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동진 장군이 대중의 기억에서 잊힌 이유

1920년대 만주 항일무장 투쟁의 3대 맹장은 일송 김동삼, 백야 김좌진, 송암 오동진이다. 김좌진 장군은 유관순만큼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큼직한 사진과 함께 청산리 전투의 주역으로 설정돼 단연 돋보인다.

그에 비하면 김동삼 선생은 교과서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논문 여러 편이 존재한다. 이미 학계엔 널리 알려진 존재이다. 무엇보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빚어졌을 때 이를 수습하고 화합을 추구했던 민족지도자로 김동삼 선생은 당대 항일독립운동계 걸출한 인물이었다.

1923년 임정개조파와 창조파가 충돌하며 상해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맡았을 정도로 그 고결한 인품은 뛰어났다. 그러나 김동삼 선생은 1931년 일제에 피체된다. 평양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7년에 이른 악형과 고문 끝에 통한의 한을 품고 옥사한다.

일송 김동삼. 김동삼 선생은 1923년 상해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당시 의장을 맡았다.  그는 오동진 장군과 함께  통의부에서 활동했고 이후 정의부  창립을  함께 주도했으며 임정 개조론자였다. 지조와 절개가 뛰어났음에도 항일독립지사들 간 화해와 화합을 추구해 존경받았던 인물이었다.(출처 : 국가보훈처)
일송 김동삼. 김동삼 선생은 1923년 상해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당시 의장을 맡았다. 그는 오동진 장군과 함께 통의부에서 활동했고 이후 정의부 창립을 함께 주도했으며 임정 개조론자였다. 지조와 절개가 뛰어났음에도 항일독립지사들 간 화해와 화합을 추구해 존경받았던 인물이었다.(출처 : 국가보훈처)

순국 직전 일송 김동삼 선생이 남긴 유언은 오늘도 널리 회자된다. 일송 선생을 흠모했던 만해 한용운은 선생의 유언대로 화장한 뒤 유해를 한강에 흩뿌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 일송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기 직전 남긴 유언

그런데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송암 오동진 선생은 길거리 지나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계조차 오동진 장군에 대한 논문 한 편이 없는 실정이다.

오동진 장군 추모 포스터. 2020년 12월 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 입구 오동진 장군 추모비 앞에서 추모식 행사를 알리는 안내문(출처 : 공주시 「쌍달 작은 도서관」 양동진 선생님 제공)
오동진 장군 추모 포스터. 2020년 12월 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 입구 오동진 장군 추모비 앞에서 추모식 행사를 알리는 안내문(출처 : 공주시 「쌍달 작은 도서관」 양동진 선생님 제공)

최고로 높은 훈격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음에도 왜 이런 현상이 초래되었을까? 김좌진 장군에 대한 논문은 매우 많은데 오동진 장군에 대한 논문이 한 편도 없다는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요인으로 ‘반공’이라는 왜곡된 이념 갈등이 빚은 비극이라는 생각이다. 철저하게 민족주의계열 공화주의자였음에도 오동진 장군을 기억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북쪽 김일성과 관련된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사회주의계열 독립지사들 가운데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럼에도 이념의 멍에에 갇혀 대중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가 수십 년 동안 역사교육을 독점한 때문이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제 가슴에 단 최초의 인물은 우남 이승만이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던 시절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라는 가장 높은 훈격으로 자신을 영화롭게 치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장면-박정희-전두환 정권이 끝날 때까지 사회주의 계열 독립유공자는 거의 없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하나둘씩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서훈이 추서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해방 이전에 사망한 항일지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공화주의 이념을 지닌 민족주의 항일독립지사가 외면 받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김일성과 관련된 일화 때문이고 이는 북쪽 김일성의 역사적 존재를 사실로 입증해 주는 간접자료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오동진 장군은 절친이었다. 1926년 김형직이 만주에서 사망하자, 오동진 장군은 14살 김일성을 정의부 소속 항일 민족학교인 ‘화성의숙’(교장 최동오)에 입학시킨 인물이다. 그런 연유로 북쪽 평양 애국열사릉에는 송암 오동진 장군을 기리는 묘가 조성돼 있다.

