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나비를 검색하면 가수 김상국이 부른 불나비(1965)부터 최백호의 불나비(1980), 장윤정의 불나비(2010년 5집 앨범)와 함께 민중가수 최도은이 열창한 ‘불나비’까지 여럿 있다. 그런데 최도은이 노동자 집회 현장에서 빼놓지 않고 부른 ‘불나비’는 작곡‧작사자는 물론이고 작품을 만든 연대가 불명으로 나온다. 언제, 누가, 몇 년도에 만든 작품인지 알 수가 없다.

2001년 집회 현장을 찾아 <불나비>를 열창하며 문화운동을 전개하던 당시 민중가수 최도은 님 모습(출처 : 한겨레 신문 신윤동욱 기자)
2001년 집회 현장을 찾아 <불나비>를 열창하며 문화운동을 전개하던 당시 민중가수 최도은 님 모습(출처 : 한겨레 신문 신윤동욱 기자)

어떤 사람들은 운동권 가요 ‘불나비’를 민중가수 최도은의 작품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더러 있다. 그만큼 노동가요 ‘불나비’를 최도은이 8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집회 현장에서 빼놓지 않고 열창한 탓이다. 불나비는 80년대 후반부터 집회 현장에서 열창하기 시작해 90년대와 2000년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 삶을 담은 투쟁의 노래이자 노동운동의 무기로 애창되고 있다.

민중가수 최도은은 2013년 1월 29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부 초청 강연에서 ‘불나비’ 창작 시기를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으로 보았다. 그녀는 「노동가요 이야기 – 노동가요로 본 해방 이후 노동운동사」 주제 강연에서 불나비는 ‘전태일 열사 정신’을 계승하는 노래로 80년대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즐겨 불렀다고 증언했다.

민중가요 <불나비>를 작사, 작곡한 음성철 님.  1979년 대학 1학년 시절 소록도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던 모습(출처 : 음성철)
민중가요 <불나비>를 작사, 작곡한 음성철 님. 1979년 대학 1학년 시절 소록도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던 모습(출처 : 음성철)

운동권 가요 ‘불나비’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1981년 당시 중앙대 경영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음성철이다. 그는 재수 시절 78년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는데 1981년 사당동 이모님 댁에서 생활할 때 옥상에서 기타를 치면서 ‘불나비’를 완성했다.

그가 작사‧작곡한 ‘불나비’를 처음 선 보인 시기는 1981년 ‘다울’ 야학교사들이 서울 근교 강촌으로 MT를 갔을 때다. MT를 마치고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면서 자작곡인 ‘불나비’를 기타 연주와 함께 열창했다. 그리고 81년 그해 중앙대 축제에서 공식적으로 첫선을 보였다. 당시 축제는 ‘조랑말’ 듀엣이 진행했는데 바이올린을 전공한 81학번 야학 후배 오학순과 함께 출전하기로 했으나 당일 불참하여 음성철 혼자 참가했다.

축제 무대에 참가하게 된 경위는 당시 경영대 81학번 후배이자 학도호국단 간부였던 이용(뒷날 삼성 상무이사 재직)의 권유가 있었다. 운동권 가요 ‘불나비’를 ‘우린 나그네’라는 곡명으로 바꿔 참가했는데 가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중도 탈락했다.

1981년 가을, 남대문 경찰서는 ‘다울’ 야학 교사들을 불온 문서 제작 유포 혐의로 한밤중 12시에, 그리고 새벽녘 4시에 기습적으로 줄줄이 연행했다. 경찰서 수사 기록상 ‘삶터’ 사건으로 명명되었는데 직접 관련된 10기 회장 이용교(광주대 사회복지학 교수) 외에도 8기 회장 음성철(택시 기사), 9기 회장 박정곤(치과의사)은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결국 이용교, 이희룡 두 명은 강제 입대를 강요받았고 대자보를 작성한 글쓴이는 훈방 조치됐다.

8기 야학회장 음성철이 작사‧작곡한 ‘불나비’는 자신이 야학교사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70년대 말 ~ 80년대 초 암울한 시대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어린 노동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자 이 곡을 만들었다.

