 ‘민족정신 앙양 전국 문화인 총궐기 대회’는 그 뜨거운 분위기를 동원해 문학잡지와 초중고 학교 교과서에서 좌파 문인들의 작품을 삭제했다. 그리고 1948년 정부수립 이후 가장 화려하게 치러진 ‘민족정신 앙양 종합예술제’를 거국적으로 개최하면서 남쪽 문단권력을 우파 내지 친일 문인들로 확실하게 재편했다. 그 영향력으로 1949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문인단체 「한국문학가협회」(1949)를 탄생시켰다.

<친일문인기념상> 비판 세미나 포스터 :(출처 : 김상천)2020년 10월 31일 홍대 근처 청년문화공간 JU에서 개최된 ‘김동인 문학’ 비판 세미나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한 행사로 조선일보가 매년 <김동인 문학상> 수상작을 발표하고 거액의 상금을 제공하는데 이것이 왜 문제인지 김동인 문학 작품 세계를 소장학자들 중심으로 연구 발표한 세미나였다.
<친일문인기념상> 비판 세미나 포스터 :(출처 : 김상천)2020년 10월 31일 홍대 근처 청년문화공간 JU에서 개최된 ‘김동인 문학’ 비판 세미나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한 행사로 조선일보가 매년 <김동인 문학상> 수상작을 발표하고 거액의 상금을 제공하는데 이것이 왜 문제인지 김동인 문학 작품 세계를 소장학자들 중심으로 연구 발표한 세미나였다.

「한국문학가협회」는 1961년 박정희 5‧16 군사쿠데타 직후 사회단체 통폐합 조치에 따라 「한국문인협회」로 재탄생된다.  「한국문인협회」 를 든든한 배경으로 친일문인들을 기리는 문학기념상이 관행처럼 이어져 왔다.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등이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 문단 권력의 중심을 차지했다.  김동리를 제외한 서정주, 조연현은 대표적인 친일문인들이다.  

그들은 문단권력을 행사하면서 과거 독재시절 친정부적 성향을 노골화하였다. 겉으로는 순수문학을 표방하고 때론 순수-참여문학 논쟁을 촉발시키면서 정치색을 부끄럼 없이 드러냈다. 그 모순된 단적인 사례가 2007년 말 대선에서 「한국문인협회」 명의로 이명박 후보(한나라당)를 공개 지지한 장면이다. 마치 친정부 색깔을 노골화하며 창립된 대한교련의 후신 한교총이 2016년 박근혜 한국사 국정제 지지 성명서를 낸 것과 비슷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저명한 어느 국문학자는 임화를 평가하기를 “한국근대문학에 과학성과 역사성을 부여했다”며 그의 문학사적 위상을 높게 인정했다. 한국근대문학을 ‘이식문학사’로 정리한 임화의 젊은 날 카프(KAPF) 시절 문예활동은 단연 돋보일 뿐만 아니라 1930년대 김태준과 함께 전개한 ‘조선학’ 운동 역시 높게 평가 받아 마땅한 일이다.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이 우파 문인들에 의해서만 수행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늘샘은 『조선소설사』와 『춘향전』을 쓴 김태준이 한국근대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분석한다. 왜냐하면 『조선소설사』는 중국문학을 공부한 김태준이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쓴 ‘조선학’ 운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일제 관학자들이 시도한 조선문학사 서술에 앞서 조선인의 시각으로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서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마치 일제 총독부 관학자나 경성제대 학자들이 시도했던 조선교육사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쓴 이만규의 『조선교육사』를 연상시키는 결실이 아닐 수 없다. 교육사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이만규의 『조선교육사』를 능가하는 교육사서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늘날 교육사 서술에서 학자들 절대 다수가 이만규의 『조선교육사』를 참고하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춘향전』 역시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경의 감시를 뚫고 박진홍과 함께 연안으로 탈출한 김태준은 변절하지 않고 일제 패망까지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해방 공간 남로당 문화선전대 활동 도중 지리산 빨치산 토벌 당시 체포돼 처형됐다. 칸트를 비롯해 서양 철학을 수용한 1세대 철학자 박치우와 같은 비극적 운명에 처했던 것이다.   시간이 되면 『조선소설사』을 개정 증보하려던 문학도로서 김태준의 꿈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왜냐하면 글쓰기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시도이자 이데올로기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현의 표현대로 문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결부될 때 그 생명력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봉사를 강요당할 때 질식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동안 한국문학사는 ‘반공’이라는 편향된 이데올로기에 갇혀 좁직한 문학세계를 기술한 과오를 범했다. 그리하여 『네거리의 예술가들』을 쓴 늘샘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편향된 세계를 좁직하게 서술할 것이 아니라 좌우를 모두 포용해서 한국문학사를 새롭게 써야 함을 일갈했다. 그러할 때 ‘한국문학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나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좁직한 이념의 편향성과 함께 ‘한국문학사’ 서술을 다시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당대 지식인으로서 작가들의 궤적을 균형 있게 평가하기 위함이다. 임화, 이태준, 김태준, 이기영이 배제된 그 공간에 ‘한국문학사’는 김동인, 서정주를 미화하다 못해 높게 평가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거대한 뿌리’ 김수영을 생각하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50-60년대 극도로 핍절한 시절, 김수영은 작가로서 지식인의 자세를 유감없이 보여준 문인이었다. 사르트르의 표현처럼 김수영은 ‘이데올로기’와 ‘진실’을 구별할 줄 알고 살아갔던 지식인이었다. 가난과 어두운 시대, ‘진실’과 ‘양심’에 따라 살아간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늘샘은 이를 두고 당대 최고의 ‘모럴리스트’라고 비평했다.