반면에 남쪽에 연고가 없던 오동진 장군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무연고 133위 순국선열과 함께 '무후(無後)선열제단'에 위패가 안치돼 있다. 모두 분단 체제가 빚은 역사의 왜곡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된 김좌진 장군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분단된 한국사회는 ‘반공’이라는 이념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탓으로 본다.  공식화된 교육과정과 여론매체를 통해 김좌진 장군을 지나칠 정도로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반면에 일송 김동삼이나 송암 오동진은 상대적으로 파묻히거나 대중의 기억에서 망각된 느낌이다. ‘코뮤니스트에 의해 자행된 피살’이라는 점에서 김좌진 장군의 죽음은 남쪽 분단정권에선 교육선전용으로 활용하기에 기막힌 역사교육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을 지나치게 부풀려서 대중의 인식을 왜곡시키거나 반대로 은폐하거나 축소시킴으로써 대중의 기억을 조작해선 생명력을 지속할 순 없다. 과거의 역사가 끊임없는 역사전쟁을 통해서 새롭게 쓰는 현대사인 이유이다.

김좌진 장군의 업적은 청산리 전투와 함께 높게 평가하되 그와 관련하여 균형을 잃은 서술이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김좌진 장군의 죽음이 1920년대 중반 이후 ~ 1930년대 내내 지속되었던 아나키스트와 코뮤니스트 간 대립과 갈등에서 비롯된 참극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920년대 급부상한 코뮤니즘이 항일운동에서 주류이자 대세가 되면서 항일독립운동 노선 상 치열한 대립과 갈등은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살육을 자행할 정도로 빈발했다. 실제로 아나키스트 김좌진을 암살한 코뮤니스트 청년 박상실은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 소속 독립군이 되어 일본군과 교전 중 장렬히 전사한다.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김좌진(왼쪽), 홍범도 사진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김좌진(오른쪽), 홍범도(왼쪽)실제로 봉오동 전투의 영웅은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이고 청산리 전투의 영웅은 홍범도, 김좌진, 최진동, 최운산, 안무와 이름 없는 어랑촌, 청산리 풀꽃 민중들이다.(출처 : 하성환, 미래앤 <한국사>교과서 사진을 다시 찍은 것임)

그리고 전국에서 가장 많이 채택한 『한국사』 교과서에서조차 ‘청산리 전투 = 김좌진’으로 1인 영웅사관에 기초해 기술하고 가르쳐온 때문이다. 이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던 북로군정서 출신 철기 이범석이 저지른 왜곡된 증언과도 관련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청산리 전투는 교과서에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은 최진동-최운산 장군을 비롯해 독립군 연합부대와 이름도 없이 참전한 수많은 동포들의 희생 위에 이룩한 거룩한 승리였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군 1명을  건사하기 위해선  조선인 10가구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코  <청산리 전투=김좌진 장군>이라는 영웅사관으로 설명할 수 없고 그 또한 역사의 진실도 아니다.  수천 명 독립군을 먹이고 입히고 유지하기 위해선 만주 일대  조선 민중들의 땀과 눈물과 희생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제가 2만 사단 병력을 개처럼 풀어서 연길현, 화룡현을 비롯해 만주 일대에서 자행한 천인공노할 만행은 그에 대한 철저한 보복이었다. 이미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과  김산의 치열한 삶을 다룬 님웨일즈의 <아리랑>에 참혹한 모습으로 일부 기술돼 있다. 

수천 가구를 불태우고 만주 일대 조선인 교회와 학교를 무수히 파괴했으며 소학교 교사를 잡아다 껍질을 벗겨내 죽일 정도였다.  조선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특히,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살육, 약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학살 장면이 너무도 참혹해서 사진은 물론 글도 실을 수 없을 정도이다.  경신참변(1920) 당시 일제 학살 만행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는 실종된 뒤 일제에 의해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오동진 장군이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이유는 냉전의 질곡 속에 갇힌 때문이다.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 바로 데탕트가 열린 시기는 1990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1992년 한중 간 국교가 체결된 이후이다.

