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가 신북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들이 만나 어머니회에 가입하고

눈치코치만 남은 엄마들이 이태나 뜸 들이다가
둘째가 1학년일 때 드디어 아비들을 한데 모았다.

그렇게 불혹을 앞두고 만난
우리, 성산동 남자들이 아홉이었는데

살다 보면 별놈이 많은 법
여기라고 왜 그런 별종이 없겠니?

본심이야 그랬을까마는
친구 등쳐먹고 밤도망을 놓은 빚꾸러기가 있고

그 오묘한 속내 헤아릴 순 없지만
하루아침에 말짱한 처자식 외면하고 여비서랑 붙어먹다 딴살림 차린 놈도 있거든.

일찌감치 ‘용미리’에 터를 잡은 상수 형 말고
아직, 여섯 - 도원 상윤 상학 영호 일곤 춘근 –은 건재하다지만….

몇 날 몇 밤을 지새우고도 또 다른 얘기 쏟아 놀 게 뻔해
모르긴 몰라도 켜켜이 묻어 둔 얘깃거리가 만리장성을 써 보낸들 끝이 날까 싶지 않다.

월드컵공원에서 구름다리를 지나면 하늘공원 오르는 나무 계단이 보인다.
월드컵공원에서 구름다리를 지나면 하늘공원 오르는 나무 계단이 보인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없는 것 하나 없다고 큰소리치면서

어느덧 30여 년
무상(無常)한 세월!

산전수전 다 겪은
무슨 팔이, 무슨 잡이, 무슨 뱅이들한테

세상에나, 아무려면 같잖은 말 또 있으랴
맘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從心)이라니….

무릎 연골 닳아지고
어깨 결절 드러나도

암시랑토 않게
일흔 고개 넘기 하도 얼척없어

최강한파 몰아친
12월 20일 아침

마다 않고 덥석 만나
거침없이 무작정 걸었다.

눈 쌓인 계단길
가다 서서 잡아 주고

굽이굽이 비탈길
걷다 말고 밀어 주고

하늘 닿은 하늘공원
마루벌판 누비면서

옛일을 추억하고
앞일을 더듬으며

오늘이 마지막인 듯
우정을 읊조리고

남긴 발자국 되돌아보며
지난 세월을 가슴에 담고 품고 보듬었다.

이른 새벽 누군가 다녀갔나 보다. 오롯한 족적이 유난히 도렷하다(사진 : 윤영호 제공)

 

난초와 지초의 땅, 중초도에서

학교 수업 마치고 횡단보도 없는 한길을 무리지어 집으로 가는 길, 지나가던 자동차를 향해 눈웃음치면서 치맛단 슬쩍 들어올리고 연신 깔깔대던 상암초등학교 아이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들개 몽둥이로 때려잡아, 네 다리 묶고 쓰레기 더미에서 내뿜는 메탄가스로 꼬시르며 내남없이 히죽대던 난지도 사람들,

누구 한 사람 근무하고 싶지 않은 최하위 C등급지에서, 모로 가나 기어가나 2년만 버티면 촌지가 철철 넘치는 A등급지로 간다면서 속내 감추고 너털거리던 상암학교 선생들,

때가 되면 줄줄이 '헐벗은' 학교를 찾아 돈봉투를 내밀고 티셔츠를 돌리고 과학 기자재를 기증하던 교육장 문교부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 나리들,

그때마다 '허기진' 얼굴로 굽신거리며 넙북넙죽 받아 챙긴 이가 있었으니, '청백리'를 빙자하여 노태우정부에서 내준 1,300cc 학교장 승용차마저 세워놓고 다니면서 세입세출외현금출납부를 조작, 강남에 저택이 두 채라던 김아무개 교장,  

아,  미안하다. 안쓰럽다. 너절하다!
하필이면 없는 사람 끼리끼리 모여 살던 난초와 지초의 땅, 중초도(中草島)에서 삼풍백화점의 넋까지 소환하려니 자금자금 씹힌 밥알 뱉지 못하고 몽비망(夢非妄)을 되뇌인다.
 