노동가요 <불나비> 악보(출처 : 하성환). <불나비>를 최초로 작사, 작곡한 사람은 1981년 중앙대 경영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야학교사 음성철 님이다.
노동가요 <불나비> 악보(출처 : 하성환). <불나비>를 최초로 작사, 작곡한 사람은 1981년 중앙대 경영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야학교사 음성철 님이다.

노랫말 가운데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라는 가사가 나온다. “하얀 꽃들”은 공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밤에 졸린 눈을 비비며 야학에서 공부하던 어린 노동자들을 상징한다. “수레에 싣고”에서 ‘수레’는 당시 전국적으로 200개 존재했던 야학을 상징한다. 중앙대 축제 당시 참가곡 명 ‘우린 나그네’에서 ‘나그네’는 대학생 신분이던 야학교사들을 가리킨다.

음성철은 1981년 상반기 ‘다울’ 야학 회장직을 마치면서 『다울 8호』 야학 회지를 발간했다. 야학 회지 『다울 8호』 맨 앞장에 ‘독립군가’를 넣었고 맨 뒷장에 자작곡인 ‘불나비’를 실었다. 따라서 운동권 가요 ‘불나비’ 작품 연대는 1981년이다. 이후 운동권 가요 ‘불나비’는 ‘다울’야학 생월 잔치 때 매달 함께 불렀다. 조금은 느리게 그러면서도 슬픈 곡조로 비장한 마음으로 불렀다. 어둠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찾아 돌진하는 불나비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 야학교사들은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흔들면서 찬송가 ‘우리 승리하리라’를 힘차게 불렀다.

중앙대 학생 음성철이 작사‧작곡한 ‘불나비’는 이후 야학 학생들이 다니던 마포구 소재 성산교회에서 애창되었다. 당시 그 교회에는 근처 이화여대, 연세대, 서강대 학생들이 다녔는데 그 학생들 입에서 입으로 ‘불나비’는 80년대 초 대학가로 전파하였다. 80년대 운동권 가요 가운데 적지 않은 노래들이 대학생들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우산 혁명(2014) 당시 홍콩 민주화시위에서, 그리고 오늘날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서도 열창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 선생이 쓴 시에 전남대 학생 김종률이 곡을 붙여 만든 작품이다.

가수 안치환이 지난 2022년 8월 16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연남스페이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는 장면(출처 : 글, 사진 한겨레 신문 정혁준 기자)
가수 안치환이 지난 2022년 8월 16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연남스페이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는 장면(출처 : 글, 사진 한겨레 신문 정혁준 기자)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역시 당시 동아리 선배가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연세대 학생이던 안치환이 작곡했다. 안치환은 ‘철의 노동자’, ‘잠들지 않는 남도’,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비롯해 노래패에서 솔로로 독립한 이후에도 수많은 노래들을 창작하고 불렀다. 90년대와 2000년대 집회 현장에서 울려 퍼지던 ‘동지가’ 역시 전남대 공대 학생이던 박철환이 작사‧작곡해 수많은 노동자들 가슴을 뜨겁게 했던 애창곡이다.

‘단결투쟁가’, ‘파업가’ 또한 한국체대 태권도학과 제적생 김호철이 만든 작품이다. 안치환이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던 ‘광야에서’도 성균관대 무역학과 82학번 문대현이 1984년에 작사‧작곡한 곡이다. 마찬가지로 중앙대 경영대를 다녔던 음성철 역시 야학 활동을 하던 1981년 대학교 3학년 시절 ‘불나비’를 작사‧작곡했다.

