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 퀸 멤버들이 그 시대 최고 앨범을 만들기 위해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시골로 간다. 그들은 넓은 허허벌판에 지나가는 이웃조차 없는 적막함이 짙게 배어있는 곳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멤버들은 자기만의 기분을 노래에 투영하여 작곡 한다. 그렇게 탄생한 곡 중 하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다.

후기 인상주의로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요양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오베르라는 마을에 거주하게 된다.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에서 고흐는 하루에 1편 이상 그림을 그리며 두 달 동안 총 70 작품을 완성했다. 명작 탄생의 결정적 시기다.

이 경우 외에도 작가, 예술가, 학자들은 뛰어난 발상을 얻기 위해 또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혼자서 아무도 없는 지방으로 종종 내려간다.

나는 몬트리올 맥길 박사과정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 익숙한 문화와 환경을 뒤로 한 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낯선 도시로 간다는 것이 두려웠다. 외로움이 사무쳐 오지는 않을까? 한국음식, 문화, 모든 것이 그립지 않을까? 걱정도 많았지만 한편으론 새롭게 펼쳐질 세상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처음 몬트리올에 도착했을 때 느낀 것은 ‘한적함’과 ‘느긋함’이었다.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몬트리올은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한국에서 보았던 교통체증, 출퇴근 지옥,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골목과 거리,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고층건물들은 몬트리올에선 찾아 볼 수 없었다. 건물들은 좀 촌스러웠지만 대신 고풍스러움이 있었다. 세련되지 못하고 소박한 패션의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사는 몬트리올은 바삐 걷지 않는 사람들의 느긋한 걸음에서, 길을 가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는 미소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내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한가로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내가 하는 실험은 우리 실험실에서도 새롭게 시도하는 뇌과학 연구였기에 초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바쁘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고군분투의 6-7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앞으로 진행되었고, 흥미로운 결과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결과에 고무되어 나의 모든 생각은 프로젝트로 향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직전까지, 추후 어떤 연구를 계획해야할 지, 왜 이런 결과들이 나오는 지에 대한 의문들이 나의 머릿속을 꽉 채우며 돌아다녔다. 아침에 샤워를 하면서, 길을 걸으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운동을 하면서 등 거의 하루 종일 연구 생각이 끊이질 않았고,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도 결과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분주히 논문을 읽었다.

어떤 특정 분야에 이렇게 집중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집중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퀸이나 고흐처럼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몬트리올에서는 마음과 시간을 써야 하는 사회적 교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에너지를 오로지 한 가지에만 집중해서 쏟아 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 지속되면서 머리는 마치 과부하에 걸린 것 같았다. 다양한 생각이 머리에 꽉 차있어 오히려 또렷한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잠들기 전까지 논문을 보면 뇌가 심하게 각성 되는지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만의 세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1. 퇴근 후 운동 하거나 산책 할 때 연구 생각은 하지 않기

2. 목욕을 할 때도 핸드폰과 논문 보지 않고 잠시 ‘멍 때리기’

3. 밤 11시 이후론 연구와 관련된 모든 것 하지 않기. 자기 전엔 책이나 단순하고 웃긴 드라마 보기

놀랍게도 잠시 머리를 비우는 시간, 즉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멍한 시간을 갖고 나니 머리가 한결 더 맑아 생각이 또렷해지고 밤에 잠도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최근 뇌과학 수업에서 '멍 때리기'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 아직도 몬트리올은 겨울왕국. 멍 때리며 산책하다 한 컷

연구결과에 의하면 ‘멍 때리기’는 기억력, 창의력 등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멍 때리는 동안 우리가 새롭게 받아들인 정보들이 기억으로 저장되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멍 때리기’ 시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무엇을 할까?’, ‘오늘은 무슨 운동을 하지?’, ‘아까 누가 무슨 말을 했더라?’ 이런 기본적인 생각도 ‘멍 때리기’에 포함된다고 한다. 멍 때리는 동안 머리는 이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랜덤식 잡다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칠 때 뇌의 특정 영역이 활발히 활동 한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는 왕으로부터 왕관이 순수한 금인지 확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고민을 하던 아르키메데스는 잠시 휴식 겸 목욕을 하러 욕조에 들어간다. 이 때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유레카’를 외치며 ‘비중’ 개념을 도입하여 왕관에 금이 아닌 다른 물질이 섞여 있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

또 아이작 뉴턴은 사과나무 밑에 앉아 잠시 멍한 시간을 갖다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유심히 보게 된다. 그러곤 사과가 항상 수직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다.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멍 때리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만 글을 쓰고, 나머지 시간엔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즐긴다고 하였다.

작년에, 2014년 서울광장에서 국내 최초로 ‘멍 때리기’ 대회를 열었고 그 이후 매년 열린다는 기사를 보았다. 처음 그 기사를 읽었을 때 ‘무슨 그런 대회가 있어?’ 하고 웃었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대회다.

인터넷, 핸드폰, SNS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많은 정보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보고 읽는 것은 많아도 일주일 지나면 내가 그동안 무엇을 봤지? 기억에 남는 건 없을 때가 많다. 이런 이유는 뇌가 들어온 정보와 경험을 정리하고 분류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인연을 잠시 뒤로 한 채 몬트리올에 오면서 나의 모든 두뇌활동은 연구 하나로 집중되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집착적일 만큼 집요한 집중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집중 때문에 잠시 뇌에 과부하가 걸려 혼란스러운 시간도 있었지만 이제 나에게는 ‘멍 때리기’가 있다.

‘멍 때리기’ 중요성을 실감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루에 조금이라도 이런 여유 시간을 가져 보길 권하고 싶다. 산책, 운동, 목욕 등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별 거 아닌 생각을 해보자. 그러다 보면 별안간 생각지도 못했던 재밌는 발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아직도 몬트리올은 겨울왕국. 멍 때리며 산책하다 두 컷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이지산 주주통신원  elmo_party@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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