그 전까지는 북쪽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대륙이나 만주 벌판에서 전개된 치열한 항일독립운동사를 직접적으로 접근하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 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만주 일대 독립운동사 사적지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항일독립운동사 역사학계 1세대인 고 조동길 교수를 비롯해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1990년대 이후 중국 대륙과 만주 일대 독립군 전적지를 답사했던 것은 그러한 연구와 발굴 과정의 일환이었다.

오동진 장군이 사령관으로 활동했던 정의부나 김승학의 참의부 활약상이 대중에게 소개된 것도 2000년 이후부터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교과서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지금 50-60대 나이 든 세대의 경우, 학교교육을 통해서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공부할 때 정의부와 참의부가 국내진공작전 당시 일제와 교전한 내용은 없었다.  1920년 <봉오동=홍범도, 청산리=김좌진>으로 왜곡된 채 1920년대 만주항일무장투쟁을 배웠다.

그리고 이후 1920년대를 의열단, 물산장려운동이나 6‧10만세운동, 신간회, 광주학생운동을 배운 것이 교과서에 나오는 전부였다. 김일성이 등장하는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이나 1940년대 조선의용군은 아예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못했다. 실제로 그 당시 가르치던 역사교사들조차 1920년대와 1930년대 만주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아는 이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나 1920년대 오동진 장군이 속했던 정의부는 국경을 넘나들며 수백 회에 이를 정도로 일경과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다. 실제로 오동진 장군이 피검됐을 때 평안북도 경찰부가 밝힌 통계 수치에도 이를 입증할 자료가 나온다. 1920년부터 1927년 피체 당시까지 연인원 14,149명의 독립군을 지휘하고 일제 관공서 143개소를 파괴하거나 전소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일제경찰과 밀정, 친일부호 914명을 처단하고 일경과 수백 차례 교전을 벌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대한광복군 총영」 약장. 1920년 9월에 결성된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조국의 광복과 인권의 평등을 종지로 삼을 것”을 명문화한 「대한광복군 총영」 약장 (출처 : 독립기념관)
「대한광복군 총영」 약장. 1920년 9월에 결성된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조국의 광복과 인권의 평등을 종지로 삼을 것”을 명문화한 「대한광복군 총영」 약장 (출처 : 독립기념관)

1920년 대한광복군 총영을 창설해 지휘하던 그해에만 오동진 장군은 일제와 78회 전투를 치렀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쳐 경찰관 주재소 56개소를 기습 공격했다. 사실상 정의부와 고려혁명당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으로 오동진 장군은 국경수비대를 무너뜨리면서 국경 일대 식민통치 기능을 마비시킨 전설적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2019년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안경신 의사의 평남도청 폭파 사건 역시 오동진 장군이 대한광복군 총영 시절 직접 국내에 파견한 총영 결사대원 안경신이 이룬 거사였다. 당시 안경신 여사는 임신 중임에도 폭탄을 두른 채 도청을 폭파하고 일경 2명을 폭살시켰다.

대한광복군 총영 결사대원 여장부 안경신. 안경신은 임신한 몸으로 1920년 8월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경찰 2명을 폭살시킨 열혈 항일독립지사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대한광복군 총영 결사대원 여장부 안경신. 안경신은 임신한 몸으로 1920년 8월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경찰 2명을 폭살시킨 열혈 항일독립지사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요컨대 역사는 공정하고 균형된 시각으로 기술해야 한다. 그러할 때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후대에 남길 기록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남북 분단과 (반공)이념의 낡은 질서에서 벗어나 오동진 장군을 교과서에 제대로 기록하고 대중의 기억 속에 귀감이 되는 역사 인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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