하루하루가 이별 여행
 

40년이 넘도록 맥주를 1박 2일로 마시던 친구는 전립샘에 탈이 자배기로 나는 바람에 아예 술을 끊고,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뒤에 자기 신발 하나 제대로 꿰차지 못하는 친구는 말은 어눌해도 성정은 여전히 팍팍하고,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일주하던 친구는 4개의 어깨 근육을 덮고 있는 ‘회전근개’라는 인대가 나가서 한갓진 곳을 걸을 때도 절로 융숭하기 그지없다 하고.

숨골 뒤 목뼈가 덧자라 혈관이 막힌 '경추부 척추증' 때문에 무려 7시간 넘게 감압 수술을 받았다는 친구는 다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하고,

말없이 듣고 있던 한 인간이 헛기침하더니 한바탕 신세타령을 보탠다.
 

환상 범벅인 삶, 피차 다시 만나리니
 

그동안 얼마나 뻣뻣하게 굴었으면 일자 목(一字목)일까?
목뼈 등마루 허리뼈 꼬리뼈가 하나같이 뒤틀리다 보니 만사가 비꼬인 상태라, 한번은 눈을 떴는데 꼼짝달싹 못하고 두 시간 가까이 벽을 보고 눈만 끔벅거리다가 사람이 얼마나 아파야 죽겠느냐는 푸념이 일었는데, 길 가다가 삭은 짚단 허물어지듯 졸지에 주저앉아 일어나질 못하고 뿍뿍 기어서 포도시 집으로 가고, 계단길 오르내릴 때 한 걸음 내딛고 뒷발을 모은 채 손잡이를 잡고 게처럼 옆으로 옆으로…….
 

세상사,
아리고 쓰린 맘 그 누가 감싸 주랴.

두 돌을 이틀 남겨두고 12월 22일, 하늘의 별이 된 손주 이야기부터, 살갑게 웃으면서 출근한 마노라가 ‘안녕’도 하지 못한 채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포갠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처절하다. 참혹하다. 지독히도 비루한 망상이 현실이려니 삶 자체가 환상 범벅이다.

어느 대목에선가 들썩거릴 법도 하련만 속없는 것들!
징한 놈의 세상, 모진 삶이다.
뇌까리는 놈도 듣는 놈도 퀭한 눈 내리깔고, 중구난방이다.
입에 술대면 죽는다고 했다면서 의사 말 뒤로하고 대낮부터 죄다 권커니 잣거니 그저 허랑방탕하다. 해도, 흐트러짐 하나 없고 차라리 구수하다.

영호 어머님이 먼길 떠나면서 점지해 주신 자리
머잖아 그 길 따라 갈 우리들은 오늘도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이별 여행 예행연습이었다.
나가는 년이 세간 사랴마는 꽤나 구성진 하루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이여
하루하루 멀어져가는 계묘년이여

뒤에 남은 사람이 먼저 간 사람 눕혀 주고
먼저 간 사람이 뒤에 올 사람 손잡고 맞이하리니

오늘을 붙잡지 마라
사랑을 붙좇지 마라

그닥 슬퍼할 일 아니다.
가는 날 다시 만나리니…….

'작가의 정원'에만 억새가 남아 있고 드넓은 억새와 띠 군락은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눈 내린 하늘공원 정상에 선 두 친구, 키 큰 영호가 애써 허리를 굽혀 일곤이 어깨에 기대고 서 있다. 성산동 남자들은 다 그렇게 눈높이를 맞춘 채 서로서로 의지하고 살아간다.
'작가의 정원'에만 억새가 남아 있고 드넓은 억새와 띠 군락은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눈 내린 하늘공원 정상에 선 두 친구, 키 큰 영호가 애써 허리를 굽혀 일곤이 어깨에 기대고 서 있다. 성산동 남자들은 다 그렇게 눈높이를 맞춘 채 서로서로 의지하고 살아간다.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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