80년대 초엔 야학연합회 사건(1982)을 비롯해 야학 활동에 머물지 않고 학생운동을 하던 상당수 학생들이 직접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던 시절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절망적인 노동 현실에 죽음으로 항거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당대 지식인 사회와 종교계, 그리고 학생운동에 크나큰 충격을 던졌다. 70년대 중반에 노동야학의 등장 또한 그 충격의 여파였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열사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항거하며 법전과 함께 자신을 불살랐다. 분신 항거하던 1970년 11월 13일 당시 평화시장은 전국 의류산업의 70%가 집중됐던 공간이었다. 분신 항거 당시 전태일 열사는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출처 :하성환)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열사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항거하며 법전과 함께 자신을 불살랐다. 분신 항거하던 1970년 11월 13일 당시 평화시장은 전국 의류산업의 70%가 집중됐던 공간이었다. 분신 항거 당시 전태일 열사는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출처 :하성환)

다시 말해 근로기준법전과 함께 자신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의 희생에 대한 지식인 사회가 보인 자기 성찰의 몸짓이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정치군인들이 등장하자 이에 맞서 학생운동은 80년대 초 노학연대로 노선을 수정하면서 전선을 넓혀갔다. 암울한 시기였지만 대학생들 상당수는 대학생 신분을 벗어던지고 인천 부평, 부천 지역 노동자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에 청계피복노조가 참여하자 5공 군사정권은 노조 사무실을 폐쇄했다. 청계피복 노조 조합원들(왼쪽 창문)이 1985년 7월15일 새벽 경찰의 봉쇄를 뚫고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상가아파트 조합 사무실에 들어가 ‘노동조합 정상 활동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같은 층 오른쪽엔 사복경찰과 전투경찰이 외부인 출입을 막고 있다. (출처 :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겨레 21 박승화 기자)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에 청계피복노조가 참여하자 5공 군사정권은 노조 사무실을 폐쇄했다. 청계피복 노조 조합원들(왼쪽 창문)이 1985년 7월15일 새벽 경찰의 봉쇄를 뚫고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상가아파트 조합 사무실에 들어가 ‘노동조합 정상 활동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같은 층 오른쪽엔 사복경찰과 전투경찰이 외부인 출입을 막고 있다. (출처 :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겨레 21 박승화 기자)

전태일 열사의 희생을 딛고 출발한 청계피복노조는 80년대 초 5공 군부정권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85년 구로공단 동맹파업 투쟁에 참여했고 86년엔 대통령 직선제를 촉구하는 5‧3 인천 항쟁에 참여했으며 87년 6월 민주화 운동에도 치열하게 참여했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한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투쟁 당시 ‘불나비’를 애창했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1987년 7월26일 되찾은 조합 사무실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밝게 웃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가운데)와 동생 전태삼씨(서있는 분 중 왼쪽 세 번째), 청계피복노조 위원장을 한 김영대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왼쪽 네 번째) 등이 조합원들과 함께했다. (출처 :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20년 11/6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1987년 7월26일 되찾은 조합 사무실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밝게 웃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가운데)와 동생 전태삼씨(서있는 분 중 왼쪽 세 번째), 청계피복노조 위원장을 한 김영대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왼쪽 네 번째) 등이 조합원들과 함께했다. (출처 :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20년 11/6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전태일 동생 전순옥은 청계피복노조가 치열하게 민주노조 사수 운동을 전개할 때 오빠 전태일을 생각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나아가 노조에 대한 탄압의 강도가 거세지고 동지들이 고난을 받고 감옥에 갈 때마다 ‘불나비’를 부르며 마음을 굳건히 했다고 회상했다.

노랫말 가사처럼 “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 섞인 미소로 지워버리고” 오직 새로운 세상을 열망했다. 노랫말 가사 “친구야 가자! 가자! 자유 찾으러! 다행히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 가시밭길 험난해도 나는 갈테야. 푸른 하늘 넓은 들을 찾아갈테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당대 청년 학생들, 노동자들 스스로 흔들림 없는 굳건한 의지를 드러낸 표현이다.

운동권 가요 ‘불나비’는 1984년 민요연구회에서 음반으로 취입했다. 그리고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위 현장이나 노동자 집회 현장에서 급속히 확산하였다. 노래를 통해 한국 사회 모순에 맞서며 이를 극복하려 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한 시기 ‘불나비’는 록 음악 형태로 편곡되면서 빠른 템포와 강렬한 반주, 그리고 무대 위 율동을 선사했다. 80년대 말 90년대를 거치면서 집회 현장에서 빼놓지 않고 열창했던 최고의 애창곡이 바로 ‘불나비’였다.