김수영이 번역한 평론집 <시인의 거점> 표지 (출처 : 도서출판b, 한겨레신문)김수영이 번역한 평론들을 한데 모은 이 평론집에는  토마스 만의 ‘지드의 조화를 위한 무한한 탐구’, 조지 슈타이너의 ‘맑스주의와 문학비평’ 같은 문학평론 성격의 글과 장폴 사르트르의 ‘아메리카론’, 에우제네 이오네스코의 ‘벽’처럼 수필이나 시사평론으로 분류해야 할 글이 섞여 있다.
김수영이 번역한 평론집 <시인의 거점> 표지 (출처 : 도서출판b, 한겨레신문)김수영이 번역한 평론들을 한데 모은 이 평론집에는 토마스 만의 ‘지드의 조화를 위한 무한한 탐구’, 조지 슈타이너의 ‘맑스주의와 문학비평’ 같은 문학평론 성격의 글과 장폴 사르트르의 ‘아메리카론’, 에우제네 이오네스코의 ‘벽’처럼 수필이나 시사평론으로 분류해야 할 글이 섞여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그의 삶과 문학은 그가 남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50년대 ‘거미’ (1954)와 ‘구름의 파수꾼’(1956), 60년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1960), ‘푸른 하늘을’(1960), ‘거대한 뿌리’(1964), ‘어느 날 고궁을 나서면서’(1965), 그리고 마지막 작품이 된 ‘풀’(1968)에 이르기까지 170편 넘게 쓴 김수영의 작품은 빈곤과 부패가 횡행하던 독재시절! 그의 삶을 시대의 자화상처럼 녹여낸 것들이다.

훗날 전두환 전기를 쓰며 전두환을 찬양한 이병주와 마주 앉은 어느 날, 김수영이 이병주의 뺨을 때린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어두운 시대를 ‘모럴리스트’로서 증언하듯이 작품을 쏟아낸 김수영으로선 지극히 당연한 삶과 문학사의 한 장면이었다. 김수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신동엽은 추도사에서 이렇게 애도했다.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민족의 손실, 이 손실은 서양 어느 일개 대통령 입후보자의 죽음보다 5천만 배는 더 가슴 아픈 손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한국일보』 1968. 6. 20. 늘샘 『네거리의 예술가들』 359-360쪽에서 재인용)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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