특히 민중가수 최도은이 열창한 ‘불나비’는 압권이었다. 집회 현장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불나비’를 애창했고 최도은에게 집요하게 요구할 정도였다. 특히 2002년 창립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약칭 전공노) 집회에선 최도은의 ‘불나비’는 단골 메뉴였다. 그의 강렬한 창법과 심장을 뛰게 만드는 중량감 높은 고음 처리는 사람들 가슴을 마구 흔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가요 ‘불나비’를 전국화시킨 인물은 단연코 민중가수 최도은이다.

2019년 한국도로공사 요금소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약 1,500명이 정규직 전환 거부에 맞서 2019년 8월21일 청와대 들머리에서 “부당해고 철회하라!”는 글귀가 적힌 펼침막을 들고 있다. 펼침막 뒷면에는 <파업가> <철의 노동자> <불나비> 등 투쟁가의 노랫말이 손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다. (출처 : 글과 사진 한겨레 21 박승화 기자)
2019년 한국도로공사 요금소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약 1,500명이 정규직 전환 거부에 맞서 2019년 8월21일 청와대 들머리에서 “부당해고 철회하라!”는 글귀가 적힌 펼침막을 들고 있다. 펼침막 뒷면에는 <파업가> <철의 노동자> <불나비> 등 투쟁가의 노랫말이 손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다. (출처 : 글과 사진 한겨레 21 박승화 기자)

후렴구에 나오는 노랫말 가사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내 마음은 곧 터져 버릴 것 같은 활화산이여! 뛰는 맥박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 버릴 것 같애.”는 함께 열창하던 모든 노동자의 가슴을 쿵쾅거리며 젊은 심장을 마구 뛰게 만들었다. 실제로 함께 부르다 보면 고통스러운 현실과 슬픔을 넘어 굳센 의지를 갖게 했고 젊은 피를 뜨겁게 했다. 90년대와 2000년대 들어 ‘불나비’는 최도은, 류금신 등 민중가수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약칭 노찾사), ‘꽃다지’, ‘소리타래’, ‘노래벗’을 비롯한 노래패들을 통해 노동가요에서 오늘날 민중가요로 더욱 발전하였다.

운동권 가요로 등장한 ‘불나비’는 80년대 중후반 NL-PD로 나뉘어 이론투쟁이 치열했던 당시 진영을 넘어서서 모두가 애창했던 곡이다. 군부독재 폭압 통치라는 암울한 현실과 고통 속에서도 ‘자유’를 향해 불나비처럼 희망의 불빛을 좇아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굳센 의지를 드러낸 작품이다. 나아가 노동착취가 자행되던 야만스러운 노동 현장에선 ‘평등‘과 ‘평화’를 열망하며 노동자들 가슴을 뜨겁게 고동치게 한 작품이다.

대우조선 해양 하청 노조 파업 당시 유최안 부지회장이 1㎥의 철제감옥을 용접해 만든 뒤 단식 농성을 통해 <이대로 살 순 없다>며 임금 인상과 열악한 노동현실 개선을 절규하고 있다.(출처 : 한겨레 신문 김명진 기자)
대우조선 해양 하청 노조 파업 당시 유최안 부지회장이 1㎥의 철제감옥을 용접해 만든 뒤 단식 농성을 통해 <이대로 살 순 없다>며 임금 인상과 열악한 노동현실 개선을 절규하고 있다.(출처 : 한겨레 신문 김명진 기자)

운동권 가요 ‘불나비’가 1981년에 선을 보인 지 올해로 42년이다. ‘불나비’가 21세기 오늘날도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권력자에 의해 ‘자유’가 오용되고 권력자에 의해 노동자들이 무참히 탄압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약자인 노동자들이 탄압받는 현실! 지극히 모순된 이런 현실이 지속되는 한, ‘불나비’는 민중가요로서 사람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애창될 것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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